그룹명/문화유적유물산책 240

도산서원 ( 陶山書院)

鄒魯之鄕 (추로지향) 書院(서원) 입구에 ‘鄒魯之鄕’(추로지향)이라는 篆書體(전서체)의 비가 서있다. 李滉(이황)은 本來(본래) 도산 남쪽에 書堂(서당)을 짖고 後學(후학)을 가르쳤으나 그곳이 마음에 들지 않아 61세 되던 1561년에 現在(현재)의 位置(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孔子의 77대 宗孫(종손)인 孔德成(공덕성) 博士(박사)가 서원에 謁廟(알묘)한 후 쓴 親筆(친필)을 새긴 記念碑(기념비)라고 한다. 시사단 (試士壇) 도산서원 천광운영대에 서서 강 건너를 보면 운치 있게 솟아있는 소나무숲과 비각이 보인다. 조선시대 영남지방의 과거시험 장소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경북 유형문화재 시사단이다. 1973년 8월 31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안동시에서 관리하며 조선 정조 때 지방별과(地方..

서울 정릉(貞陵)

서울 정릉(貞陵) 조선 태조 이성계의 정비 신덕왕후의 무덤. 조선 태조(太祖, 재위 1392∼1398)의 현비로 방번(芳蕃)·방석(芳碩) 두 왕자와 경순공주(慶順公主)를 낳은 신덕왕후 (神德王后 ?~1396) 강씨의 무덤이다. 신덕왕후 강씨는 신의왕후 한씨 사후 정비로 책봉되었다. 하지만 신덕왕후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던 태종 이방원은 신덕왕후를 후궁으로 강등시켰고 능은 묘로 격하되어 일반 무덤과 비슷해졌다. 또한 정릉의 일부 석조물들을 홍수로 유실된 광통교를 다시 세우는 데 갖다 쓰고, 정자각도 없애 버렸다. 하지만 약 200년 후 1669년(현종 10) 송시열의 상소에 의해 신덕왕후는 왕비로 복위되었고, 무덤도 왕후의 능으로 복원되었다. 원래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주한영국대사관 자리 추정)에..

흥천사 (興天寺)

흥천사 극락보전(興天寺 極樂寶殿) 흥천사는 원래 한양도성 내에 있었다고 한다. 1396년(태조 5년)에 조선 태조의 정비였던 신덕왕후 강씨가 죽자, 태조는 강씨의 능인 정릉을 도성 안에 만들고, 정릉 동쪽에 원찰을 지었으니 이 절이 흥천사이다. 이후 1398년(태조 7년) 7월에 열린 우란분재(盂蘭盆齋)에 직접 참여하기도 하고, 8월에는 직접 신덕왕후의 천도회(薦度會)를 열면서 스님들을 몸소 만나 시주하는 등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서울을 자주 오간적은 없었다. 직장생활 하면서 직장관련 행사로 2박3일 정도 북한산 아래에 간적이 있었고 해외여행 가면서 심야버스 타고 인천공항에 간적이 있었고, 친구들과 7번국도 동해안을 여행하면서 경로상 거쳐온것이 다일것이다. 이제는 자식이 직장따라 서울에서 살면서 꼬물이..

불광산 척판암 (佛光山 擲板庵)

擲 던질 척 板 널빤지 판 庵 암자 암 불광산 장안사 주차장에서 활엽수림길을 따라 20분 가량 걷다보면 천년고찰 척판암(擲板庵)을 만날 수 있다. 673년(신라 문무왕13년) 원효대사가 장안사와 함께 창건한 토굴로 원효대사의 신통력으로 중국 당나라 운제산 태화사의 붕괴를 예측하고 원효대사께서 소반을 던져 천명의 대중을 구했다는 송고승전(宋高僧傳)의 기록이 남아있다. 창건 당시에는 담운사라 불렸으나 1938년 경허스님에 의해 중수된 후 장안사의 부속 암자로 유지되어 오다가 최근 독립된 사찰로 자리하고 있다. 주요 문화재로 부산시지정 문화재자료 제41호 석조여래좌상을 보관하고 있다. 숲속에서 자라는 여러해살이풀 산골무꽃을 만났다. 햇살은 따갑고 무슨 모기가 그렇게도 많은지 집중할 수가 없어서 몇 컷으로 만족..

장안사(長安寺)

장안사(長安寺) 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장안리 591번에 있는 사찰. 불광산(659m) 자락에 있는 고찰로 범어사(梵魚寺)의 말사이다. 673년(신라 문무왕 13) 원효대사가 창건하여 쌍계사라 부르다가 809년 장안사로 고쳐 불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모두 불에 탄 것을 1631년(인조 8) 의월대사가 중창하고, 1638년(인조 16) 태의대사가 중건하였다. 1654년(효종 5) 원정·학능·충묵이 대웅전을 중건하고, 1948년에는 각현이 대웅전과 부속 건물을 중수했으며 1987년 종각을 세우고 요사를 중창하여 오늘에 이른다. 경내에 대웅전(부산기념물 37)·명부전·응진전·산신각과 석가의 진신사리 7과를 모신 3층석탑이 있다. 입구에는 5기의 부도가 있고 법당 앞에는 가지들이 엉켜 올라..

도계서원

지난 일요일 빗방울까지 떨어지면서 잔뜩 흐린 날씨에 우중충했던 가을날씨 도리마을 은행나무숲을 돌아 도잠서원까지는 약 25km의 거리 중간지점쯤 되었을까 도로옆 큼직하게세워져 있던 노계문학관 도계서원이란 입간판이 눈에들어왔다. 물론 두 서너차례 이곳을 들러본적은 있었지만 이 가을의 풍경은 어떨까 하는 호기심으로 들어갔다가 돌아나올 즈음 중년의 남녀와 관리자 한분이 굳게 잠겨있던 문을 열고 들어가 살펴보는 뒤를 따라 정면에서 도계서원 편액 사진을 담아볼 수가 있었다. 도계서원 구인당은 서원의 강당으로 노계의 작품에 '구인산'이 여러 번 등장하는 데 "서경"에서 '위산구인공휴일궤'(아홉 길 높이의 산을 만드는데 한 삼태기의 흙이 모자라도 공을 이루지 못한다)에서 언급되는 산이다. 따라서 구인은 도를 이룸에 조..

영천 영지사 (永川 靈芝寺)

영천 영지사 (永川 靈芝寺) 경상북도 영천시 대창면 용호리 구룡산(九龍山)에 있는 사찰.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인 은해사의 말사이다. 신라 태종무열왕(재위 654∼661) 때 의상(義湘)이 창건하였다. 창건 당시에는 웅정암(熊井庵)이라고 하였다. 1592년(조선 선조 25)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03년(선조 36) 지조(智照)와 원찬(元贊)이 중창하였다. 이때 절 이름을 현재의 영지사로 바꾸었다고 한다. 사찰 입구에 있는 임자갑유공비(壬子甲有功碑)에 의하면 1774년(영조 50)에 중수한 것을 알 수 있다. 1992년 비구니 중안(重岸)이 대웅전을 중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건물로는 대웅전과 명부전·범종각·산신각·요사채 2동 등이 있다. 이중 대웅전과 범종각은 1988년 9월 23일 경상북도..

관서부자 도잠서원

도잠서원(道岑書院) 조선 중기의 학자 조호익(曺好益:1545~1609)의 학덕과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 1985년 8월 5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1612년(광해군 4) 모사리에 창건하였으며, 창건 당시에는 지봉서원이라고 하였다. 1678년(숙종 4) 용호리로 이건하였는데 이때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되었다. 이후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폐되었다가 1914년 복원하였고, 1981년 보수하였다. 강당 5칸, 망회정 등 6동이 있으며, 조호익 신도비와 하마비도 있다. 신도비는 높이 2.67m, 폭 0.9m, 두께 0.21m이며, 신도비가 보관된 비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목조 건물이다. 조호익(1545~1609)은 이이(李珥:1536~84)의 문하에서 성..

문경새재 한시 감상

문경새재는 낙동강 아래의 영남지역에서 서울로 가는 길이다. 문경에서 충주로 가는 이 길을 조령(鳥嶺)이라고 불렀다. 새재는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 억새가 우거진 고개 새로 만든 고개라는 뜻이 담겨져 있단다. 영남지역에서 서울로 가는 길은 추풍령, 조령, 죽령이 있다. 특히 과거를 보러 가는 선비들은 바람처럼 떨어진다는 의미가 있는 김천의 추풍령은 피하고 죽~ 떨어진다는 의미가 될 수 있는 영주의 죽령길도 피했다고 한다. 특히 문경은 한자로 풀어보면 경사로운 소식을 듣는다는 의미가 있다. 과거를 준비하던 이들은 경사스러운 소식을 염원하면서 조령을 한양으로 가는 과거길로 선택했다. 길을 따라 가던 중 조령원터를 만났다. 역이나 원은 길 사이에 설치한 숙박기능을 하는 곳이다. 조령원은 돌성으로 외부를 방..

덕봉정사(德峰精舍)

덕봉정사(德峰精舍) 경상북도 경주시 마동(馬洞)에 있는 건물.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313호 1995년 12월 1일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313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후기의 학자 덕봉(德峰) 이진택(李鎭宅, 1738∼1805)이 말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후진을 양성하던 곳에 그의 증손인 이우영(李祐營)이 1905년(고종 42)에 세운 정사(精舍:조용히 은거하여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가르치는 곳)이다. 토함산 줄기 끝자락에 위치한 이 정사의 뒤쪽은 안온한 산자락이 감싸고 앞쪽은 들판이 펼쳐져 있다. 평면은 자연경관을 고려하여 ㄴ자 형태로 짓고, 팔작지붕을 얹었다. 이진택은 조선 정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정랑, 병조정랑을 거쳐 사헌부 장령(掌令)을 지낸 바 있다. 1793년(정조 17) 사노비를 없애는 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