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세병관 (統營洗兵館)
경상남도 통영시 문화동에 있는 건물. 2002년 10월 14일 국보로 지정되었다.
크기는 정면 9칸 112자, 측면 5칸 56자이다. 단층 팔작지붕이다.
1605년(선조 38) 충무공 이순신의 전공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웠다.
완성된 이후에는 삼도수군통제사영(三道水軍統制使營)의 건물로 사용되었다.
한국에 현존하는 목조 고건축 중에서 경복궁 경회루나 여수 진남관(鎭南館) 등과 함께 평면 면적이 큰 건물의 하나이다.
4면이 모두 개방되고 내부도 막힌 벽이 없이 기둥만 정연하게 배열되었다.
전후면에서 안쪽으로 제2주열(柱列)에 각각 고주(高柱)를 한 줄로 세워 그 위에 대량(大樑)을 걸쳤으며
이 고주와 변주(邊柱)는 퇴량(退樑)으로 서로 연결하였다. 건물 측면의 가운데 있는 기둥에서부터 대량에 걸쳐
충량(衝樑)이 배치되었다.
내부 천장은 연등천장이며 바닥에는 마루를 깔고 중앙 후면은 한 단 높은 단을 만들었다.
이 단 앞에도 기둥을 한 줄로 세워 그 위의 대량을 중간에서 받쳤다.
공포(栱包)는 기둥 위에만 배치하였으며 그 구성은 외목(外目)도리를 받친 이익공(二翼工)집의 형식과 비슷하나
쇠서의 형태는 다포(多包)집의 형식과 같다. 기둥 사이의 창방(昌枋) 위에는 화반(花盤)을 받치고 있다.
망일루(望日樓)
통영 삼도 수군통제영에 들어서자 세병관의 외삼문(밖에 있는 문)인 망일루를 만난다. 2층 누문으로 팔작지붕이다.
망일루는 세병문, 종각이라고도 불렀으며 밤 10시경 통행금지와 새벽 4시경 통금해제 때 각각 28번, 33번의 종을
쳤다고 한다.
지과문(止戈門)
통영 세병관(국보 제305호)의 내삼문(內三門)인 지과문(止戈門)은 인조 24년(1646년)에 삼도수군통제사 김응해가 세웠다.
일제 시대에 헐렸다가 1967년에 복원되었다고 한다. 지과(止戈)는 전쟁을 그친다는 뜻이다.
지과문(止戈門)에서 내려다 본 망일루(望日樓)의 뒷모습.
지과문(止戈門)에서 내려다 본 망일루(望日樓)의 좌측에는 긴급 사태 발생 시 출동하기 위해 대기하는 장소인
좌청(左廳)이 있고 그 앞쪽 건물의 뒷모습은 누각 수항루(受降樓)이다.
수항루(受降樓)
수항루는 이순신 장군이 왜적의 항복받던 것을 기리기 위하여 숙종 3년(1677) 57대 통제사 윤천뢰 장군이 통영성
남문 밖인 지금의 중앙동 우리은행 자리에 누각을 짓고, 봄가을마다 왜군의 항복 의식을 거행하며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우던 곳이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훼손되었다가 1986년 이전·복원했다.
기삽석통 (旗揷石桶)
세병관 앞뜰에 영기와 장군기를 세우기 위해 깃대를 고정하는 커다란 두 개의 돌기둥으로 정조 10년(1786년)
제142대 류진항(柳鎭恒) 통제사가 세웠다. 원래는 세병관 뜰앞 좌우 양편으로 2기가 있었으나 현재 세병관 앞뜰
담장 부근에 서쪽 1기만 남아있다.
건물 내부의 중앙에는 약 45cm 높이의 단이 만들어져 있는데, 이는 객사답게 수령을 비롯한 관원들이 초하루와
보름 그리고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 대궐을 바라보며 절하는 향망궐배(向望闕拜)를 행하기 위해 마련해 놓은 것으로
여기에는 임금의 궐패(闕牌)가 모셔져 있었다고 한다.
석인 (石人)
숙종 27년 (1701년) 제77대 류성추(柳星樞) 통제사 때 세병관 뜰에 액막이로 만든 석인으로 추측되며,
세병관 앞 장대석 석축 해체 과정에서 석인 5기가 발굴되어 현재의 위치에 설치하였다.
통제사비군 (統制使碑群)
통제사비군은 역대 통제사들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이 시내 일원에 흩어져 있던 것을 현 위치에 모아서
동향(東向)으로 58기를 4줄로 나란히 세워 놓은 것을 말한다. 이 통제사비군은 통제사가 부임하여 임기를 마치고
퇴임한 후에 이 지방 군(軍), 관(官), 민(民)이 세운 일종의 송덕비인데, 표제(表題)도 송덕비(頌德碑) 추사비(追思碑)
거사비(去思碑) 사적비(事蹟碑) 불망비(不忘碑) 타루비(墮淚碑) 유애비(遺愛碑 ) 선정비(善政碑) 등으로 다양하다.
촬영일 : 2024년 07월 27일 토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