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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서원 ( 陶山書院)

도랑도랑 2024. 4. 22. 22:23

鄒魯之鄕 (추로지향)

 

書院(서원) 입구에 ‘鄒魯之鄕’(추로지향)이라는 篆書體(전서체)의 비가 서있다.
李滉(이황)은 本來(본래) 도산 남쪽에 書堂(서당)을 짖고 後學(후학)을 가르쳤으나 
그곳이 마음에 들지 않아 61세 되던 1561년에 現在(현재)의 位置(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孔子의 77대 宗孫(종손)인 孔德成(공덕성) 博士(박사)가 서원에 謁廟(알묘)한 후 쓴 

親筆(친필)을 새긴 記念碑(기념비)라고 한다.

 

 

 

 

시사단 (試士壇)

도산서원 천광운영대에 서서 강 건너를 보면 운치 있게 솟아있는 소나무숲과 비각이 보인다. 
조선시대 영남지방의 과거시험 장소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경북 유형문화재 시사단이다.

1973년 8월 31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안동시에서 관리하며 조선 정조 때 지방별과(地方別科)를 보았던 자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1792년(정조 16) 왕은 퇴계 이황(李滉)의 학덕을 추모하여 규장각 각신 이만수(李晩秀)를 도산서원에 보내 

제사를 지내게 했다. 
또한 그곳 송림에서 과거를 치러 영남 인재를 선발하게 했는데, 이때 응시자가 7천 명에 이르렀다. 
이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1796년 여기에 단을 모으고 비와 비각을 세웠다. 
비문은 당시 영의정 번암 채제공(蔡濟恭)이 썼는데, 1824년(순조 24) 비각을 개축하면서 비석을 새로 새겼다.

비각은 원래 도산서원과 마주보는 강변 송림 안에 세워져 있었는데 1974년 안동댐 건설로 인한 수몰로 송림은 없어지고, 
단을 지상 10m 높이로 쌓아 옛 건물과 비를 그대로 옮겼다. 비각은 4면 1칸인 팔작지붕 목조집이며 중방 밑에 판벽이 

둘러쳐져 있고, 추녀 네 곳에 모두 활주를 받쳐 안정감을 주었다. 비각 안에 화강석으로 된 비석이 있다.

 

 

도산서원 양편 산기슭에는 절벽이 있는데, 퇴계선생이 자연의 이치를 깨닫고 몸과 마음을 수양하기 위해 산책하던 곳이다. 
퇴계선생은 서쪽 절벽을 천광운영대, 동쪽 절벽을 천연대(天淵臺)라고 불렀다.

천광운영대는 주자(朱子)가 지은 ‘관서유감(觀書有感)’이란 시 중 
‘하늘 빛과 구름 그림자가 함께 감도는구나[天光雲影共排徊]’라는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천연대는 『시경(詩經)_大雅_文王_旱麓』 중 
“솔개는 하늘 높이 날아오르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뛰노네[鳶飛戾天 漁躍于淵]”라는 구절에서 하늘(天)과 연못(淵)을 

따서 지었다. 두 이름이 모두 주변의 절경을 나타내고, 퇴계선생 말년에 이곳에서 자연의 이치를 벗 삼아 학문을 

성취하려던 뜻을 담고 있다.

 

 

 

도산서원은 1574년(선조7) 퇴계 이황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제자들에 의해 세워졌다. 
1575년(선조 8)에 한석봉이 쓴 ‘도산서원’의 편액을 하사받음으로써 사액서원으로서 영남유학의 중심이 됐다.

 

 

 

도산서원 ( 陶山書院)

1969년 5월 31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동서재(東西齋)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맞배집, 안동 도산서원 전교당 

정면 4칸, 측면 2칸의 홑처마 굴도리집, 상덕사(尙德祠)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기와집이다. 원래는 이황이 

도산서당을 짓고 유생을 가르치며 학덕을 쌓던 곳으로, 1575년(선조 8) 한호(韓濩)의 글씨로 된 사액(賜額)을 

받음으로써 영남(嶺南) 유학의 연총(淵叢)이 되었다.

이 서원의 건축은 모두 무사석계층(武砂石階層)이며 방주(方柱)의 사용이나 초공(草工)을 끼운 대들보의 간략한 

가구(架構) 등 전체적으로 간소하다. 서원 안에는 약 400종에 달하는 4,000권이 넘는 장서와 장판(藏板) 및 

이황의 유품이 남아 있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 철폐 때에는 소수서원(紹修書院)·숭양서원(崧陽書院) 등과 

더불어 정리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1969년 문화체육부에서 해체 복원하여 면목이 일신되었다.

2019년 7월 전국 8개 서원과 함께 ‘한국의 서원’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진도문 (進道門)

도산서당의 위쪽으로 서원을 건립하면서 도산 서당과 농운 정사의 사이에 진입로가 만들어졌다. 
진도문은 이 진입 공간을 따라 서원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아래쪽의 서당 영역과 서원 영역을 구분하고 있다. 
외부와 경계를 짓는 문으로 편액을 걸어 상징적인 예교(禮敎)의 의미를 갖게 하였다.

 

 

 

서광명실 (西光明室)

1930년(庚午年)에 동광명실을 본 따 지었으며 이 역시 2층 구조의 누각 건물로 서원의 전망대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문도를 비롯한 국내 유학자의 문집 등 근래에 발간된 각종 책들이 있다. 
이곳에는 일본 유학자인 손시교쿠수이[村士玉水]가 편찬한 '퇴계서초(退溪書抄)'가 있어 퇴계학이 일본 유학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광명실과 함께 모두 1,271종 4,917권이 보관되어 있었으며, 전국 서원 가운데에서 장서로는 고서와 진본이 유명하다. 
보관된 각 종 문적은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에 위탁 관리되고 있다.

 

 

 

동광명실 (東光明室)

광명실은 서책을 보관하고 열람할 수 있는 오늘날의 도서관(藏書庫)인데 현판은 퇴계선생 친필이다. 

진도문을 가운데 두고 동·서 두 곳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습해(濕害)를 방지하기 위해 누각식(樓閣式)으로 지었다. 

1819년(순조19)에 세워진 동광명실에는 역대 왕의 내사서적(內賜書籍)과 퇴계 선생이 친히 보시던 수택본(手澤本)을 

보관하였다. 원래는 동광명실만 있었으며 서광명실은 근대 들어 증건(增建)하였다.
* 광명(光明)은 ‘만권서적(萬卷書籍) 혜아광명(惠我光明)', 즉 '수많은 책이 나에게 광명을 준다' 의미

 

 

 

전교당 (典敎堂)

서원의 강학 건물로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건물이며 원장실과 강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단부를 높여 위엄을 살렸고 양쪽에 계단을 설치하였다. 성리학자들이 기피하는 짝수 칸의 구성이 특이하며, 

서쪽 1칸만 온돌방이어서 비대칭을 이루고 있다. 온돌방은 원장의 거실로 명칭은 한존재(閑存齋)이다. 

대청 전면 3칸은 문짝을 달지 않고 개방하였으나, 측면과 뒷면에는 각 칸마다 2짝의 여닫이 창호를 달았다.
현재 모습은 1574년 처음 지은 것을 1969년 보수한 것이다. 

전교당 정면의 현판은 조선 중기의 명필 한석봉(韓石峰)의 글씨로 1575년 선조로부터 사액(賜額)받은 것이다. 
강당 벽면에는 원규(院規), 백록동규(白鹿洞規), 정조의 사제문(賜祭文), 국기안(國忌案), 사물잠(四勿箴),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 등의 현판이 걸려있다. 보물 제 210호로 지정되었다.

 

 

 

 

 

 

 

 

 

영호루(映湖樓)

오래전부터 안동의 영호루는 경남 밀양의 영남루(嶺南樓), 진주의 촉석루(矗石樓), 전북 남원의 광한루(廣寒樓)와 함께 

한강 이남의 대표적인 누각으로 불려 왔다. 창건에 관한 문헌이 없어, 언제 누구에 의하여 건립되었는지 잘 알 수는 없으나 천여 년 동안 그 이름이 전통의 웅부안동(雄府安東)과 함께 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의 영호루는 철근 콘크리트로 된 한식 누각이다.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의 팔작지붕집으로, 북쪽 면에는 

공민왕의 친필 현판을 걸고, 남쪽 면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인 ‘영호루’를 걸었다. 내부에는 갑술년 홍수 때 

유실되었다가 회수한 현액들과 새로 복원한 현액들을 게판하였다. 현재 게판 되어 있는 시판은 12점이고, 제영 1점과 

현판 2점이 있다.

 

 

洛東上流 (낙동상류)

 

 

嶺左名樓 (영좌명루)

 

낙동상류영좌명루 : 낙동강 상류에 있는 영남좌도의 이름난 누각

 

 

 

 

촬영일 : 2024년 04월 21일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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