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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기행(南道紀行) (3) 다산초당

도랑도랑 2012. 7. 6. 13:02

강진 정약용 유적(康津 丁若鏞 遺蹟)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 유배생활을 하면서 실학을 집성(集成)한 유적지.


다산이 강진에 유배온 때는 1801(순조1년)년 겨울이며 그가 40세 되던 해이며 처음 4년간은 강진읍 동문밖의 주막집이었다.

다산이 강진으로 유배를 오자 강진 사람들은 모두 그를 죄인 취급하여 멀리하였다고 전한다.

다산은 그 주막집 한칸짜리 방을 사의재(四宜齋)라고 이름 지어 자신을 추스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생각은 마땅히 맑게하되 맑지 못하면 곧바로 맑게 해야하며

용모는 마땅히 엄숙하게 하되 엄숙하지 못하면 곧바로 엄숙해야 한다.

말은 마땅히 과묵해야 하며 말이 많으면 곧바로 과묵해야 한다.

행동은 마땅히 중후게 하며 중후하지 않으면 중후하게 하라.

- 정약용《사의재기(四宜齋記)》 중에서

 

 

 

다산은 백련사에 들렀다가 해남 대흥사의 혜장선사(惠藏禪師)를 만나게 되는데 그의 도움으로 1805년 강진읍 뒷산에 있는

보은산방(고성사 高聲寺 내 칠성각)로 거쳐를 옮기게 되며 그곳에서 9개월을 머물게 된다.

혜장선사와 다산의 교우를 통해 다산은 다도(茶道)의 경지를 익히게 되었고 이후 유배생활을 감내하는 동반자가 되었다.

다산에게서 학문적 가르침을 받았던 혜장선사는 다산보다 10살이 어렸지만 39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1811년).

 

우두봉 아래 작은 선방에는

대나무만 쓸쓸하게 낮은 담 위로 솟았구나

해풍에 밀리는 조수는 산밑 절벽에 부딪히고

읍내의 연기는 겹겹 산줄기에 깔려있네

둥그런 나물 바구니 죽 끓이는 중 곁에 있고

볼품없는 책상자는 나그네의 여장이라

어느 곳 청산인들 살면 못 살리

한림원 벼슬하던 꿈 이제는 아득해라

- 정약용 《제보은산방(題寶恩山房)》 전문

 

 

1806년 다산은 고성암(당시에는 작은 암자였다.)을 나와 그의 제자인 학래 이청(鶴來 李晴)의 집에 기거하였다가 1808년에

도암에 있는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가 도암에 있는 초당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 것은 외가였던 해남 윤씨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산에 있는 초당은 귤동(橘洞) 마을 윤단과 그의 아들 윤규로(尹奎魯), 윤규하, 윤규의 산정이었다.

윤단은 그의 손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정약용을 초빙한 것이었다.

이들은 모두 정약용의 제자가 되었고 그들의 도움으로 유배생활은 다소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또한 부호였던 윤광택(尹光宅)은 정약용 부친과 절친한 사이였으며 그의 아들 윤서유는 죽마고우였다.

이들의 배려로 유배생활의 어려움은 해소되었고 유배중 윤서유의 아들 윤창모와 정약용의 외동딸이 혼인하여 사돈지간이 된다. 

유적의 중심이 되는 다산(茶山)은 초당이 있는 뒷산을 지칭하며 차나무가 많이 자생하였다.

다산초당(茶山草堂)은 원래 작은 초가집이었고 세월이 지나면서 허물어진 것을 1958년 해남윤씨 후손들이

다산유적보존회를 조직하여 기왓집으로 새롭게 지었다.

특히 해남 윤씨 행당파인 윤재은 씨의 노력이 컸다고 전한다.

다산초당이 있던 곳에 세워진 기왓집은 5칸 도리단층으로 지어져 있다.

2칸은 뒤가 거실이며, 앞이 마루로 된 소박한 남향집인데, 처마밑에는 원판이 없어져

뒤에 완당(阮堂)의 글씨를 집자(集字)한<茶山草堂>이라는 현판이 달려 있다.

만덕산(萬德山)에 자리잡고 강진만을 한눈으로 굽어보는 이곳에서 적거(謫居)하는 동안에

실학을 집성함으로써 빛을 더하게 되었다.

또, 정석(丁石) ·다조(茶竈) ·약천(藥泉) ·연지(蓮池) 등 이른바 <다산사경(茶山四景)>이 있는데,

정석은 다산이 석벽에 친히 글씨를 새긴 것이고, 다조는 뒷담 밑 약천의 석간수(石澗水)를 손수 떠다가

앞뜰에서 차를 달이던 청석(靑石)이며, 연지는 초당 동쪽 앞에 수양을 늘어뜨린 아담한 못으로,

그 안에 몇 개의 괴석을 쌓아 석가산(石假山)을 쌓았다.

1801년(순조 1년)의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유배된 다산은 강진에서의 유배생활 18년 가운데 11년간을

이곳에서 살면서 현재의 《정다산전서》와 동 <보유>에 보이는 방대한 실학체계의 대부분을 구상하고 집필하였다.

사적 제10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전남 강진군(康津郡) 도암면(道岩面) 만덕리(萬德里) 소재한다.

 

                                                                   [출처] 강진 정약용 유적 [康津 丁若鏞 遺蹟 ] | 네이버 백과사전

 

 

2012년 6월 29일 남도기행 3일째 영랑생가를 다녀나와서 12:50분경 다산초당을 가기위하여 마을 끝자락 오르막길 옆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난 참 어리섞은 구석도 심심찮게 드러난다.
초당(草堂)이란 집의 본채에서 따로 떨어진 곳에 억새나 짚 등으로 지붕을 이어 만든 작은 집이라는 것은 짐작하면서도

다산(茶山)은 정약용의 호 라는것만 알았지 초당이 산속에 있다는건 왜 몰랐을꼬 ~
잠시 비는 그치고 행여 비라도 만날까봐 우산은 챙겨들고 구둣발로 안내판 따라 산길을 올랐다.

잠시 후 눈앞에 펼쳐지던 그 풍경들 그 분이 이길을 걸었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분의 자취따라 오고 갔길래

길위에 드러난 나무 뿌리는 빗물에 씻긴채 반질 반질 광채가 흐르고 있었다.

 

 

 

 

 

 


뿌리의 길 / 정호승

 

다산초당으로 올라가는 산 길 

지상에 드러낸 소나무의 뿌리를 

무심코 힘껏 밟고 가다가 알았다 

지하에 있는 뿌리가 

더러는 슬픔 가운데 눈물을 달고 

지상으로 힘껏 뿌리를 뻗는다는 것을

지상의 바람과 햇볕이 간혹 

어머니처럼 다정하게 치맛자락을 거머쥐고 

뿌리의 눈물을 훔쳐준다는 것을 

나뭇잎이 떨어져 뿌리로 가서 

다시 잎으로 되돌아오는 동안 

다산이 초당에 홀로 앉아 

모든 길의 뿌리가 된다는 것을 

어린 아들과 다산초당으로 가는 산길을 오르며 

나도 눈물을 닦고 

지상의 뿌리가 되어 눕는다

산을 움켜쥐고 

지상의 뿌리가 가야 할 

길이 되어 눕는다

 

 

약천(藥泉)

가뭄에도 좀처럼 마르지 않는 이 샘은 다산초당의 제2경이다.
처음에는 물이 촉촉히 젖어있던 것을 다산이 직접 파니 돌 틈에서 맑은물이 솟아 나왔다고 한다.
다산은 약천의 물을 마시면 "담을 삭이고 묵은병을 낫게 한다." 기록 하였다.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

연못 가운데 돌을 쌓아 만든 산이다.
다산은 원래있던 연못을 크게 넓히고 바닷가의 돌을 주워 조그마한 봉을 쌓아
석가산이라 하였다.
연못에는 잉어도 키웠는데 유배생활에서 풀려난 후 제자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이어의
안부를 물을 만큼 귀히 여겼다고 한다.
다산은 잉어를 보고 날씨를 알아 내었다고도 한다.

 

 

 

정석(丁石)

유배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기 직전 다산이 직접 새겼다고 전해지는 정석은 다산초당의 제1경이다.
아무런 소식도 없이 자신의 성인 정丁 자만 따서 새겨넣은 것으로 다산의 군더더기 없는 성품을 그대로 보여준다.

 

 

 

 

 

 

다산동암(茶山東庵)

송풍루(松風樓)라고도 불리는 동암은 다산이 저술에 필요한 2천여권의 책을 갗추고 기거하며
손님을 맞았던 곳이다.
다산은 초당에 있는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이곳에 머물며 집필에 몰두 했으며, 목민관이 지녀야 할
정신과 실천 방법을 적은 (목민심서)도 이곳에서 완성했다.
1976년 서암과 함께 다시 세웠는데 현판 중 보정산방 寶丁山房은 추사의 친필을 모각한 것이고
다산동암 茶山東庵은 다산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다.

 

 

천일각과 백년사 가는길
천일각이라는 이름은 '하늘끝 한모퉁이'라는 뜻의 천애일각(天涯一閣)을 줄인 것이다.
다산의 유배시절에는 없던 건물인데, 돌아가신 정조대왕과 흑산도에서 유배중인 형님 정약전이
그리울 때면 이 언덕 서서 강진만을 바라보며 스산한 마음을 달랬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1975년 강진군에서 새로 세웠다.
동암에서 천일각에 이르기 전 왼편으로 나 있는 길은 백련사로 가는 길이다.
유배생활 동안 벗이자 스승이요 제자였던 혜장선사와 다산을 이어주는 통로였다.
800여 미터 길에는 야생차 군락과 천년기념물로 지정된 동백 숲을 만날수 있다. 

 

 

 

 

 

난 이길을 오르면서 입간판에 쓰여진 설명문도 읽었고 사진으로도 담았다.
천일각에서 백련사는 그리 멀지 않은곳에 잇었던것 같았지만 짜여진 일정과 시간을 맞추기 위하여 갔던길 돌아 내려 오던길

작은 설명판을 다시 읽어 보면서 길옆에 있던 1기의 무덤을 동네 딋산에 으레히 있을듯한 무덤으로 지나쳐 보았던것을

아무레도 연관이 잇을것만 같은 생각으로 사진으로 담았는데 역시나 일반인의 무덤은 아니었던 것이다.

 


다산초당은 해남윤씨 집안의귤림처사 윤단의 산정이었다.

정약용이 9살되던해 세상을 떠난 그의어머니는 조선시대3재의 한 분으로 꼽히던 공재의 손녀이고

윤두서는 다시 고산 윤선도의 증손이니 해남윤씨들은 다산에게 외가쪽으로 먼 일가뻘이 되었다.

귀향살이가 여러해 지나면서 삼엄했던 관의눈길이 누그러지자 다산의 주위에는 제자들이 모여들었는데

그 가운데 윤단의 아들인 윤문거 세형제가 있어서 정약용을 다산초당으로 초빙했던것이다.

초당으로 오르는 길은 대나무와 소나무가 빽빽해서 대낮에도 그늘이 짙다.

한참 오르다보면 길가에 무덤이 한기 보인다.

이는 윤단의 손자이며 다산의 제자였던 윤종진의 무덤이다.

                                                                                

                                                                                                                                                     촬영일: 2012년 6월 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