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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탄 계곡(白石灘 溪谷)

도랑도랑 2020. 10. 19. 19:42

 

백석탄 계곡(白石灘 溪谷)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고와리에 있는 백석탄(白石灘) 계곡(溪谷).


방호정(경북민속자료 51)이 있는 신성계곡 북서쪽에 있다.
계곡의 암반이 온통 눈으로 덮인 듯이 하얗고 그 위를 맑은 물이 흐른다.
신성계곡에서 이곳에 이르는 3㎞ 구간이 청송8경 가운데 제1경으로 지정되었다.
옛 선현들이 고기를 낚았던 조어대(釣魚臺)와 고기를 낚다 보면
저절로 시상(詩想)이 떠올랐다는 가사연(歌詞淵)이라는 소(沼)가 유명하다.


조선 인조 때 김한룡(金漢龍)이 고와마을을 개척하고는 시냇물이 맑고 아름다워서 고계(高溪)라 불렀다고 하며,
1593년(선조 26)에는 고두곡(高斗谷)이란 장수가 임진왜란 때 왜군에게 부하를 잃고 이곳을 지나다가
아름다운 경치에 마음의 상처를 달랜 뒤 고와동이라 이름을 고쳐 불렀다고 한다.

 

 

 

고와리(高臥里)

고와리는 안덕면의 북서단(北西端)에 위치하고 있으며, 행정리는 고와리 하나로 구성되어 있다.
자연마을로는 고와마을, 활이마을, 제당마을, 구두뭇골마을 등이 있다.


임진왜란 때 한 장수가 이곳을 지나가다가 자연경관이 너무 아름다워서 한동안 머물면서 마음의 상처를 달랬다 하여
휴식 한다는 의미의 와(臥) 자를 사용하여 고와(高臥)라 불렀다고 한다. 또 다른 유래에 의하면 마을 시냇물이 맑고
산세가 아름다워 고계(高溪)로도 불렀다고 전해진다.

 

 

 

형성 및 변천

 

본래 청송군 현북면의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현북면 고와동과 안동군 길안면 대사동 일부를

병합하여 안덕면에 편입되었다. 1988년에 군조례에 의해 고와동이 고와리로 개칭되었다.


고와리(高臥里)는 대부분이 산지로 구성되어 있다. 북동쪽에는 노래산(老萊山)[794.1m)이 솟아 있으며,
남서쪽에서는 연점산(鉛店山)[870.6m] 줄기가 안덕면 신성리에서 북으로 뻗어내려 고와리 남부 산지를 형성하고 있다.
고와리 남부는 길안천(吉安川)이 굽이쳐 흘러 백석탄(白石灘) 같은 절경을 연출하고 있다.

 

 

 

행정리는 고와리(高臥里) 한 개로 이루어져 있다.

2016년 12월 말 면적은 11.7㎢이며, 총 51가구에 85명[남자 46명, 여자 39명, 외국인 제외]의 주민이 살고 있다.
고와리는 안덕면에서 인구수가 적은 마을이다. 고와리의 동쪽은 안덕면 노래리, 서쪽은 안동시 길안면, 남쪽은 안덕면

지소리, 북쪽은 파천면 신흥리·지경리와 접하고 있다.

 

 

 

대부분 산지로 구성된 고와리의 취락은 길안천 변 고와마을에 집중되어 있다.
고와마을 앞으로 지방도930호선이 통과하며, 신성계곡의 백미로 꼽히는 백석탄 계곡이 펼쳐진다.
백석탄은 하얀 돌이 반짝거리는 개울이라는 뜻으로, 백석탄 포트홀(돌개구멍)은 청송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의

지질명소 중 지형명소에 속한다.
길안천을 건너 고와마을을 마주보는 산기슭에는 활이마을이 있다.
고와리의 남부는 길안천을 따라 지방도930호선이 통과하여 동쪽으로는 안덕면 지소리, 서쪽은 안동시 길안면으로

연결된다.

 

 

 

 

 

 

 

 

 

 

 

 

 

백석탄(白石灘)의 보물찾기

 

백석탄에 숨겨진 보물찾기를 하려면 미끄러운 바위를 건너뛰기에는 너무 위험한 놀이 이기도하다.

신발을 벗어놓고 살며시 발을담구어 얕은곳을 찾아 건너다니면서 긴 세월과 함께 물줄기에 씻겨 닳아 없어진

희미하게 일부분 남아있는 글씨를 찾아보자. 유현(儒賢)들의 풍류와 낭만의 흔적들이 음각되어 전해지고 있다.


이름 하여 세속에 오염된 마음을 씻었다는 세심대(洗心臺), 갓끈을 씻었다는 탁영대(濯纓臺),

낚시를 즐겼다는 조어대(釣魚臺), 깊고 푸른 물을 바라보며 노래한 가사연(歌詞淵), 연회를 열었다는 주연소(酒宴沼),

산허리에 보랏빛 안개구름이 머무는 산을 자하산(紫霞山), 황새가 머물던 절벽을 학소대(鶴巢臺)로 불렀다고도 한다.

 

 

 

청송군 안덕면 고와리 백석탄의 부백 윤현기 각석 (府伯 尹顯岐 刻石)

부백(府伯)

府 마을 부
伯 맏 백

부사(府使)를 달리 이르는 말.
고려(高麗) 때, 개성부(開城府)의 수령(守令) 및 각 도에 있는 지사.
조선(朝鮮) 시대(時代)에, 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와 도호부사(都護府使)

 

대도호부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지방행정 관청으로, 1018년(현종 9) 최초로 안남(지금의 전주)·

안서(지금의 해주)·안북(지금의 안주)·안동(지금의 경주)에 4대도호부가 설치되었다.

 

 

 

길안천에 형성된 백석탄(白石灘) 내부로 주변에 세심대(洗心臺). 濯纓臺 刻石이 있다.
글자는 중앙부로 흐르는 강물 서쪽에 마치 서있는 듯한 바위에 새겨져 있는데 세심대 각석 (洗心臺 刻石)과

마주보고 있으며, 글씨의 내용은 부백 윤현기(府伯 尹顯岐)이고 글자의 크기는 13~15cm 정도이다.

 

글자의 구성은 세로방향 두 줄로 되어 있는데 오른쪽이 부백 왼쪽이 윤현기이다. 그러나 '顯' 자와 '岐' 자는

마모가 심해 판독하기가 어려운 상태이나 윤현기(尹顯岐)는 청송부사(靑松府使)를 지냈다.

 

고와리 세심대 석각 (高臥里 洗心臺 刻石)은 고와리 원고와 마을에서 남쪽으로 약 35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이곳은 길안천에 형성된 백석탄(白石灘) 내부로 주변에 부백 윤현기 (府伯 尹顯岐. 濯纓臺 刻石이 있다.
글자는 중앙부로 흐르는 강물 동쪽에 마치 누워있는 듯한 바위 돌출부에 새겨져 있는데 府伯 尹顯岐 刻石과는

약 10m 정도의 사이를 두고 마주 본다. 글자의 내용은 세심대(洗心臺)이고 세로방향 1줄로 새겼는데 한 글자의 크기는 13~15cm 내외이며, 전체 크기는 길이 47cm, 폭 16cm 정도이다.

 

 

 

 

 

 

 

 

 

 

 

 

 

 

고와실전투(高臥室戰鬪)

 

고와실전투(高臥室戰鬪)는 1910년 경상북도 경주·영천·의흥·청송 지역의 일본군 수비대로 편성된 합동 토벌대를 맞이한 산남의진(山南義陣)의 청송동부진 서종락부대가 청송군 안덕면 고와리에서 치른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청송동부진

서종락부대는 큰 피해를 입고 해산되었다.


1908년 4월 26일 청송군 현서면 복기동전투(復基洞戰鬪) 이후 청송 지역에는 소수의 의병부대가 활동하였다.
1908년 8월 산남의진의 제3대 대장 최세윤(崔世允)이 경상북도 장기군 내남면 용동(龍洞)에서 피체(被逮)되자,

산남의진(山南義陣)은 그 구심력을 잃고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청송 지역은 청송동부진 서종락부대와

청송서부진 남석구부대 등의 의병부대가 유격전을 통한 항전을 계속하고 있었다.

 

 

 

1908년 4월 이후 서종락과 남석구가 이끄는 산남의진의 지역부대인 청송동부진과 청송서부진은 유격전을 통한 대일

항전을 계속하고 있었다. 1910년 서종락이 이끄는 의병들은 일본군 수비대의 공격을 받으면서 청송군 안덕면 고와리에 숨어들었다. 곧이어 경상북도 경주·영천·의흥·청송 지역을 관할하던 일본군 수비대도 고와리로 의병이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주위를 포위하였다. 일본군 합동 토벌대는 고와리를 포위하고 사격을 가했다. 포위 공격을 받게 된 의병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하였고, 미처 피하지 못한 의병들은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1910년 청송군 부남면 출신의 배연집(裵淵楫)은 청송 동부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서종락과 함께 경주·영천·의흥·

청송 지역을 관할하는 일본군 수비대의 추격을 피해 청송군 안덕면 고와리로 들어갔다. 대장 서종락을 비롯한 청송

동부진 서종락부대는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사방으로 흩어져 도주하였으나, 미처 피하지 못한 의병들은 고와실 앞으로 흐르는 길안천(吉安川) 백석탄(白石灘)에서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고와실전투(高臥室戰鬪)를 끝으로 산남의진의 지역부대인 청송동부진 서종락부대와 청송서부진 남석구부대는 해산하였다. 배연집(裵淵楫)은 일본군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였다.
배연집은 탈출하는 과정에서 고와실마을로 잠입하여 김씨가(金氏家)의 풍산유씨(豐山柳氏) 부인이 목화를 따서 실을

잦고 있는 방으로 뛰어들었고, 풍산유씨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했다. 그리고 서종락 의병장은 고와리 앞을 흐르는 백석탄을 따라 물밑으로 30여 리를 도망하여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체포된 의병들은 두 손이 묶인 채 백석탄에서 총살되었다.

 

 

 

1910년 고와실전투를 끝으로 산남의진의 지역부대인 청송동부진 서종락부대와 청송서부진 남석구부대는 해산하였다.
청송 출신의 의병들은 체포되거나 귀순하였으며,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 은거하거나 중국 만주(滿洲) 등

해외로 망명하였다. 산남의진에 참여했던 청송 출신의 김성극(金聖極), 이규환(李圭桓), 홍구섭(洪龜燮), 남정철(南井喆), 남규철(南圭喆), 김남준(金南俊), 김진영(金震榮) 등이 망명하였다.


1910년 고와실전투는 산남의진의 지역부대 청송동부진 서종락부대가 일본군의 포위 공격을 받고 크게 패한 전투이다.
청송 지역 일원에서 불굴의 항전을 벌이던 의병들은 일본군의 포위 공격으로 많은 사상자를 낸 채 해산하였다.

 

 

 

 

 

 

촬영일 : 2020년 10월 18일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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