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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산서원 독락당

도랑도랑 2019. 11. 16. 05:59

 

 

독락당

회재는 장년 시절 중앙 정계에서 밀려나 이곳 자옥산 골짜기에서 햇수로 7년을 은거한 적이 있다.

그때 그가 살던 집의 사랑채가 독락당(獨樂堂)이다. 여기에 안마당이 넓고 안대청의 높이도 낮아서 평지에 잘 맞는 구조를 지닌 ㅁ자형의 안채,

청지기와 침모 등 측근 노비들이 거처하던 행랑채인 숨방채, 솔거노비들이 거주하며 주인을 뒷바라지하던 공수간, 임금에게 하사받은 글과 서책들을

보관하던 어서각과 사당, 그리고 정자가 들어선 별당 등이 합쳐져 큰 살림집을 이룬다. 이 가운데 독락당과 계정이 다른 곳들에 비해 훨씬 의미 있는

건축공간일 뿐만 아니라 그밖의 건물에는 지금도 사람들이 살고 있어 출입이 어려우니 우리는 이 두 건물만을 살펴본다.

 

독락당은 회재가 낙향한 이듬해인 1532년에 지어진 건물로 보통 집의 사랑채와는 많이 다른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집이 들어선 대지 자체가 평지여서 낮은데다가 집의 규모에 비해 기단이 아주 낮고 마루도 낮으며 집의 높이나 지붕도 낮아 매우 수평적인 비례를 보이며

땅을 향해 낮게 깔리는 인상을 준다. 대체로 사대붓집의 사랑채라면 높고 화려하게 꾸며져 집주인의 위엄을 한껏 과시하게 마련인데, 독락당은 그와는

대조적으로 자신을 낮게 감추고 있다.

 


 

 

 

독락당

회재 이언적이 중앙 정계에서 밀려나 은거하던 시절 지은 사랑채 건물이다.

여느 사대붓집의 사랑채와는 달리 수평적인 비례를 보이며 땅을 향해 낮게 깔린 듯한 인상을 준다.


우리의 고전 건축에서 정면 칸살은 대개 3칸·5칸·7칸 하는 식으로 홀수를 택한다. 그러나 독락당은 정면 칸살이 4칸으로 일반적인 양식을 벗어나 있다.

지붕의 형태 또한 남다르다. 개울을 향한 동쪽은 합각이 있는 팔작지붕이지만 안채와 맞붙은 서쪽은 맞배지붕으로 양쪽이 대칭을 이루지 않는다.

물론 이는 안채와 연결된 구조에서 오는 자연스런 선택이기도 했겠으나 아무튼 보편적인 형태는 아니다.

 

 

 

 

 

독락당은 보물 제413호로 지정되어 있다. 살림집으로서는 드문 예에 속하는데 몇 가지 구조적 특징 때문인 듯하다.
기둥 위의 공포 짜임이 아주 간결하여 주두 하나를 얹고 위를 향해 뻗은 쇠서를 내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초익공형식이다. 대청 안에서 측면 천장을 올려다보면 천장의 가구가 환히 드러난다.
종보 위에서 끝부분을 사다리꼴로 다듬은 동자기둥이 종도리를 받치고 있고, 종보와 종도리를 잇는 직선재의 소슬합장이 삼각형을 이루고 있다.
이와 같은 초익공형식이나 솟을합장을 가진 구조 등은 조선 전기의 양식을 반영하는 것이다.

 

 

 

독락당을 오른쪽으로 돌아나가면 담으로 막힌 뒤뜰이 나오고, 그 담에 난 일각문을 밀고 들어가면 독락당의 별당, 계정(溪亭)이 있다.
원래 여기에는 회재의 아버지가 쓰던 3칸짜리 초옥이 있었으나 회재가 은거하면서 그것을 기와집으로 바꾸고 옆으로 2칸을 달아 내어

지금처럼 만든 것이다.

 

 

 

계정은 계곡이 있는 바깥쪽을 향해 매우 개방적이다. 흐르는 물과 푸른 숲 등 계곡의 자연을 누릴 수 있다.

아마도 회재는 독락당 마루방에 단정히 앉아 책을 읽다 지치면 창문을 열어 넘어들어오는 약쑥냄새에 마음을 적시고,

살창 아래로 흐르는 시냇물을 바라보며 눈의 피로를 씻었으리라. 드문 일이었겠지만 조촐한 주안상을 마주하여 찾아온 손님과

계정 마루에 앉기도 하였으리라. “가을물 속에 노니는 물고기를 본다”(秋水觀魚)고 했던가, 장마 지난 가을날에는

담장에 붙은 작은 문을 밀고 나와 관어대에 앉아 자유롭게 헤엄치는 물고기들을 하염없이 바라보기도 했으리라.

가끔은 정혜사로 걸어가 한 잔 차를 얻어 마시고 자옥산으로, 화개산으로 산행을 하기도 했으리라. 독락당과 계정을 둘러보고 나면

회재의 이런 일상이 잡힐 듯 그려진다.

 

 

 

 

독락당과 계곡 사이에 담장이 둘러져 있으나 담장의 한 부분을 뚫고 살창을 설치해 독락당 대청에 앉아서 계곡 풍경을 볼 수 있도록 했다.

 

 

 

양진암 편액

퇴계의 글씨로 계정의 한쪽 작은 방 위에 걸려 있다. 양진암은 회재가 친교 깊던 정혜사의 승려를 위해 만든 공간이다.

 

 

 

 

계정

독락당의 별당이다. 바깥 개울 건너에서 바라보는 모습이 아름답다.


정자의 아름다움이나 멋은 그 건물 자체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정자 안에 앉아서 그림처럼 다가오는 주위의 풍광을 음미해보아야 그 멋을 알 수 있고, 적당히 떨어진 어느 시점에서

주변의 경관과 얼마나 긴밀히 호흡하고 있는지를 감지할 수 있어야 비로소 정자의 아름다움은 온전해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계정은 계류를 따라 발달한 영남지방 정자문화의 한 전범이라 하겠다.

 

 

 

계정은 원래 회재의 아버지가 쓰던 초옥이었으나 회재가 칸을 늘리고 기와를 올려 지금처럼 만들었다.

바깥 개울 건너에서 바라보는 모습과 달리 소박한 작은 집이다.

 

몸채는 방 한 칸과 마루 두 칸을 들이고 계곡을 면하여 쪽마루를 덧대어 계자난간을 두른, 구조가 간단하고 작은 집이다.
어찌 쉽사리 작은 집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난간에 기대어 밖을 보면 정자 아래로 흐르는 물과 너른 바위와 푸른 숲이

무한대의 자연과 이어지고 있으니.

 

“정자는 솔숲 사이 너럭바위 위에 있는데 고요하고 깨끗하며 그윽하고 빼어나 거의 티끌 세상에 있지 않은 듯하다.
정자에 올라 난간에 의지하여 계곡을 바라보니 못물은 맑고 깊으며 소나무·대나무가 주위를 감쌌다.
관어대(觀魚臺)·영귀대(詠歸臺) 등은 평평하고 널찍하며 반듯반듯 층을 이루어 하늘의 조화로 이루어졌건만
마치 사람의 손에서 나온 듯하다. 집과 방은 너무 크지도 너무 작지도 않아 계곡과 산에 잘 어울린다.”

 

1688년 계정에 올랐던 정시한의 감상과 평가이다. 오른쪽 벽 위에는 ‘溪亭’(계정)이라고 석봉이 쓴 편액이 붙어 있다.

 

옆으로 덧붙인 곳에는 ‘養眞菴’(양진암)이라고 쓴, 집에 비해 무척 커다란 편액이 걸려 있다. 부드럽고 점잖은 퇴계의 글씨도 글씨지만

어느 암자를 방불케 하는 그 이름이 이채롭다. 이름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이곳은 암자 비슷하게 쓰였다.

 

 

 

 

 

 

 

 

 

 

 

들어왔던 저 대문을 되돌아 나가면 기왓장으로 덮힌 흙 벽 사이로 비스듬히 누운 향나무 한그루가 있고 ~

 

 

 

계곡쪽을 바라본 흙 담벽 사잇길  ~

 

 

 

계곡쪽에서 바라다본 사잇길 모습이다.

 

 

 

 

관어대(觀魚臺)에 내려서서 개울의 상류쪽을 바라보니 맑게 고인 물 위로는 낙엽이 떨어져 쌓이고 물속에는 새파란 하늘빛이 어리는데

저기 어디쯤엔가 작은 폭포를 이루어 갓끈을 씻는 곳이라는 탁영대(濯纓臺)가 있고, 탁영대 북쪽 일대를 징심대(澄心臺)라고 했다.

 

 

 

사산오대(四山五臺)는 독락당 주변의 산과 자계천의 다섯개의 바위에 붙혀진 이름이다.

사산은 동쪽에 있는 화개산(華蓋山 563m)과 서쪽에 있는 자옥산(紫玉山 567m), 남쪽의 무학산(舞鶴山 433m), 북쪽의 도덕산(道德山 703m)을 말하며,

오대는 고기들이 노는 것을 관조한다는 관어대(觀魚臺), 돌아감을 노래한다는 영귀대(詠歸臺), 갓끝을 씻는다는 탁영대(濯纓臺), 마음을 맑게한다는

징심대(澄心臺), 마음을 깨끗이 한다는 세심대(洗心臺)를 일컫는다.

 

 

 

여기가 사산오대(四山五臺)의 관어대(觀魚臺)란다.

 

독락당 계정을 받치고 있는 반석이 관어대(觀魚臺),
계정 맞은편에 병풍처럼 두른 바위가 영귀대(詠歸臺),
계정 북쪽에 작은 폭포를 이루어 갓끈을 씻는 곳이 탁영대(濯纓臺),
탁영대 북쪽 일대를 징심대(澄心臺), 옥산서원 밖 너럭바위를 세심대(洗心臺)라 했다.

 

 

 

 

 

 

독락당 계정을 받치고 있는 반석이 관어대(觀魚臺)
계정 맞은편에 병풍처럼 두른 바위가 영귀대(詠歸臺)
계정 북쪽에 작은 폭포를 이루어 갓끈을 씻는 곳이 탁영대(濯纓臺)
탁영대 북쪽 일대를 징심대(澄心臺)

옥산서원 밖 너럭바위 세심대(洗心臺)

촬영일 : 2019년 11월 14일(목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