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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우산 연호사(黃牛山 煙湖寺)

도랑도랑 2015. 6. 30. 21:01

 

 

황우산 연호사(黃牛山 煙湖寺)


삼국시대 신라의 대야성에서 풍광이 가장 아름다운 남쪽 석벽 위에 지어진 연호사는 김춘추의 딸 고타소랑과 신라 장병 2천여 명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지은

원찰(願刹)이다.  삼국시대 신라의 변방으로 군사 요충지였던 황우산 대야성에 백제군 일만 대군이 642년 공격을 했다. 김춘추의 사위인 김품석이 이끄는 신라군은

백제군에게 패전을 할 위기에 처하게 되면서 항복할 것을 거절하고 싸우게 된다. 여기서 김품석은 “아버지가 나를 죽죽(竹竹) 이라 이름 지은 것은 추운 데에도

시들지 않고 꺾일지언정 굽히지 말라 함이다. 어찌 죽음을 겁내 살아 항복 하리오”라며 장병 2,000여 명과 장렬하게 싸우다 전사하게 된다. 이때 죽은 김품석과

처자, 그리고 신라 장병 2,000여 명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서 643년 와우 선사가 절을 세운 것이라고 한다. 이후 연호사의 내력은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현재

극락전, 삼성각, 범종각, 요사채의 전각이 있다.


연호사(烟湖寺) 밑에는 푸름이 젖어드는 곳이라 하여 지어진 함벽루(涵碧樓)라는 누각이 있다. 함벽루는 핏빛의 역사와는 다르게 옛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던 곳

이었다.함벽루는 진주 촉석루나 밀양 영남루보다 더 오래된 정자로 누각 처마의 빗물이 황강으로 바로 떨어지게끔 지어져 누마루에 앉으며 배를 타고 있는 느낌

마저 든다.

 

연호사(烟湖寺)는 대야성 남쪽 기슭 양지바른 곳의 석벽(石壁)을 파고 아늑히 자리하고 있는데. 황소가 엎드려서 황강의 물을 마시고 있는 머리에 법당이 자리

하고 있다고 한다. 절을 끼고 흐르는 황강에서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물안개와 건너편 늪의 아름다운 경치가 어우러진 환경을 담아 연호사(烟湖寺)라고 이름

지은듯 하다는 뜻이기도 하.

 

 

 

 

 

 

 

 

 

 

 

 

 

 

 

 

 

 

 

절벽아래 좁은터에 지어진 삼성각 전체의 모습은 담을수가 없었다.

삼성각의 주련은 어느 절집에서도 보기드문 한글로 쓰여져 이채롭기도 했는데......

 

 

 

 

 

 

松巖隱跡經千劫 (송암은적경천겁)

生界潛形入四維 (생계잠형입사유)

隨緣赴感澄潭月 (수연부감징담월)

空界循環濟有情 (공계순환제유정)


소나무와 바위에 자취 감추어 천겁을 지내고

중생계에 모습 감추고 사방으로 왕래하네.

인연따라 감응함은 맑은 못에 달 비치듯

허공계 순환하며 중생을 제도하네.

 

 

 

 

좌측 공터 주차장에 주차를하고 곧바로 강가로 내려서면 요즘 어느지역을 가더라도 쉽게볼 수 있는 산책로가 나오고 우측으로 몇 걸음 가다보면 함벽루가 나온다.

내가 갔던길은 초행이었으니까 어떠한 현판도 걸려있지않은 일주문을 지나 조금 들어가니 우측 산자락 경사지 비석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함께 세워져 있던

안내판이 대야성과 합천군수 이증영 유허비(陜川郡守李增榮遺墟碑)의 안내판이었는데 길 좌측에는 함벽루의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유허비(遺墟碑) : 나라 위(爲)해 몸바친 이의 업적(業績)을 기리기 위(爲)하여 그 유허에 세운 비(碑)

유허란 유지(遺址)·유적(遺蹟)·구기(舊基)와 같이 ‘남긴 터(자취)’·‘옛터’의 뜻으로, 여기에서는 선현들이 태어났거나 살았거나 임시 머물렀던 곳, 또는 순절(殉節) 

하거나 귀양살이하였던 곳을 가리킨다. 고려시대까지는 유허비라는 명칭의 비는 보이지 않으나, 조선시대에는 유허비를 비롯하여 유지비(遺址碑)·구기비(舊基碑)

라는 명칭의 비가 적지 않게 조성된다. 경기도 개성에 ‘高麗忠臣鄭夢周之閭(고려충신정몽주지비)’라는 문구와 입비연대(1530년, 중종 25)만을 간단히 새긴 비는

유허비의 성격을 띤 초기의 예라고 하겠다.

 

유애비(遺愛碑)란 송덕비(頌德碑)를 말함.

송덕비(頌德碑)란 공덕(功德)을 칭송하기 위하여 세운 비석.

 

유허비(遺墟碑)일명 선정비(善政碑)·유애비(遺愛碑)·공덕비(功德碑)라고도 한다. 지방 수령 등의 관직에 있으면서 백성들에게 큰 은혜를 끼쳤을 때 백성들이

비를 세워 그 덕을 기리는 것이다. 해당 사실을 심사하여 왕의 칙령으로 허가를 받은 다음에야 비로소 세울 수 있었다. 송덕비(頌德碑)는 주로 관아 근처에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목과 고개에 설치되기 때문에 마을 곳곳에 산재하고 있었다.

 

 

 

 

 

유명조선국 합천군 무신평난 사적비

 

 

 

합천 대야성(陜川大耶城)
경상남도 합천군 합천읍 합천리에 있는 성(城).

 

경상남도 합천군 해발 90m의 매봉산 정상울 둘러 쌓은 대야성은 흙과 돌을 이용하여 쌓은 성이다. 이 곳은 삼국시대 때 백제와 신라 서부지방의 접경지대로,

신라 진흥왕 25년(565)에 신라가 백제의 침공을 막기 위해 쌓았다 한다.

 

진덕여왕 11년(642) 백제 윤충의 공격으로 함락된 적이 있었는데, 이 때 신라 대야성 도독 김품석과 부인(김춘추의 딸)이 죽자 김춘추는 백제를 멸망시킬 결심을

한 곳이다. 또한, 경명왕 4년(920)에는 후백제 견훤에게 함락되기도 하였다.

 

성벽의 길이는 300m 정도인데 대부분 훼손되어 원형이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건물터와 적을 막기 위해 세운 울타리의 흔적이 남아있다.

 

 

 

합천군수이증영유애비(陜川郡守李增榮遺愛碑)

 

2001년 12월 20일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367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중기에 합천군수를 지낸 바 있는 이증영(李增榮 ?∼1563)의 공덕을 기리는 비(碑)로,

조선 명종 14년(1559)에 세워졌다. 비문을 지은 이는 조선 중기의 학자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 이고, 글씨를 쓴 이는 조선시대의 명필 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 ?~?)이다.

 

비의 크기는 가로 87cm, 세로 202cm, 폭 17cm이며, 비문은 전체 13행, 각 행 평균 25자로 되어 있다. 비문에는 1554년부터 1558년까지 합천군수를 지낸 이증영이

1554년의 극심한 흉년에 백성을 구휼하고, 청렴하게 관직생활을 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이증영은 황기로와 함께 조선 중종 29년(1534)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명종이 경원대군이었을 때 그의 사부가 되었다. 명종이 즉위한 뒤 여러 벼슬을 거쳐 합천군수를 지냈고, 1563년 청주목사로 재직할 때 사망하였다.

 

비석의 글씨를 쓴 황기로는 당대 최고의 서예가였을 뿐 아니라 특히 초서를 잘 써서 초성(草聖)이라고까지 불렸던 인물이다. 그의 글씨 가운데 초서(草書)는 여러

점 남아 있지만 해서(楷書)로 쓴 글씨가 완성된 형태로 남아 있는 것은 이 비석이 유일하다 할 수 있다. 또 비문을 지은 남명 조식은 경의사상(敬義思想)에 입각해

살았던 학자였던 만큼 비문의 내용 또한 믿을 만하다는 점에서 더욱 가치가 높다.

 

 

 

                                                                                                                                            촬영일: 2015년 06월 29일(월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