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황사(芬皇寺)
634년(선덕여왕 3)에 창건(創建)되었다. 국보 제30호로 지정된 모전석탑(模磚石塔)을 비롯하여, 화쟁국사비 비석대(和諍國師碑 碑石臺)·석정(石井)·석조(石槽)·초석(礎石)·석등·대석(臺石)과 사경(寺境) 이외에 당간지주(幢竿支柱)가 남아 있어 보존되고 있다. 이 절에는 775년(경덕왕 14) 본피부(本彼部)의 강고내미(强古乃未)가 구리 30만 6700근을 들여 만들었다는 약사여래동상이 있었다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고 한다. 원효(元曉)가 이곳에서 《화엄경소(華嚴經疏)》를 썼고,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상은 신화(神畵)로 일컬어졌다. 또한 절의 좌전에 있었던 천수대비(千手大悲) 벽화는 매우 영험이 있어서 눈 먼 여자 아이가 노래를 지어 빌었더니 눈을 뜨게 되었다고 전한다.
그 어느해 보다 포근하고 따뜻했던 겨울이 지나갈 무렵 겨울 답다는 추위라고는 모두 손꼽아 헤아려 보아도 반짝 몇 일 뿐이었을것
같은 생각이다. 그러한 겨울이 지났으니 당연히 봄 꽃 또한 어느해 보다 빨리 피어날 것이란 예상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상황에서
2월에는 또 많은 눈이 내렸다. 눈이 내리기 이전 첫 번째 토요일엔 복수초를 볼 수가 있었고 변산바람꽃도 피어난 것을 구경할 수가
있었다. 야외로 나가보면 지루하지 않은 자연 환경과 볼거리가 있어서 좋았던 휴일 어느날 오후 늦은 시간에 구황동 당간지주 근처를 지나다가 분황사 앞에 잠시 머물게 되었을 때 굳게 잠겨있는 대문 옆 아담한 담장 너머로 위부분이 보이던 모전석탑을 바라보면서
햇살좋은 어느날 경내를 한 번 돌아봐야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내가 여유로운 날엔 언제나 그런것 처럼 햇빛없는 봄날같이
회색 풍경으로 그려졌다.
황룡사와 담장을 같이 하고 있는 분황사는 선덕여왕 3년(634)에 건립되었으며 우리 민족이 낳은 위대한 고승 원효와 자장이 거쳐간
절이다. 643년에 자장이 당나라에서 대장경의 일부와 불전을 장식하는 물건들을 가지고 귀국하자 선덕여왕은 그를 분황사에 머무르게 하였다. 또 원효는 이 절에 머물면서 화엄경소 , 금광명경소 등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원효가 죽은 뒤 그의 아들 설총은 원효의 유해로 소상을 만들어 이 절에 모셔두고 죽을 때까지 공경하였다. 일연이「삼국유사」를
저술할 때 나지는 원효의 소상이 있었다고 한다. 좌전 북쪽 벽에 있었던 천수대비 그림은 영험이 있기로 유명했다고 하는데, 경덕왕 때 희명의 다섯 살 난 아이가 갑자기 눈이 멀자 아이를 안고 천수대비 앞에 가서 '도천수대비가'를 가르쳐 주고 노래를 부르면서 빌게
하였더니 눈을 뜨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상 벽화가 있었다고 하며, 경덕왕 14년(755)에는 무게가 30만6,700근이나 되는 약사여래입상을 만들어서 이 절에 봉양하였다고 한다.
역사가 오랜 분황사에는 허다한 유물이 있었을 터이나 몽고의 침략과 임진왜란 등으로 모두 유실되었고, 지금은 분황사에 둘러놓은
어른 키 만한 담장 위로 석탑의 윗부분만이 보이는 자그마한 절이 되었다. 현재 분황사 경내에는 분황사 석탑과 화쟁국사비편, 삼룡변어정이라는 우물들이 있으며, 석등과 대석 같은 많은 초석들과 허물어진 탑의 부재였던 벽돌 모양의 돌들이 한편에 쌓여 있다. 1965년 분황사 뒷담 북쪽으로 30여 미터 떨어진 우물 속에서 출토된 불상들이 경주박물관 뜰에 늘어서 있다.
화쟁국사비편(和諍國師碑片) / 경북 유형문화재 제97호
고려시대(高麗時代) 때 만들어 졌다는 원효대사(元曉大師)의 화쟁국사비(和諍國師碑)는 비대좌(碑臺座)만 우물 옆에 초라하게 남아 있다. 숙종(肅宗) 6년 8월 원효(元曉)와 의상(義湘 : 625~702)이 동방(東方)의 성인(聖人)인데도 비석(碑石)이나 시호(諡號)가 없어
그 덕(德)이 크게 드러나지 않음을 애석(哀惜)하게 여긴 숙종(肅宗)이 원효(元曉)에게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 의상(義湘)에게는 원교국사(圓敎國師) 라는 시호(諡號)를 내리고 비석(碑石)을 세우게 한 것이라고 한다. 이후 방치(放置)되고 있었을 비신(碑身)을 받쳤던 비대(碑臺), 즉 귀부(龜趺)가 절 근처(近處)에서 발견(發見)되자,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 1786~1856)가 32세(歲) 때인 1817년(年)에 무장사 비편(碑片)을 찾기 위해 경주를 찾았을 때 이를 확인(確認)하고 귀부(龜趺)의 위쪽에 ‘차신라화정국사지비부(此新羅和靜國師之碑趺)’라고 새긴 것으로 추정(推定) 하고 있지만 주의(注意) 깊게 살펴보지 않으면 글씨를 알아볼 수가 없다고 하는데 가운데, 차신라화정국사지비부(此新羅和靜國師之碑趺)에서 정(靜)자는 쟁(諍)자를 잘못 알고 새긴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삼룡변어정(三龍變魚井)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따르면 신라(新羅)에는 청지(靑池), 동지(東池), 분황사(芬皇寺)에는 한 마리씩의 호국용(護國龍)이 살고
있었는데, 원성왕(元聖王 : ?~798) 11년(年 : 795)에 당(唐)나라 사신(使臣)이 용(龍)을 세 마리의 물고기로 변신(變身)시킨 뒤 잡아서 길을 떠났으며, 하루 뒤에 두 여인(女人)이 왕(王) 앞에 나타나서 사실(事實)을 아뢰니 왕(王)이 사람을 시켜 당(唐)나라 사신(使臣)을 쫓아가서 되찾아 세 곳에 놓아주어 살게 하였는데, 그 뒤부터 이 우물을 ‘삼룡변어정(三龍變魚井)’ 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신라(新羅) 우물 가운데에서 가장 크고 우수(優秀)하며, 천 년(千 年)이 지난 지금도 그대로 사용(使用)되고 있는 신비(神秘)의 이 우물은 화강암(花崗巖)으로 만들어졌는데, 높이 70㎝의 8각(八角)으로 되어 있는 우물 틀의 외부(外部)는 팔정도(八正道)를, 원형(圓形)으로 조성(造成)된 내부(內部)는 원융(圓融)의 진리(眞理)를 상징(象徵)하며, 또한 우물 안의 4각형 격자(四角形 格子)는 사성제(四聖諦)를 상징(象徵)한다고 했다.
초석들과 허물어진 탑의 부재였던 벽돌 모양의 돌들이 경내 한편에 진열되어 있다.
분황사 대종각(芬皇寺 大鐘閣)
절에서는 사람을 모이게 하거나 시각을 알리기 위하여 치는 종이 있고, 사물이라는 소리를 내는 공양구가 있는데 범종과 법고,
목어와 운판이 그것이다. 소리를 통하여 세상의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을 구제해 보고자 하는 대승불교의 의미가 담겨져 있다고 한다.
범종 앞에 놓여져 있는 이것은 '木魚(목어)' 이다. 木魚鼓(목어고), 魚鼓(어고), 魚板(어판)이라고도 하며, 나무를 깎아 물고기 모양으로 만들고 속을 비게 하여 두드리면 소리가 나는 법구로 銅鐘(동종), 金鼓(금고), 雲板(운판)과 함께 불전사물(佛殿四物)의 하나인
것이다. 나무를 물고기 모양으로 만들어 배 부분을 파내고 안쪽의 양벽을 나무채로 두들겨 소리를 내는 법구이다.
청마의 해 라는 올해가 갑오년이다. 60년 마다 돌아오는 갑오년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갑오년 불교사의 글을 살펴 보면
394년 신라 내물왕 39년 신라 8대 사찰의 하나로 불린 창녕 관룡사를 창건했고, 514년 신라 제23대 법흥왕이 소량 천감 13년에 제위에 오르자 불교가 흥성했다. 574년 진흥왕의 어머니 지소부인이 불국사를 중건 하면서 비로자나불과 아미타불을 주조해 봉안을 했고, 634년 백제 무왕 35년 왕사 묘련스님이 부안 개암사 창건. 선덕여왕 3년 경주 분황사를 완성 했다고 한다.
694년 신라 효소왕 3년 일교국사가 완주 화암사를 창건 했으며, 754년 신라 경덕왕 13년 황룡사 대종을 주조 했다고 한다. (높이 3m 9cm, 무게 108톤) 당나라에서 건너온 중도법사가 김제 망해사를 창건 했으며, 814년 통일신라 현덕왕 6년 중국 승려 혜감이 진안
금당사를 창건 했다고 한다.
사찰의 문이나 입구를 지키는 1쌍의 천부신장상(天部神將像).
금강역사(金剛力士)·이왕(二王)·집금강신(執金剛神)이라고도 한다. 인도의 약사신에서 유래된 것으로 처음에는 갑옷을 입은 신장형(神將形)으로 표현되었지만 차츰 반라(半裸)의 몸에 천의를 두르고 팔을 들어 왕성한 힘을 강조하는 모습으로 변했다.
보통 사찰의 좌우에 두 신을 마주보도록 배치했는데 이는 사악한 것이 성스러운 경내로 들어오는 것을 막는 수문장 역할을 한다는 뜻에서 비롯된 것이다. 입을 벌리고 한 손에 금강저(金剛杵)와 같은 무기를 들고 있는 상은 아금강상(阿金剛像)이라고 하며, 입을 꽉
다문 채 주먹으로 권법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상은 음금강상(吽金剛像)이라고 한다.
인왕은 금강역사와 밀적역사(密跡力士)로 분류되기도 하는데 이는 같은 개념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불법수호신으로 사찰이나 불전(佛殿)의 입구와 석탑의 문 등에 그림이나 조각상으로 많이 남아 있는데 얼굴은 분노형이며 상반신은 옷을 걸치지 않은 나형으로 신체의 근육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현존하는 유물 중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의 문 양쪽에 있는 신라시대의 인왕상(634)이 가장 오래되었으나 대표적인 예는 석굴암의 인왕상(751~774)이다. 인왕은 불교조각 중에서 가장 인체에 가깝게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으므로 이를 통해서 당시 조각가들의 인체표현에 대한 관심과 조각기술을 어느 정도 짐작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상이라는 것이다.
촬영일: 2014년 2월 22일 토요일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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