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소골 삼층석탑(僧燒谷三層石塔)
경주 남산 동쪽 기슭의 승소골(僧燒谷)에 있던 탑이라고 한다. 이 탑은 규모가 작아지고, 지붕받침의 수도 4단으로 줄어드는 등,
9세기에 만들어지는 석탑의 특징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그런데 위층 기단과 1층 몸돌에 다른 탑에서는 볼 수 없는 조각이 있다.
위층 기단에는 상다리무늬 조각이 있다. 그리고 1층 몸돌에는 상다리무늬 안에 사천왕을 새겼다. 사천왕은 원래 고대 인도의 토속
신으로, 불교 성립 이후 부처님과 부처님 말씀의 말씀을 동서남북에서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다. 이 탑에 새겨진 사천왕은 부처님을
의미하는 사리가 모셔진 탑을 지키려던 신라인들의 염원을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상(床)의 다리와 비슷하다는 뜻으로 붙여진 한글 용어이며, 중국. 일본에서는 眼像(안상)'으로 사용 함. ***
영축산(靈鷲山)에서 설법하는 석가모니부처, 석가탑((釋迦塔)
토함산(吐含山) 불국사(佛國寺) 대웅전 앞마당 서쪽에 서있는 석가탑을 그대로 만든 것으로, 1975년 이 곳으로 박물관을 옮긴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 석가탑의 정식 이름은 '석가여래상주설법탑(釋迦如來常住設法塔)'인데, 다보탑과 마찬가지로『법화경(法華經)』,『견보탑품(見寶塔品)』의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탑이다.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석가모니 부처를 형상화한 것이 바로
불국사 석가탑과 다보탑인 것이다. 석가탑은 경주와 옛 신라 땅을 넘어 전국으로 널리 퍼진 석탑의 모델이 되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감은사터(感恩寺址) 삼층석탑(三層石塔)에서 시작된 통일신라 삼층석탑의 완성이 바로 석가탑에서 이루어 진다는 것이다. 석가탑에서 한 가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탑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탑구(塔區)라 하는 구조물이다. 탑구의 네 모서리와
각 변의 중앙에는 각기 모양이 다른 연꽃이 새겨져 있다. 모두 합해 여덟 개의 연꽃이 있어, 팔방금강좌(八方金剛座)라고 부르기도
한다. 여기에 새겨진 연꽃은 석가모니가 설법할 때 그 둘레에 앉아았던 다른 불국토(佛國土)에서 오신 부처님의 자리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석가탑을 부르는 이름이 하나 더 있는데,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무영탑(無影塔)이다.
백제 석공 아사달(阿斯達)과 그의 아내 아사녀(阿斯女)의 슬픈 사랑 이야기에서 나온 것인데, 영지(影池)라는 못에 석가탑의 그림자가
비치지 않자 남편을 기다리던 아사녀가 못에 빠져 죽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안내판 설명문에서 발췌)
국립경주박물관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성덕대왕신종이 보이고 우측으로 조금 돌아 뒤로 나가면 석가탑과 다보탑이 깔끔한 모습으로
솟아 있는 모습이 눈길을 끈다. 내가 보려고 들어갔던 것은 도로변을 지나칠 때 검은빛이 도는 삼층석탑 바로 고선사지 삼층석탑이었지만 박물관 옥외 전시관에 석가탑과 다보탑이 전시되어 있다는 점이 금방 이해할 수는 없었다. 박물관에는 귀중한 자료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유물들만 있을것이란 생각 뿐이었기 때문일까? 불국사에 들어가면 석가탑과 다보탑을 볼 수가 있는데 왜 박물관
뒤뜰에 모형의 탑이 세워져 있는지는 오늘에서야 알게 되었다.
2012. 03. 22 (목) 오전 2:51 입력된 어느 신문사 뉴스 머릿기사가 흥미롭다.
박정희, 다보탑 100년 못간다 회신에 복제품 만들라 특명
경주시 인왕동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 다보탑, 석가탑 복제품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특명으로 만들어졌다. 박 전 대통령은 천년의
세월을 견뎌온 다보탑, 석가탑이 앞으로 천년은 더 갈 수 있는지를 문화재위원회 등에 물었다고 한다. 정영호 단국대 석좌교수의
회고. “간접적으로 이 같은 질문이 내게도 왔는데 당시 석조 문화재 전문가들은 ‘100년도 못 갈 것’이라는 회신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박 전 대통령은 문화재관리국에 1975년 경주박물관의 개관에 맞춰 다보탑, 석가탑 복제품을 만들어 내라는 지시를 한다.
문화재관리국은 그래서 우리 기술진에 의해 처음으로 다보탑, 석가탑을 실측했다. 정 교수는“그전에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이
약식으로 한 실측 도면이 있었지만 우리 손에 의한 것은 없었다.”고 말했다.
1975년 7월 2일 국립경주박물관 개관식이 성대하게 열린다. 박 전 대통령, 최순우 국립중앙박물관장을 비롯해 대학 총장 및 불국사의 월산 스님 등이 테이프 커팅을 했다. 정 교수는“나는 문화재 위원 겸 단국대 박물관장 자격으로 참석했는데 그 행사에 박근혜씨가
대통령을 수행해 온 기억이 있다.”고 전했다. 경주박물관 다보탑은 실측 자료를 토대로 진품과 똑같은 크기로 제작됐으며, 네 모서리에 돌사자가 배치돼 있다.
석가모니부처 앞에 나타난 칠보탑(七寶塔), 다보탑(多寶塔)
토함산(吐含山) 불국사(佛國寺) 대웅전 앞마당 동쪽에 있는 다보탑(多寶塔)을 그대로 만든 것으로, 1975년에 이 곳으로 박물관을 옮긴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 다보탑의 정식 이름은 '다보여래상주증명탑(多寶如來常住證明塔)'으로 『법화경(法華經)』『견보탑품(見寶塔品)』의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탑이다. 다보탑은 영축산(靈鷲山)에서 설법하는 석가모니 부처의 설법을 증명하기 위해 땅에서 솟아난 다보부처의 상징이요 칠보탑(七寶塔)을 묘사한 것이다. 그런데 이 다보탑 복제품은 불국사에 있는 진품과 다른 점이 있다고 하는데, 바로 사자의 숫자와 방향이다. 불국사 다보탑에는 한 마리의 사자가 기단 서쪽 정중앙에 앉아 있지만, 여기의 복제품에는 네 마리의 사자가 귀퉁이에 앉아 있다. 일제 강점기 까지만 해도 이와 같이 네 마리가 있었다고 한다. 세 마리는 없어지고 현재 한
마리만 남아 있는것이라고 한다. 분황사 석탑이나 화엄사(華嚴寺) 사사자석탑(四獅子石塔), 흥덕왕릉(興德王陵)에 있는 사자 네 마리가 모두 네 귀퉁이에 있는 것으로 보아 이 탑도 네 귀퉁이에서 불법을 수호 하라는 의미로 사자를 배치하였을 것으로 여겨 진다.
(안내글 설명문에서 발췌)
고선사지 삼층석탑(高仙寺址三層石塔) / 국보 제38호
경상북도 경주시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38호로 지정되었다. 높이는 9m이다. 원래 경상북도 경주시 고선사지에 있던 것을 덕동댐 건설로 물에 잠기게 되자 1977년 지금의 장소로 옮겼다. 규모와 가구수법(架構手法)이 국보 제112호인 감은사지 삼층석탑(感恩寺址三層石塔)과 비슷하다.
2층 기단을 마련한 점, 지대석(地臺石)과 하기단(下基壇) 면석(面石)을 같은 돌 12장으로, 하기단 갑석(甲石)과 상기단(上基壇) 면석은 다른 돌 12장으로 하고, 상기단 갑석이 8장인 점, 탑신부(塔身部)도 초층 옥신(屋身)은 우주(隅柱:모서리 기둥)와 면석을 다른 돌 8장으로, 2층 옥신은 각 면(各面) 1장씩의 4석(石)으로, 3층 옥신은 1석으로 한 점, 옥개(屋蓋)는 개석(蓋石)과 받침을 각각 다른 돌 4석으로 한 점, 옥개받침은 5단이고 하기단 탱주(撑柱)는 3주, 상기단 탱주는 2주인 점 등이 감은사지 삼층석탑과 같고, 다만 초층 옥신의 각 면에 문비형(門扉形)의 양각이 있는 점이 다르다. 상륜부(相輪部)는 층 ·단(層段)이 없는 노반(露盤)과 복발(覆鉢) ·앙화석(仰花石)이 남아 있고, 찰주(擦柱)는 없다.
고선사는 원효가 머물렀던 사실이 있으며, 그의 입적(入寂)이 686년(신문왕 6)이므로 이 탑의 건립연대를 이때로 보는 것이 석탑 건축양식으로 보더라도 타당할 것 같다.
고선사터 삼층석탑(高仙寺址三層石塔)
이 탑이 있던 고선사(高仙寺)는 『삼국유사』에 따르면 원효대사(元曉大師 617∼686)가 머물렀던 절이다. 미술사학자인 우현(又玄)
고유섭(高裕燮 1905~1944) 선생의 글에 따르면, 1914년 5월 이 삼층석탑이 있던 주변에서 서당화상비(誓幢和尙碑) 조각이 발견 되었다고 한다. 서당화상비는 원효대사의 손자인 설중업(薛仲業)이 할아버지인 원효를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했다.
원효대사는 신문왕(神文王 재위 681 ~ 692) 6년(686)에 입적 하니까 이 탑 역시 686년 이전부터 있었을 것이다.
1975년에 고선사터가 덕동댐 건설로 물에 잠기게 되자 이 탑을 비롯하여 여러 문화재가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이 탑과 너무나도 닮은 탑이 신문왕 2년(682)에 세운 감은사터 삼층석탑이다.
감은사터 삼층석탑에는 찰주가 남아 있어 언뜻 달라보이지만 2단으로 된 기단 위에 3층의 몸돌과 지붕돌로 된 모습, 노반까지의
높이가 모두 10.1미터라는 점, 82장의 돌로 이루어 졌다는 점 등이 쌍둥이 탑이라고 할 만큼 닮았다는 것이다.
다만 고선사터 삼층석탑 1층 몸돌에 문(문비 門裨)을 표현한 점이 다를 뿐이라고 한다.
돌로 탑을 쌓은 이유는 무엇일까?
'석탑(石塔)은 석조탑파(石造塔婆)를 줄인 말이다. 탑파는 인도의 '스투파(Stupa)'라는 말을 한자로 옮긴 것으로 부처의
유골[진신사리: 眞身舍利]을 묻은 무덤을 뜻한다. 인도의 탑은 원래 돌이나 진흙을 이용하여 돔 형태로 만들었다.
불교와 함께 주변으로 전래되엇는데, 중국은 진흙 벽돌을 이용한 '전탑(塼塔)', 일본은 '목탑(木塔)'을 많이 만들었다.
우리나라는 '석탑의 나라'라고 불릴 만큼 석탑이 많다. 고구려 소수림왕(小獸林王) 2년(372) 불교를 수용한 이후 쉽게 구할 수 있는
돌을 이용하여 석탑을 새롭게 만들기 시작했다. 처음의 석탑은 목탑과 비슷한 모양으로 만들었는데, 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만든 석탑으로 생각되는 '익산(益山) 미륵사터(彌勒寺址) 석탑(石塔)에서 잘 알 수 있다. 돌로 탑을 쌓았던 이유 중 하나는
목탑이 불에 잘 탔기 때문일 것이다. 높이가 80여 미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황룡사(皇龍寺) 구층목탑(九層木塔)은 그 도시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따르면 황룡사 구층목탑은 몽고군에 의해 불타 없어지기까지 무려 다섯 번이나
벼락을 맞고 여섯 번 다시 고쳤다고 한다.
한국 석탑의 모범이 된 신라 석탑
신라는 목탑을 돌로 재현한 백제와 달리 중국의 전탑과 같은 모습의 '분황사(芬皇寺) 모전석탑(模塼石塔)을 만들었다.
이 '모전석탑'은 안산암(安山岩)을 벽돌 처럼 다듬어[모전:模塼] 차곡차곡 쌓은 석탑이다. 그렇다면 2단으로 된 높은
기단(基壇) 삼층의 몸돌[탑신:塔身]과 지붕돌[옥개석:屋蓋石]의 탑신부(塔身部), 여러 단의 지붕받침, 꼭대기 장식[상륜부:相輪部]
으로 이루어진 신라 석탑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고구려와 백제를 아우른 신라는 삼국의 문화를 융합하여 세련되고 정제된 문화를 꽃피웠는데, 이 시기 석탑은 목탑과 전탑의 특징을 두루 갖추고 있다. 2단으로 된 기단과 지붕, 기둥 표현 등은 목탑의 흔적이며,
여러 층의 지붕받침은 전탑의 흔적으로 볼 수 있다. 석탑을 만들기 시작한 7세기 후반의 '감은사터(感恩寺址) 삼층석탑(三層石塔)은
기단부터 3층 지붕까지 무려 82장의 돌로 짜 맞추었다. 그런데 규모가 점차 작아진 8세기 중엽의 불국사(佛國寺) 석가탑(釋迦塔)은
22장의 돌로 만들었다. 9세기에는 22장이 채 안 되는 것도 있다. 탑의 규모가 작아지면서 8세기에 비해 9세기에는 무려 다섯배나 많은 석탑이 만들어지게 된다. 이처럼 전체적으로 초기탑의 형태를 유지하지만 만들기 쉽게 변화함을 알 수가 있다.
2014년 2월 22일 국립경주박물관 옥외전시장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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