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문화유적유물산책

국립경주박물관 야외전시장

도랑도랑 2014. 2. 23. 10:40

 

 

 

국립경주박물관은 광복 직후인 1945년 국립박물관 경주분관으로 출범하였으며,

광복 이전에도 경주에는 박물관 형태의 조그마한

진열관이 있었다고 한다. 경주고적보존회라는 단체가 1913년 동부동에 있는 조선시대 경주부의 관아 건물을 이용하여 진열관을

열었다는데, 이 진열관은 1926년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으로 바뀌어 광복 전까지 유지되었다는 것이다.


1975년 국립경주박물관은 큰 획을 긋게 되었다. 현재 위치인 인왕동에 건물을 새로 짓고 박물관 전체를 옮긴 것이다.

당시 동부동에서 인왕동으로의 박물관 이전은 경주에서 하나의 문화적 사건이기도 했다는데, 특히 성덕대왕신종의 이전은 많은

시민들이 직접 참여한 행사로 유명했다. 1975년 당시에는 본관(지금의 신라역사관)과 별관(지금의 특별전시관) 그리고 성덕대왕신종을 위한 종각이 지어졌으며, 설계자는 이희태(1925~1981)라고 한다.

외부에 기둥들을 일정한 간격으로 세운 누각 형태의 본관은 경복궁의 경회루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것이다.

 

 

 

 

 

 

 

                                                                                                                         

                                                            숭복사 쌍귀부 (崇福寺雙龜趺)

 

 

 

 

숭복사 쌍거북 비석받침 (崇福寺雙龜趺)

 

두 마리의 거북이 붙어 있는 이 비석받침은 경주 외동읍 말방리 숭복사터에 있던 것이다.『삼국유사 三國遺事』에는 '원성왕元聖王(제위 785 ~ 798)의 능은 토한산 서쪽 골짜기 곡사鵠寺(숭복사)에 있으며 최치원崔致遠(857 ~ ?이 지은 비문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써 숭복사는 원성왕의 명복을 빌어주던 원찰이라는 것과 그곳에 있던 비문을 최치원이 지은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쌍거북 비석받침은 어디에 또 있을까? 숭복사 외에도 경주 배리에 있는 창림사터와 경주 암곡동暗谷洞의 무장사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다른 비석과 달리 쌍거북 받침일까? 그 이유는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은 이 세 절 모두 신라 왕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숭복사는 원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한 절이고, 창림사 일대는 박혁거세 朴赫居世(재위 57BCE~4CE)가 세운 신라 최초의 궁궐터라고 알려져 있으며, 무장사는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재위 654~661)이 삼국을 통일한 뒤 병기를 숨겼다는 전설이 서려있는 곳이다. 아마도 신라 사람들은 왕실과 관련된 비석을 좀더 화려하게 꾸미고 싶지 않았을까? 라고 안내판은 설명되고 있다.

 

 

 

 

 

 

 

 

 

 

 

 

숭복사비(崇福寺碑)

 

경주시 외동읍 말방리 숭복사지(崇福寺址)에서 15편의 비석 조각이 발견되었을 뿐 비의 전체적인 모습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신라시대 학자 최치원(崔致遠)의 문집에서 추려낸 4개의 비문, '사산비명(四山碑銘)' 중에 숭복사비가 포함되어 있어 비석의 조성 배경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비문에 따르면 885년(신라 헌강왕 11) 왕이 현재의 숭복사지에 있던 곡사(鵠寺)라는 절을 크게 중창한 뒤 명칭을 숭복사로 개칭하고 최치원에게 비문을 짓도록 명령하였는데 이후 헌강왕과 그 뒤를 이은 정강왕이 연이어 승하하는 바람에 비문을 짓지 못하다가 896년(신라 진성여왕 10)에 이르러서야 비문을 완성하였다고 전한다. 현재 비석 조각은 국립경주박물관동국대학교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석탑 몸돌에 새겨진 신장(또는 명왕) / 石塔塔身浮彫神將(或明王)像


이 석탑 부재는 ㄱ자 모양으로 다듬은 네 개의 돌을 사방으로 배치한 석탑1층 몸돌의 일부분이다. 두 개의 돌이 맞닿는 곳의 가운데에는 문고리가 달린 문비(門扉)를, 그 바깥의 양쪽으로 수문장 같은 상을 하나씩 새겨 원래는 모두 8구가 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중에는 송곳니를 드러내고 네 개의 팔을 지닌 상(像)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 존상을 비밀불교(밀교:密敎)에 나오는 명왕(明王)으로 보기도 한다. 이와 비슷한 상이 새겨진 ㄱ자 모양의 석탑 부재(部材)가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박물관에도 전시되고 있다.

 

 

 

 

 

 

 

 

 

 

석탑 몸돌에 새겨진 사천왕 / 石塔塔身浮彫四天王像

 

석탑 1층의 몸돌로 보이는 이 부재(部材)에는 불교에서 사방을 수호하고 불법(佛法)을 지키는 하늘의 신(神)인 사천왕이 네 면에

새겨져 있다. 이 두 기의 석탑 몸돌은 크기와 상(像) 조각수법이 서로 비슷하여 쌍탑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사천왕은 갑옷을 입고 악귀를 밟고 서 있는 위협적인 모습을 하고 있으며, 마치 살아있는 듯한 생동감이 느껴진다. 통일신라 조각에서 사천왕상은 대개 손에 보탑(寶塔)을 든 다문천(多聞天)이 북쪽이 되기 때문에 그 나머지 세 면의 방위를 미루어 알 수 있다.

 

 

 

 

 

 

 

 

 

 

 

 

 

 

 

 

불법(佛法)의 수호자, 사천왕(四天王).팔부중(八部衆)

 

지극히 청정한 부처의 세계로 들어가려면, 그 전에 통과해야할  문이 있다. 이 가운데 눈을 부릅뜨고 칼날조차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단단한 갑옷에 칼이며 창을 들고 악귀를 밟고 잇는 네 명의 신장(神將)이 서있는 '천왕문(天王門)' 혹은 '사천왕문(四天王門)' 이라고 하는 문이다. 바로 사천왕이 있는 세계이다. 부처님, 부처님이 계신 곳, 부처님의 말씀을 세상의 악(惡)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신장으로 이 사천왕 외 에도 팔부중(八部衆), 금강역사(金剛力士), 십이지신(十二支神) 등이 있다. 사천왕은 원래 고대 인도에서 귀신 무리의

왕이었다가 불교에 귀의하여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이 된 존재이다. 불교의 세계인 수미산(須彌山)의 중간쯤 동서남북에 상주하는데,

 

동쪽은 지국천왕(持國天王)이, 서쪽은 광목천왕(廣目天王)이, 남쪽은 중장천왕(增長天王)이, 북쪽은 다문천왕(多聞天王)이 머물면서 불법을 수호한다고 한다. 사천왕의 모습이나 지니고 있는 무기들은 일정하지 않지만 북쪽을 지키는 다문천왕만은 항상 탑을 들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팔부중 역시 사천왕과 마찬가지로 위로는 불법을 수호하고, 아래로는 대중을 교화한다. 불교가 인도에서 서역을 거쳐 중국이나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과정에서 무장한 모습을 띠게 되었지만, 그 자세나 지물(持物) 등은 정형화되지 않고 지역의 특성에

맞게 표현 되었다. 팔부중은 두 종류가 있는데, 부처를 수호하는 불타팔부중(佛陀八部衆)과 사천왕의 권속인 사천왕팔부중(四天王八部衆)으로 나누어진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불타팔부중이 조성되는데, 바로 천(天), 용(龍), 야차(夜叉), 건달바(乾達婆), 아수라(阿修羅), 가루라(迦樓羅),

긴나라(緊那羅), 마후라가(摩喉羅伽) 등이다.

 

                                                                                                                                                       (안내글 설명문에서 발췌)

 

 

 

 

 

 

 

 

 

 

 

 

 

 

 

 

 

 

 

 

 

 

 

 

 

 

 

                                                                                                                                 

                                                                                                                   촬영일: 2014년 2월 22일 토요일 오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