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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황룡사지(慶州 皇龍寺址)

도랑도랑 2014. 2. 18. 19:39

 

 

황룡사(皇龍寺) 경주시에 있었던 사찰로서, 경주에서 가장 컸던 사찰로 알려져 있으나, 현재는 터만 남아 있다. 신라삼보(三寶)의 하나였다. 신라의 사찰로 553년(진흥왕 14년) 기공이 시작되어 569년에 완공되었다고 여겨지나, 566년(진흥왕 27년) 일단 준공 되었

다가 645년(선덕여왕 14년)에 완성되었다는 설도 있다. 고려 고종25년(1238년)에 몽골의 침입으로 소실되었다. 현재 그 터가 사적

제6호로 지정되어 있다.

 

신라 진흥왕(眞興王) 14년(553) 월성(月城)의 동북쪽에 새로운 궁궐을 짓다가 황룡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사찰로 고쳐 짓게 하여

절 이름을 황룡사(皇龍寺)라 하였다고 한다. 574년에 주존불인 금동 삼존불을 만들고, 선덕여왕(善德女王) 14년(645)에 자장(慈藏)의 권유로 백제의 기술자인 아비지(阿非知)를 초청하여 9층 목탑을 완성시켜 4대 93년간에 걸친 공사를 마무리했다. 이후 고려 고종(高宗) 25년(1238)에 몽고의 침입을 받아 불타버린 후, 옛터만 남아 있던 것을 사역내 민가 100여호를 이주시키고 1976년 경주고적발굴

조사단에서 8년간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원래 황룡사 대지는 25,000평에 달하는 늪지를 매립하여 마련되었음을 알게 되었

다고 하며, 사찰의 건물은 남북으로 일탑식(一塔式) 절 배치를 기본으로 하고, 금당(金堂)의 좌우에 거의 같은 규모의 건물이 나란히

세워져 이 건물 역시 금당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출토된 유물은 4만여 점에 달하며 모두 우수한 작품들이다.

 

 

 

 

 

 

 

황룡사 9층 목탑지(皇龍寺九層木塔址)

 

황룡사 9층 목탑(皇龍寺九層木塔)은 기록에 따르면 높이는 탑신부 약 65미터, 상륜부 15미터로 전체 80미터에 이르며, 이 탑의 기둥

속에는 자장이 중국에서 가져온 부처의 진신사리 등을 봉안했다고 한다. 각각 제1층은 일본(日本), 2층은 중화(中華), 3층은 오월(吳越), 제4층은 탁라(托羅), 제5층은 응유(鷹遊), 제6층은 말갈(靺鞨), 제7층은 거란(契丹), 제8층은 여진(女眞), 제9층은 예맥(穢貊)을 의미하며, 이 탑을 건축하면 주변국들이 절로 신라를 섬길 것이라 하여 553년(진흥왕14)에 늪지 2만5000평을 메워 공사를 시작해 646년(선덕여왕15)에 완성하였다고 한다. 몽골의 침입 때에 절과 함께 소실되었다. 선덕여왕은 황룡사 9층석탑외에도 첨성대를 만들었다.

 

 

 

 

황룡사장륙상(皇龍寺丈六像)

신라 국찰(國刹) 황룡사에서 주조하였던 신라 삼보(三寶)의 하나인 이 불상은 고려 때 몽고의 침략으로 흔적조차 없어지고 현재는 이를 받치던 석조대좌만 황룡사 금당지(金堂址)에 남아 있다. 이 황룡사장륙상은 573년(진흥왕 34년) 10월 17일에 조성하기 시작해서 그 이듬해인 574년 3월에 완성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인도의 아쇼카왕(阿育王)이 보낸 황금과 동으로 모형 석가삼존상을 본보기로 삼아 문잉림(文仍林)에서 장륙존상을 단번에 주조하였다고 한다.

 

현재 남아 있는 대좌는 장륙존상의 흔적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유품이다. 자연 그대로 생긴 바위의 윗면을 일단 평평하게 고른 뒤 장륙상의 발이 들어갈 수 있게 홈을 파고 넘어지지 않도록 고정시킬 수 있는 꼭지의 홈도 팠다. 앞부분이 넓고 뒤로 갈수록 좁은 형태이다. 이러한 모양은 좌우 협시대좌도 거의 비슷한 편이다.


‘신라가 곧 불국토(佛國土)’라는 신라인들의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조성된 이 장륙존상은 현재 대좌만 남아 있을 뿐이다. 원모습을 알 수 없지만 신라 삼대 국보의 하나로서 우람한 위용의 최대 걸작품으로 추정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