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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구대(盤龜臺) 이야기

도랑도랑 2013. 3. 29. 21:47

 

 

盤龜臺

반구서원 맞은 편에 있는 반구산이 거북 모양같이 생겼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거북 머리에 해당하는 층층으로 된 기암절벽을  반구대라 하며, 울산 12경중의 한곳이라고 한다. 부근에는 선사시대 공룡이 살았다는 공룡발자국화석도 있다.

 

磻高寺가 있었다고 하는데  元曉가 젊은 시절에 공부한 곳으로 영취산에 머물고 있는 朗智를 찾아가 배우며 깨달음을 향한

토대를 닦은 곳이기도 하다. "初章觀文과 安身事心論"이란  숙제를 받아  제출하기도 했다.

 

 

 

1971년 12월 동국대 문명대 불적조사단이 반고사(석조여래좌상-부산대학교 박물관 보관)를 찾던중 국보 2점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으며, 반구대는 盤皐書院 遺墟碑(유형문화재 13호). 학 그림, 盤龜 , 圃隱臺, 玉泉仙洞(옥같이 아주 맑은샘, 신선이 산다는 산골)의 글씨가 있으며,  건너편 5曲 자리에는 休學亭이란 글이 새겨져 있다.

고려 말 포은 정몽주 선생이 출입 한 곳이며, 조선조에는 회재 이언적 선생이 경상도 관찰사를 지내면서 이곳에 쉬어간 적이
있다고 하며, 한강 정구 선생은 복거(卜居: 살 만한 곳을 가려서 정함) 하기로 한 곳이다. 200m 아래 쪽에는 국보 285호 신석기시대 고래사냥꾼이 새긴 바위그림 암각화가 있으며, 세계에서 유일하게 사실적인 표현을 한 고래그림이 종류 별로 새겨져 있다.

 

 

 

 

 

 

 

반구서원(盤龜書院)

반구서원(盤龜書院)의 원래 이름은 반고서원(盤皐書院)이었다고 한다.  반고(盤皐)라 한 뜻은 한강(寒崗) 정구(鄭逑)선생의

수간(手簡)중 "반재아지의(槃在阿之儀)"에서 취한 것이다.  반구대와 깊은 연고(緣故)가 있는 고려말 충신. 학자인 문충공(文忠公) 포은 정몽주(鄭夢周), 조선 중기의 문신 성리학자인 문원공(文元公) 회재 이언적(李彦迪), 문목공(文穆公) 한강 정구(鄭逑)의 유덕(遺德)을 기려 조선 숙종 38년(1712년) 유생들이 뜻을 모아 서원을 세웠다고 하며, 영조4년(1728 무신) 화재로 소실되어

이듬해 다시 세웠으나, 고종 8년(1871) 대원군의 서원철폐령(미사액서원 未賜額書院)으로 훼철되었다.

대한제국 광무(光武) 5년(1901) 지방 유림(儒林)들이 전기(前記) 3선생을 추모하는 유허비를 세우고 1905년 비각(碑閣)을 지었다. 1983년 대곡천 북안(北岸)에 복원하여 그 이름을 반구서원(盤龜書院)이라 고쳤다고 한다.

 

정몽주는 39세 때 친원파(親元派)의 ‘배명친원(拜命親元)’ 정책에 반대하다가 그들의 미움을 사 언양 요도(蓼島)로(현. 언양읍 어음리로 KTX역사로 들어가는 길목)으로 유배되었으며, 41세 때인 1377년 3월에 개경으로 다시 돌아갔다는 것이다.

 

 

 

집청정(集淸亭)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인 반구대 주변에 있는 경주최씨 가문의 정자이다.
숙종 39년(1713)에 운암 崔信基(1673~1737)가 지은 것으로 현 건물은 1932년에 중수한 것이다.
현재 울산에 남아 있는 15개의 정자 가운데 원형이 가장 잘 유지되어 보존 상태도 좋은 편이다.
운암 최신기는 포은이 이곳을 찾음으로써 이름이 알려진 이곳의 명승이 천년토록 깊이 감추어진
것을 애석하게 여겨서 이곳에 정자를 지어 別業과 학문을 갈고 닦을 장소로 확보하려고 했다.
운암 최신기가 집청정을 지은 뒤 시인묵객들이 즐겨 찾는 곳이 되었다. 사계절 맑은 대곡천 계곡물과 반구산(265m) 일명

비래봉에서 뻗어내린 상대와 중대, 하대 3층석대와 석대에 이어진 거북머리 형상을 한 반구대가 만들어내는 경관에

푹 빠질 수 밖에 없다.

 

 

 

 

 

 

 

반구대는 盤皐書院 遺墟碑(유형문화재 13호). 학 그림, 盤龜 , 圃隱臺, 玉泉仙洞(옥같이 아주 맑은샘, 신선이 산다는 산골)의 글씨가 있으며......

 

 

磻溪書院遺墟碑
嗚呼 此圃隱晦齋寒岡三先生書院遺墟也 奧在 洪武乙卯 圃翁以言事貶玆州嘗嘯詠於磻溪由(流)水之間 郡人以爲程朱所過 不無立祠 崇禎壬辰建院 因以晦寒兩翁配之 盖晦翁有甘棠之憩 寒翁有卜居之意也 中以朝合撤院 而郡人久而不忘 太上辛丑 立石遺墟以志之 謁文於余 余惟此役 豈其郡人之一時徒然哉 盖三先生德敎之感人深 而使後人愈久愈思也 噫 玆州之士 亦將俛焉 講究無負 先生繼啓之功一片石猶足 有感於百世之敎云爾
通訓大夫行彦陽郡守全州崔時嗚謹撰
學金寧金孝東謹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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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磻溪書院遺墟碑(반계서원유허비)
嗚呼(오호) 此圃隱晦齋寒岡三先生書院遺墟也(차포은회재한강삼선생서원유허야) 奧在(오재) 洪武乙卯(홍무을묘) 圃翁以言事貶玆州嘗嘯詠於磻溪由(포옹이언사폄자주상소영어반계유)(流(류))水之間(수지간) 郡人以爲程朱所過(군인이위정주소과) 不無立祠(부무립사) 崇禎壬辰建院(숭정임신건원) 因以晦寒兩翁配之(인이회한량옹배지) 盖晦翁有甘棠之憩(개회옹유감당지게) 寒翁有卜居之意也(한옹유복거지의야) 中以朝合撤院(중이조합철원) 而郡人久而不忘(이군인구이부망) 太上辛丑(태상신축) 立石遺墟以志之(립석유허이지지) 謁文於余(알문어여) 余惟此役(여유차역) 豈其郡人之一時徒然哉(개기군인지일시도연재) 盖三先生德敎之感人深(개삼선생덕교지감인심) 而使後人愈久愈思也(이사후인유구유사야) 噫(희) 玆州之士(자주지사) 亦將(역장)俛焉(언) 講究無負(강구무부) 先生繼啓之功一片石猶足(선생계계지공일편석유족) 有感於百世之敎云爾(유감어백세지교운이)
通訓大夫行彦陽郡守全州崔時嗚謹撰(통훈대부행언양군수전주최시오근찬)     

 

 

 

반고서원유허비(盤皐書院遺墟碑)

유허비란 한 인물의 옛 자취를 밝혀 후세에 알리고자 세우는 비석으로, 이 비는 고려 말 충신 포은 정몽주(1337~1392) 선생의 학덕을 기리고 있다.  포은 선생은 고려 우왕 2년(1376) 성균관 대사성의 벼슬에 있으면서 중국 명나라를 배척하고 원나라와

친하게 지내려는 친원배명 외교정책에 반대하다가 이곳에서 1년가까이 귀양살이를 하였다. 그 동안 반구대에 올라

 "중양절감회"라는 시를 짓는 등 많은 자취를 남겼다. 그 후 지역인들은 선생을 추모하여 반구대를 "포은대"라 명명하기로

하였다.

 

 

 

 

 

학 그림

 

 

 

盤龜와 학 그림

 

 

 

重陽節 感懷(중양절 감회) / 정몽주


節序重陽亦暑消 중양의 절서가 되니 역시 더위는 사라지고

天高馬膩冷霜朝 하늘 높고 말은 살찌나 서리 내린 아침은 차네.


黍禾嚲嚲昇祥旭 곡식은 익어 늘어졌는데 좋은 아침 해 뜨고

鴻雁嗈嗈聽遠霄 기러기 짝지어 우는 소리 멀리서 들리네.

 
國泰民安時絶好 국태민안 하니 때는 더할 나위 없이 좋고

風調雨順歲豊饒 풍조우순 하니 해는 풍년들어 넉넉하네.

 
重陽把酒無量感 중양절에 술잔드니 더없이 좋은 감정이라

擊壤歌呼紫陌遙 도성의 길 멀리서 풍년가 노래 부르도다.

 

 

 

圃隱臺(포은대)와 玉泉仙洞(옥천선동)

고려 말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1337~1392년)가 언양에 유배되었을 때 올랐던 곳으로 `포은대, 라고도 하며

玉泉仙洞(옥천선동) 옥같이 맑은샘 신선이 산다는 산골이란뜻을 새겨 놓았다.

 

 

 

 

 

 

 

 

 

 

 

 

 


부윤(府尹): 조선시대 지방관청인 부(府)의 우두머리.

종2품 외관직(外官職)으로, 지역에 따라 설치시기가 확실하지 않다.
고려시대에는 평양·한양·경주에 설치했으며, 조선이 개국하면서 수도인 한성을 비롯하여
1403년 전주, 1406년 함흥, 1577년 경기도 광주, 1592년 의주 등 모두 6군데에 두었다.
이 가운데 전주·평양·함흥의 부윤은 관찰사가 겸직했고, 광주·경주·의주에는 부윤을 따로 파견했다.
1895년(고종 32) 행정구역개편 때 전국을 23개 부로 나누면서, 우두머리로 부윤을 두기도 했다.
1910년 한일합병 뒤 지방관제를 고칠 때도 부윤은 그대로 두었으며 전국에는 12개의 부윤이 있었다.
대한민국 건국 후 부윤은 특별시장·직할시장·시장 등으로 개칭되었다.

 

 

 

병사(兵使): 조선 시대, 각 지방의 군대를 통솔하고 경비를 담당하던 종이품 무관직(武官職).

 

 

 

 

관찰사(觀察使):  조선 시대, 각 도의 으뜸 벼슬.

그 지방의 경찰권, 사법권, 징세권 따위의 행정에서 절대적인 권한을 가진 종이품(從二品) 벼슬.

 

 

 

 

 

 

 

순상(巡相) : 조선 시대에, 병란(兵亂)이 있을 때 왕명으로 지방의 군무(軍務)를 순찰하던 임시 벼슬.

                 조선 시대에, 도(道) 안의 군무를 순찰하는 일을 맡아보던 벼슬. 각 도의 관찰사가 겸임하였다.

 

유애비(遺愛碑): 송덕비(頌德碑)를 말함.

송덕비(頌德碑): 일명 선정비(善政碑), 유애비(遺愛碑)라고도 한다.

 

 

 

 

 

 

 

 

 

 

 

 

 

 

 

 

 

 

 

 

                                                                                                                                       촬영일: 2013년 3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