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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주 천전리각석(蔚州 川前里刻石)

도랑도랑 2013. 3. 27. 22:52

 

 

울주천전리각석(蔚州川前里刻石)

1973년 5월 4일 국보 제147호로 지정되었다. 1970∼1971년 동국대학교 박물관 조사단이 발굴하였다.

시베리아를 제외한 극동지방에서는 한국에만 유일하게 남아 있는 선사시대의 유적이다.

 

제1암각화는 가로 10m, 세로 3m의 커다란 바위에 상고시대로부터 신라 말기에 이르는 많은 기하학적인 문양과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다. 명문은 김씨 왕권을 수립한 사람들이 이곳을 순례하고 그 기념으로 새긴 것으로 추측되는데, 고관이 행차하는

장면과 기마인물상 등을 단순한 선으로 묘사하고 있다.

 

제2암각화는 북유럽 또는 시베리아 등지의 신석기시대 미술과 직결되는 소위 사냥예술인데 사슴 ·호랑이 ·멧돼지를 비롯하여

고래 ·곰 ·토끼 ·여우 등의 동물들과 사슴을 사냥하는 광경, 고래잡이하는 모습과 기타 동물들 약 150여 점이 새겨져 있다.

이 제2암각화의 기법은 모두떼기[全面彫]와 선조(線彫)를 원초적인 기법으로 하였는데, 신석기시대 말에서 청동기시대 사이에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는 이외에도 울산 반구대 암각화, 고령 양전동 암각화 등이 있다.

 

 

 

각석은 내용상 선사시대 점각기하학적 문양(點刻幾何學的文樣)과 각종 동물상이 새겨진 상부와,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 선각화(線刻畫)와 명문이 있는 하부로 나눌 수 있다.

암질은 적색 셰일이고 크기는 너비 9.5m, 높이 2.7m이다.

상부의 문양은 주로 쪼기(彫琢) 기법을 썼으며 하부는 긋기(線刻) 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것은 제작시대 및 제작집단이 달랐음을 뜻한다.

 

 

 

해마다 이 맘때가되면 시골길을 달리다가 저멀리 낮선 동네 어귀 강가나 늪지대를 이루는 습지근처 축축 늘어진 버드나무나

밑둥이 시커먼 아름드리 고목의 버드나무 꼭대기로 부터 파릇파릇 돋아나오는 새싹이 햇빛을 받을때면 달리던 자동차를 길옆에 세워 두고서라도 가까이 다가서 바라보고만 싶어지는 계절이기도 하다. 3월 23일 토요일 이런 저런 약속처럼 사람이 모이는곳이면 어디든지 자동차로 길이메워지기 마련이다. 그 복잡한곳을 뒤로한채 한적한 길을 달리면서 반구대 암각화 가는길목 늪지의 버드나무 잎이 눈앞에 아른거리는듯 이미 수차례 드나들어본 천전리 각석이나 반구대 암각화를 다시 들러봐도 늦지않을 시간

몇 번째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먼저 천전리각석으로 들어가 보았다.

 

 

 

 

 각석(刻石) 이 있는 강가로 내려서니 아직은 마른풀로 주변의 바위들이 잘드러나 보였다. 몇 번을 와본곳이라 여름엔 풀속에

덮여 잘 보이지 않던 오른쪽으로 눈을 돌렸다. 새로운 모습이 보였다. 바위에 못을박아 실로 표시를 한듯 가까이 다가갈수록 

뚜렷이 그림처럼 나타나던 저 형상 난 속으로 아직 검증되지 않은 또 다른 무엇이 바위 표면에 숨어 있는듯 표시를 해 둔

것으로만 알고 무엇이 있나 자세히 들여다 보아도 별다른 형상이나 문자 같은건 아무것도 없었다. 궁금하기만 했지 ......

 

 

 

 

 

 

게시판으로 활용해도 손색이 없을만큼 넓은 면적의 바위 표면에 정사각형으로 표시해둔 네모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으로

각석 앞으로 가 보았다. 각석은 발견 후 암반 하부에 새겨진 다량의 명문 때문에 서석(書石)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졌다.

각석(刻石): 글자나 무늬 따위를 돌에 새김.  서석(書石): 바위에 글씨가 새겨져 있다는 뜻.

 

서석(書石)은 바위에 글씨가 새겨져 있다는 뜻이다. 반구대를 향해 힘차게 흘러가는 대곡천 기슭의 경사진 바위에는
진흥왕의 아버지 사부지 갈문왕이 525년(법흥왕 12) 음력 6월 18일 이곳을 방문했으며, 그로부터 14년 후인 539년 7월 3일에
또 다시 이곳을 찾았다는 기록이 새겨져 있다고 했다. 바위에는 그 외에도 백 수십 명의 화랑과 낭도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원시인들이 판 수많은 기호와 사람 얼굴 형상 등도 남아 있다.


글자들이 새겨진 바위는 폭 약 10m, 높이 약 3m 크기로, 앞으로 15도 정도 기울어져 있는 자색 혈암(頁巖)이다.
혈암은 돌이 단단하지 않아 글씨나 그림을 새기기에 적당하다는 것이다. 반면 빗물이나 바람에 마모되기도 쉽다.
앞으로 15도 정도 기울어진 천혜의 조건 덕분에 천전리 서석은 아득한 세월을 보내면서도 원시인들의 그림과 신라인들의

글자를 무사히 보존해 왔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상부의 기하학적 문양

상부의 기하학적 문양은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어 있다. 마름모꼴무늬·굽은무늬·둥근무늬·우렁무늬·십자무늬·삼각무늬 등이

홑이나 겹으로, 혹은 상·하·좌·우 연속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들 기하학적 문양은 대개 직선보다 곡선이 많고 상징성을

띠는 것이 많아 명확한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다고 한다.

 

가장 많이 새겨진 것은 마름모꼴무늬로 홑무늬·겹무늬 외에 연속무늬등이 있다. 연속문에는 가로·세로로 겹친 것과 한 무늬

내부에 같은 무늬가 두 겹·세 겹 반복되거나 점이나 빗금이 있는 것도 있다.

굽은무늬에는 가로굽은무늬와 세로굽은무늬가 있다. 원시문양에서 이들은 각기 물결과 뱀을 상징한다. 상부 오른쪽 끝의 열매를 꿴 화살모양의 무늬는 암수의 결합을 의미하는 문양으로 해석되기도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상부의 이와 같은 문양들은 본질적으로 신석기시대 무늬토기의 기하학문양과 연결된다. 표현이 단순, 소박하면서도 명쾌한 무늬토기 문양양식을 이어받아 청동기시대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이들 문양은 곡식이나 음식물 등이 항상

풍요롭기를 바라는 청동기시대인의 기원을 담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는 설명 이기도 하다.


 

 

 

 

 

 

 

하부

석각 하부는 선각화와 명문이 뒤섞여 있다. 대개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대에 걸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선각화는 인물·기마행렬도를 비롯해 환상적인 동물들과 자연계의 동물, 크고 작은 배가 항해하는 모습 등 다양한

내용으로 구성되었다. 명문에는 영랑(永郎)·금랑(金郎)·정광랑(貞光郎) 등 신라 화랑의 명칭을 비롯해 관명·직명·인명 등이

여럿 새겨져 있어 신라사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이용되고 있다고도 한다.

 

 

 

 

 

 

동물상은 대부분 상부 왼편에 있다. 사슴종류가 압도적으로 많고 이름을 알 수 없는 각종 동물과 물고기·새 등이 있다.

사슴은 대개 암수 2마리가 서서 마주보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한 쌍으로 표현된 사슴 중 수사슴은 뿔이 매우 크고 가지가 무성해 순록의 일종을 나타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크기가 작은 사슴들은 신체의 특징이 각기 다르게 표현되어 염소나 말 등 다른 동물로 볼 수 있는 것도 여러 마리 있다.

상부 중심부에는 도안화된 얼굴의 한 인물과 태양을 나타낸 듯한 둥근 문양의 좌우로 4마리의 사슴이 뛰어가는 모습을 새겨

놓았다. 이는 당시의 어떤 종교의식이나 신앙관념과 관련있는 표현으로 보인다.

이들 동물상과 기하학 문양 사이에는 곡식이삭이나 풀뿌리,꽃봉오리를 나타낸 한 문양도 있으나 상징성을 띤 기하학 문양의

변형으로 볼 수도 있다.

 

석각 상부문양 제작집단의 종교신앙과 관련해 주목되는 것은 상부 왼편 끝에 보이는 인두수신상(人頭獸身像)이다.

이 동물상은 부드러운 얼굴을 한 사람의 머리와 사슴을 닮은 몸체가 결합된 모습을 하고 있다.

이것은 선사인이 믿고 숭배하던 신수(神獸)의 하나로 생각되며 반인반수(半人半獸) 관념의 기원과 관련해 중요하게 평가되는

자료이다.

 

그 밖에도 몸체가 긴 2마리의 동물이 교미를 하는 듯 돌아서서 꼬리를 맞댄 채 서있는 모습이 2군데 보인다.

어떤 동물을 나타낸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상부 왼편에는 상어를 나타낸 듯 꼿꼿한 지느러미가 여러 개 있는 물고기 2마리와 주둥이와 비늘까지 표현된 물고기 1마리,

붕어모양의 물고기 1마리가 각기 새겨져 있다.

 

인물상은 뚜렷이 파악되는 것이 모두 7군데이다. 얼굴만 묘사된 것과 전신을 나타낸 것 등 두 종류가 있다.

모두 원시암각화 특유의 극도로 단순화된 표현법을 쓰고 있어 사실성이 약하며, 일면 괴상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얼굴상은 대부분 원시종교의식과 관련된 탈을 연상시킨다. 눈·코·입이 뚜렷이 새겨진 얼굴상 하나는 시베리아 아무르강유역

암벽조각에 새겨진 원시탈과 유사해 흥미를 끈다. 이 지역과의 문화적 연계성, 주민의 이동 가능성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인물·기마행렬도는 3군데 보인다. 이 중 하부 중앙 제2행렬도의 한 기마인물은 눈·코·입을 점으로 찍어 표현하고 얼굴 윤곽을

마름모꼴로 처리한 것이 신라의 토용(土俑)이나 토기선각화 중 인물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얼굴과 흡사해 주목된다.

상부 왼편 제3행렬도의 말은 질주하는 순간의 모습이 간략한 몇 개의 선만으로 잘 표현되어 제작자의 빼어난 표현감각을

잘 드러내고 있다.

 

환상적인 동물로는 용으로 보이는 것이 여러 마리 새겨져 있다. 특히, 하부 오른편 끝에 새겨진 용은 머리를 쳐들고 왼편을 향해 허공을 날아가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몸체의 지느러미와 비늘, S자형으로 휘며 뒤로 뻗은 꼬리부분 등이 세심하게 처리되어

있어 언뜻 고구려 중기 고분벽화의 사신도(四神圖)에 보이는 청룡을 연상시키는 측면도 지니고 있다.

 

자연계의 동물로는 말이 홀로, 혹은 군마(群馬)의 형태로 묘사되었고, 새도 여러 마리 새겨져 있다. 그 밖에 큰 돛을 단 범선과

사람이 노를 젓고 있는 용머리의 배는 당시 신라인의 해상활동과 관련된 중요한 자료이다.

 

명문 중 확인된 글자는 800자가 넘는다. 상부 오른편의 원명(原銘)과 그 왼편의 추명(追銘)이 내용의 중심을 이루고 있고

그 밖에 제명(題銘)이 다량 보인다. 원명이 새겨진 기사년은 신라 법흥왕 12년(525), 추명에 새겨진 기미년은 법흥왕 26년(539)으로 추정된다. 뒤의 추명은 왕과 왕비가 이곳을 찾은 것을 기념해 기록했음을 밝히고 있어 6세기경의 신라사회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명문 중에는 사탁부(沙啄部)라는 부명이 여러 번 언급되어 있다. 이것은 이곳이 신라 6부의 하나인 사탁부인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장소임을 뜻한다. 이곳은 사탁부의 고유 종교의식이 행해지던 성지(聖地)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 밖에도 제명에는 여러 화랑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 당시 많은 화랑이 이곳을 찾아 도량(道場)으로 삼았음을 전해준다.

이들 각석 하부의 명문과 각종 선각화는 신라 6부체제의 발전·변화과정과 내용을 규명해나가는데 주요한 실마리를 제시해주고 있으며, 앞으로 이에 대한 보다 종합적이고 면밀한 검토가 요구된다. (글 네이버지식백과에서 발췌))

 

 

 

 

천전리 각석 앞에서 건너다 보이는 넓은 면적의 평평한 바위 지금이 갈수기(渴水期)라고는 하지만 물이 흘러가는

폭이 그리 넓지는 않지만 깊고 세찬 물줄기 신발 벗고 건너갈수있는곳은 아니었다. 왔던길 되돌아가 그곳으로 가보니......

 

 

 

 

 

 

 

 

 

청색을 띠는듯 단단하고 평평한 바위 표면에 둥글게 움푹 움푹 들어간 곳이 공룡발자국 이란다.

저 물건너 약간 기울어 선듯한 바위엔 선사시대 원시인들이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며 바위에 무언가 새기고 있었다면

그 보다 훨씬 이전에 물건너 이쪽 단단한 바위에는 공룡들이 한가로이 뚜벅 뚜벅 걸어 다녔단 말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그 때 그시절이나 지금 이시절이나 평평한 바위에 풀석 주저앉아 바라보는 물소리와 함께 몸통 미끈한 물개나

돌고래가 뻘줌히 앉아 쉬고 있는듯 매끈하게 잘생긴 덩치 큰 바위 손바닥으로 쓸며 만져 보고도 싶어지지만 물이깊어 가까이

다가갈수가 없을것만 같아 그져 한시름 내려놓고 바라만 보다가 마냥 감상에 잠겨 잇을수만 없어 반구대 암각화 쪽으로

떠나는 길손되어 기약없는 어느날 난 또 저기 저 바위위에 걸터앉아 파란하늘 쳐다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촬영일: 2013년 3월 23일 토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