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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주사암(朱砂庵)과 마당바위(지맥석:持麥石)

도랑도랑 2012. 12. 6. 19:43

朱砂庵(주사암)은 속전에 新羅(신라) 文武王(문무왕) 때 義湘大師(의상대사)가 創建(창건)하였다고 하며,
그 당시에는 朱巖寺(주암사)라 불렀다고 전해온다. 그러나 學界(학계)에서는 神印宗(신인종)과 관계가 깊었던
寺刹(사찰)로 짐작하고 있다. “新曾(신증) 東國與地勝覽(동국여지승람)” 卷之二十一(권지이십일) 慶州府(경주부)
古蹟條(고적조)에는 이 寺刹(사찰)에 관련된 재미있는 逸話(일화)가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주사암(朱砂庵) 입구

 

주사암 창건 설화1

서라벌의 밤이 깊을 때 반월성 대궐에는 모두 잠들고 파수병들만 삼엄하게 지키는 궁녀궁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형체가 보이지 않는 발자국 소리가 나더니 임금이 가장 총애하는 궁녀를 안고 저 산 하늘로 날아갔다가 새벽에

제자리에 뉘어 놓고는 사라졌다. 궁녀는 그날 밤 꿈속에서 서쪽 하늘로 날아 어느 산꼭대기 동굴 속으로 들어갔는데

늙은 중 하나가 있었다.  이 늙은 중은 밤새 자기 곁에 가두어 두었다가 새벽녘에 귀신을 불러

「도로 궁녀궁에 업어다 주고 내일 밤 다시 데려오너라.」라고 말했다. 궁녀는 아침에 깨어나니 꿈이었다.
이 꿈이 매일 밤 계속되어 임금에게 이 사실을 여쭈었더니 대단히 노하여 궁녀에게 일렀다.
「나라 안에 대궐을 희롱하는 놈이 있다니 오늘 저녁을 주사(朱沙)로 굴 바위에 표시를 하여 놓아라.」
이 말을 듣고 궁녀는 그날 밤 주사병을 굴 바위에 던져 붉게 물을 들여 놓았다.
그 이튿날 일금은 군사를 동원하여

하지산(下地山:지금의 오봉산)을 뒤졌더니 오봉산 꼭대기 붉은 자욱이 물든 바위굴 안에 늙은 중이 있었다.
노승을 잡으려는 순간, 노승이 주문을 외우니 잠깐 동안에 수만의 신병(神兵)들이 에워싸고 군사들을 막았다.
날리는 깃발이며 활과 창이 절에 모셔놓은 팔부신중(八部神衆)과 같았다.

부처님이 비호하시는 스님임을 알고 임금은 그 노승을 모셔 국사로 삼았다.

그 후 이 바위 옆에 절을 지어 주사암이라 하였다.

 

 

주사암 창건 설화 2

이야기는 신라 때의 일이라는 것만 알 뿐, 어느 왕 어느 공주에게 일어난 일인지는 분명치가 않다.

이 임금에게는 외동딸이 있었는데 아름답기 그지없는 데다 총명해 금지옥엽의 보살핌 속에 자라나고 있었다.

한데 그 공주는 주사를 늘 쥐고 다니는 버릇이 있었다. 주사란 진사라고도 불리는 광물질로 선홍색을 띠고

다이아몬드 광택이 나는 빛깔 고운 보석이다.

 

 

어느 해 2월 공주는 부왕에게 복회(福會)에 가게 해달라고 간청하고 나섰다.

사실 복회란 민간의 남녀가 자기 소원을 빌며 서로들 모여 줄기는 행사였지 공주같이 지체있는 사람들은

기웃거리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는 터였다. 따라서 부왕이 이를 말리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공주가 기어코 복회에 가야겠다며 떼를 쓰고 나서는 통에 임금도 별수 없이 허락해 줄 수밖에 없었다.

공주는 뛸 듯이 기뻐하며 “아바마마가 나에게 복회에 다녀오라고 허락을 내리셨다. 이제 네가 날 장소로 데려다 죽어야 한다.

알았지”하고 시녀에게 말했다. 공주는 이제 소문만으로 들어왔던 복회의 광경을 그리며 한껏 흥분된 나머지 시녀 앞에서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

 

복회의 절정은 아무래도 초저녁이었다. 공주가 시녀의 손에 이끌려 산중턱의 절에 올라왔을 때 연등의 불빛과 군데군데

피워놓은 횃불에 사방은 대낮같이 밝았다. 참으로 장관이었다. 따뜻한 불빛의 영향도 있겠지만 일상의 찌든 삶은 간데없고

색동옷으로 차려 입은 처녀들과 한껏 멋을 내고 온 사내들의 얼굴에는 행복이 가득 넘쳐흘렀다.

공주는 저도 모르게 그 분위기에 빠져 탑돌이의 무리에 끼어들었고 얼떨결에 한 사내의 손을 꼬옥 쥐었다.

뒤에서 이 모양을 지켜보던 시녀가 “공주님, 공주님.”하며 어쩔 줄 몰라 했으나 그녀는 이미 무리 한가운데로 들어선 뒤였다.

여러 사람 가운데 그녀는 콧날이 우뚝하고 늠름한 기상의 사내의 곁에 다가가 억세고 힘 있는 그의 손을 냉큼 잡았던 것이다.

부르르 떨며 손에 땀이 촉촉이 배는 편은 오히려 사내였다. 공주는 웃음으로 일단 낯설음을 녹이더니 더욱 손을 꼭 쥔 채

신바람이 나서 탑을 돌고 또 돌았다.

 

그렇게 얼마를 돌았을까. 다른 사람들은 다 사라지고 두 사람만이 탑돌이를 계속하고 있었다.

공주는 사내에게 거의 머리를 기댄 채 아직 황홀경에 빠져 있는 듯했다. 그녀를 다그치는 게 내키지는 않았으나

밤이 너무 깊었음을 감지한 사내가 이윽고 “아가씨 이제 우리도 돌아가야 할까 보오.”했다.

그제서야 공주는 정신이 돌아왔다. 황급히 사내의 손을 놓고 돌아서려는 공주의 뒤에서 사내가 덧붙였다.

“어느 집 낭자이신지 알 수 없으나 우리가 만난 것도 삼생의 인연이라 생각하오. 즐거운 만남이었소.

이제 늦었으니 제가 바래다주면 어떻겠소.”했다.

 

공주는 부왕의 노여운 얼굴을 떠올리며 정신없이 산 아래로 내달았다. 그러나 초행인데다 시녀도 이미 돌아간 터라

공주는 길을 잘못 들고 말았다.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점점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그만 허기진 곰의 습격을 받고 말았다.

 

이때 궁에서는 밤이 늦도록 공주가 돌아오지 않자 군사를 풀어 수색에 나서기로 했다.

근처 산을 샅샅이 살펴나가던 군사들은 근방의 굴 앞에서 갈기갈기 찢어진 공주의 옷을 발견했다.

미루어 굴 속의 곰에게 끌려들어간 게 틀림없을 것이니 목숨을 부지하길 바라기는 난망했다.

한편 공주의 행방불명 소식은 탑돌이를 같이 한 사내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그는 상대가 공주였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며 그 공주를 어떻게든 찾아 살려내겠다며 실성한 사람처럼 산으로 내달았다.

곧 곰굴 앞에 당도해 망설이고 있는 사람을 헤집고 굴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 사내가 그 속에서 찾은 거라곤

공주가 늘 지니고 다니던 주사뿐이었다.

 

탑돌이 할 적에 잠깐 그에게 보여주었던 그 현란한 빛의 주사만이 땅에 뒹굴더라며 사내는 눈물지으며 나왔다.

그는 임금 못지않게 공주의 죽음을 애통해한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다. 한때의 그 짧은 인연에 그토록 마음 아파한 까닭은

헤아리기는 어렵다. 한 순간의 인연으로 그치지 않을 둘만의 은밀한 약속이라도 있었는지. 아무튼 그 이후 사내는

공주의 죽음을 비통해하며 식음을 전폐하다가 어디론가 자취를 감춰버렸다.

뒷날 임금은 주사가 떨어진 자리에 절을 짓도록 하는 한편 그 공주가 애지중지하던 주사를 부처님께 바치고

주사암으로 부르게 했다고 한다. (『우리산 옛절』 김장호·김승호 지음)

 

 

신라인의 불국토이자 이상향이었던 경주. 그래서 그곳을 찾아가는 길은 더욱 특별하다.
경주의 산들은 그 산세가 웅장하거나 계곡이 아름답다기보다는 우리나라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모습들이지만

산자락마다 신라 천년의 역사와 설화를 간직한 곳이어서 그 역사의 향기를 더듬으며 한 번쯤 올라볼 만한 산들이 많다.

 

일명 주사산(朱砂山), 부산(富山)이라 불리는 오봉산(五峯山) 역시 천년이 넘는 옛 설화를 찾아 떠나 봄직한 산이다.
그리고 그 오봉산 정상에 옛 설화를 간직한 주사암이 있다.

 

주사암은 신라 문무왕 때 의상 대사가 주암사(朱巖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 절의 내력과 관련된 설화가 전해진다. 그리고 이 설화에 의해서 절 이름이 지금처럼 주사암이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은 부산성을 축성할 때 의상대사는 이 절을 성에 두게 되면 신라는 절대로 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 절은 성벽 바깥에 있게 부산성이 축성되었다.
그러나 그런 예언이 있었어도 신라가 멸명하기까지는 그로부터 수백년이 더 걸렸다.
또한 이 주사암에는 여태까지 죽어나간 사람이 없다고 하여 불사처(不死處)라 이르고 있다.

그 뒤의 연혁은 별로 알려진 것이 없고, 현재 남아 있는 전각과 불상을 볼 때 조선시대 후기에 중건되었을 것으로

추정 한다. 주사암 마당을 지나쳐 50m 정도 더 나서게 되면 이곳 오봉산의 명물인 마당바위 위에 올라앉게 된다.

지맥석(持麥石)이라 불리는 이 마당바위는 산정 위에 우뚝 선 평탄한 반석으로 마치 멍석을 깔아 놓은 듯한 암반으로

신라 김유신이 술을 빚기 위하여 보리를 두고 술을 공급하여 군사들을 대접하던 곳이라 하여 지맥석이 되었다고 전하며

곳곳에 움푹움푹 패여 들어간 자리들은 말발굽의 흔적이라 한다. 깎아지른 절벽 위 마당바위에 서서 바라보고 있자면

한여름엔 짙푸른 녹색의 바다, 가을엔 울긋불긋한 단풍의 향연으로 어지럽고, 안개라도 쌓이는 날엔 진정 속진을 떠난 듯

잠시 산 아래 세상을 잊어버리는 선경에 든다.

 

고려 명종 때 벼슬에 뜻이 없이 고향인 경주에 눌러앉아 159권의 문집을 남긴 김극기가

주사암에 올라 다음과 같이 읊었다고 한다.

 

멀고 먼 구름 끝에 절이 있으니
속진 떠난 경지가 거기 있구나.
새나 날아오를까 굽어 오른 하늘가에
봉수대가 바위 위에 올라앉았네.

 

 

 주사암(朱砂庵): 영산전

팔작지붕에 앞면 3칸, 옆면 2칸의 규모로서 조선시대 후기에 지었으며, 자연석으로 높게 올려 쌓은 석단 위에 세워졌다.

안에는 삼존불상을 비롯하여 16나한상이 봉안되어 있으며, 불화로는 후불탱화와 신중탱화가 있다.

 

삼존불상은 18세기의 양식을 지니고 있다. (출처 : 전통사찰총서 15)

 

 

 

 

숭정기원후오임오중춘

상원대곡거사가 쓴 현판인 모양이다.

 

숭정기원후오임오중춘이란?  무슨뜻일까 하면서 한자를 찾아보니

숭정(崇禎)은 중국 명나라의 마지막 임금인 의종(毅宗)의 연호이며, 1628년부터 1644년까지 사용되었다.

그럼 기원후오임오중춘이라함은 崇禎紀元(1644년)이후 다섯번째 맞이한 임오년이며, 仲春(중춘)의 뜻은

봄이 한창인 때라는 뜻으로 음력 2월을 달리 이르는 말이기도 한것이다.

어느 자료를 찾다가 보니 1642년이 임오년이었다.

육십갑자가 다섯이면 300년 1642년에 300년을 더하면 1942년의 봄이란 계산이 나오는건가?

그럼 지금으로 부터 약70년 전에 쓴 글이란 계산인데 유학사가 지어진 년도와 비슷한 시기가 될것 같은 생각이 든다. 

 

거사(居士)란? 속인(俗人)으로서 불교의 법명(法名)을 가진 사람이나 또는 출가하지 않고 집에서 불도를 수행하는

남자를 이르는 말이다. 상원대곡이란 어느 지방의 지명이거나 동리의 이름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드는데......  

난 참 별걸다 찾아보고 있다.

 

 

 

 

법당 뒤 바위에 붙어 자라는 식물인듯 담쟁이덩굴의 겨울나기 모습인지 궁금해서 봄이면 다시 찾아봐야 하겠다.

 

 

 

 

 

주암사를 지나 마당바위로 가는길 멀리 건너보이는 산등성이들이 시원스럽게 뻗어내려 솓아지는 해살에 뿌옇게 보이고

길 옆에는 오래전엔 사용하던 우물인듯 플라스틱 커버로 덮여져 있었다. 바로 앞으로 마당바위(지맥석)이 건너다 보였다.

 

 

 

 

마당바위로 들어서는 입구엔 드라마 선덕여왕이 의자에 앉아 숨을거두는 마지막 장면을 촬영 했다는 촬영지 간판과 함께

동이의 촬영지익도 했다고 한다.

 

 

 

 

 

 

 

 

오봉산을 다녀오고 몇장의 사진을 정리 하려다 보니 오봉산과 관련한 선덕여왕이나 역사에 얽힌 인물을 배경으로한 재미난

이야기들이 많다. 새로운 풍경에 너무 신이나 있어서 일까 난 왜 부산성을 밟아보지 못하고 흔적을 구경조차 못하고 빠뜨려

버렸는지 모르겠다. 득오가 죽지랑(竹旨郞)을 사모하여 지었다는 노래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의 배경이 되는곳이 저기

보이는 저 밭이란 말인가?  부산성이 지도에 나타난 형상만 봐도 워낙 넓으니까 어디쯤인지 정확하게 아는이는 없을것만 같다.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


去隱春皆理米(거은춘개리미)                                           /  간 봄 그리워함에
毛冬居叱沙哭屋尸以憂音(모동거질사곡옥시이우음)             /  계시지 못해 울면서 시름하는데
阿冬音乃叱好支賜烏隱(아동음내질호지사오은)                   /  두덩을 밝히오신 모습이
皃史年數就音墮支行齊(모사년수취음타지항제)                      /  해가 갈수록 헐어가도다
目煙廻於尸七史伊衣(목연회어시칠사이의)                         /  눈 돌림 없이 저를
逢烏支惡知乎下是(봉오지악지호하시)                               /  만나보기 어찌 이루리
郞也慕理尸心未行乎尸道尸(랑야모리시심미항호시도시)       /  郎이여, 그릴 마음의 모습이 가늘 길
蓬次叱巷中宿尸夜音有叱下是(봉차질항중숙시야음유질하시) /  다북쑥 구렁에서 잘 밤인들 있으리.  

 

제32대 효소왕 대에 죽만랑의 무리에 득오 급간이 있었다. 풍류황권[風流黃卷]에 이름을 올리고서 날마다 출근을 했는데,

열흘 동안[隔旬日] 보이지 않았다. 죽만랑이 그 어미를 불러 물었다.  “당신 아들이 어디에 있소?”
“당전 모량부 익선 아간이 내 아들을 부산성 창직으로 임명하였습니다. 달려가는 것이 급한지라 랑에게 알릴 겨를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죽만랑이 말했다. “그대의 아들이 만약 개인적인 일로 그곳에 갔다면 찾아갈 수 없지만,

지금은 공사로 갔으니, 가서 위로나 해주어야겠소.”  그리고 설병 한 홉과 술 한 항아리를 가지고, 노복을 거느리고

(그를 찾아) 갔다. 낭도 137명도 예의를 갖추고 따라 갔다.


부산성에 이르러 문지기에게 “득오실이 어디에 있소?”라고 물었다. 그 사람이 대답했다.
“지금 익선의 밭에서 예에 따라 부역을 하고 있습니다.”

죽만랑이 밭으로 가서 가지고 간 술과 떡을 먹이고, 익선에게 휴가 주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익선은 고집스럽게 금하며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에 사리 간진이 추화군 능절의 조 30석을 걷어 성중으로

수송하다가, 죽만랑이 선비를 소중히 여기는 풍미를 아름답게 여기고, 익선의 답답하게[暗塞] 통하지 않는 것을

더럽게 여겼다. 그리하여 수송하던 30석을 익선에게 주어 (죽만랑의) 청이 받아들어지길 거들었으나,

외려 (익선은) 허락하지 않았다. 또한 진절 사지의 말안장을 그에게 주니, 그제야 허락했다.

조정의 화주가 그것을 듣고 사신을 보내 익선을 불러 들여, 그 더럽고 추한 것을 씻어주고자 했다.

 

(그러자) 익선은 도망가 숨어 버렸는데, 그 큰아들을 잡아왔다. 때는 한 겨울 극한의 날이었는데, 성안의 연못에서

(그 아들을) 목욕시키니 얼어 죽어 버렸다. 대왕께서 그것을 들으시고, 모량부 사람으로 관리가 된 사람은 모두 쫓아내어

다시 공관서에 나올 수 없도록 하고, 승려가 되지도 못하게 했으며, 만약 승려가 되었더라도 절에는 들어가지 못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칙사가 간간의 자손을 올려 평정호손으로 삼아, 표창하였다. 이때에 원측 법사는 해동의 고승이었는데,

모량부 사람인 까닭으로 승직을 내리지 않았다.

 

처음에 술종공이 삭주도독사가 되어 임지에 가려하였다. 이때는 삼한의 병란이 있었으므로, 기병 3000명으로 호송하였다.

죽지령에 이르자 한 거사가 그 고갯길을 평평하게 닦고 있었다. 공이 그걸 보고서 칭찬하자, 거사는 또한 공의 위세가

매우 빛남을 좋게 여겨, 서로 마음으로 감동하였다. 술종공이 삭주에 부임한 지 한 달이 지나, 꿈에 거사가 방중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는데, 부인도 같은 꿈을 꾸었다. 놀라고 괴이한 것이 더욱 심하여 다음날 사람을 보내 거사의 안부를

물었다. 그곳 사람이 말하길 “거사는 죽은 지 여러 날이 되었습니다.”고 했다. 심부름 간 사람이 돌아와 그가 죽었음을 아뢰니,

꿈꾼 날과 같은 날이었다.


공이 말했다.
“아마도 거사가 우리 집에 태어난 모양이오.”

다시 군사를 보내어 죽지령 위 북쪽 봉우리에 후하게 장사를 지내고, 돌 미륵불을 하나를 만들어 무덤 앞에 안치하게 했다.

강씨가 꿈 꾼 날로부터 태기가 있어 자식을 낳으니 인하여 죽지라고 이름 하였다.
(죽지랑)은 커서 벼슬에 나가니 유신공을 따라 부수가 되어 삼한을 통일하였으며, 진덕ㆍ태종ㆍ문무ㆍ신문왕 사대에 걸쳐

재상이 되어 나라를 안정시켰다. 처음에(언젠가) 득오곡이 죽지랑을 사모하여 노래를 지었다.

 

 

 

 

 

 

                                                                                                                                                   촬영일: 2012년 11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