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자연이 공존하는 거창 수승대(居昌搜勝臺)
소재지: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 890
2008년 12월 26일 명승 제53호로 지정되었다.
영남 제일의 동천(洞天: 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으로 알려진 ‘안의삼동(安義三洞)’ 중 하나인 원학동 계곡 한가운데 있는
널따란 화강암 암반으로, 깊은 계곡과 숲이 어우러져 탁월한 자연경관을 이룬다.
신라와 백제의 국경지였던 이곳은 신라로 가는 백제 사신들을 수심에 차서 송별하는 곳이라는 뜻으로 '수송대(愁送臺)'라 불렸다.
퇴계 이황이 이곳의 풍경을 예찬하는 시를 한 수 읊은 뒤부터 수승대(搜勝臺)로 그 이름이 바뀌었다고 전한다.
이와 관련하여 이황의 개명시와 갈천 임훈(林薰)의 화답시가 전한다. 가까이에 거창의 대표적인 정자 요수정(樂水亭)과, 구연서원의
문루격인 관수루(觀水樓), 그리고 거북 형상의 돌출된 바위가 잘 남아 있어 경관이 좋기로 이름나 있다. 거창군이 관리한다.
거북바위
수승대의 명물 거북바위는 바위가 계곡 중간에 떠있는 모습이 거북처럼 보인다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세월의 아픔을
견뎌낸 소나무들이 바위 곳곳에 자라고 있어, 마치 평지같은 인상을 준다. 바위둘레는 이황이 수승대라 이름지을 것을
권한 4율시를 비롯하여, 옛풍류가들의 시들로 가득차있다.
2012년 11월 17일 고향 친구 치순이 대구의 한 예식장에서 아들 장가 보내는 날이었다.
오랫만에 멀리 살고있는 친구들 모습도 볼 수 있는 기쁘고 반가운 날이기도 했다.
오랫만에 만난 반가운 얼굴들 짧은 겨울 해 어느덧 지고 쌀쌀해지기만 했던 날 밤 늦은 시간까지
친구 두명과 함께 술 잔을 기울이던 날 예식장에서 아들 자취방 정리 해 주고 다음 날인 일요일 방안청소 밀린 빨래
모조리 깔끔하게 정리되어야 집에 올 수 있는 상황 난 방안에 있어봐야 귀찮은 존재(?) 사진 찍으러 가던지 어딜 가던지
혼자 한바퀴 돌아오라는 엄명(?) 흐흐 ~ 잘 된 일이었지
가을이 무르익어갈 무렵 시월의 어느날 난 이미 그 때 이 수승대를 한번 가 볼 것이라고 네비게이션에서 검색을 하고
길 안내를 받았다. 처음부터 나타나던 도착시간 소요시간엔 왜 의심하지 않았을까?
포항에서 거창을 가려면 경부고속 도로나 포항 대구 고속도로를 이용 대구에서 광주방향 88올림픽 고속도를 이용해야
한다는걸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경부고속도로 부산방향으로 내려가면서도 양산에서 어느 식당 앞 목적지 주변에 도착
했습니다. 라는 똑똑한 아가씨의 안내 음성을 듣고서야 아무런 생각없이 네비게이션 검색창 맨 위의 주소지를 확인 하지않고
확인을 눌러 버렸던것 지금까지 살아 오면서 가장 바보 스럽고 멍청한 실수를 범해 버렸던 날이 아니었나 생각 하면서
2012년 11월 18일 대구 수성구에서 오전 10시경 이 수승대를 한번 가 볼까 하면서 시동을 켠 채 20여분을 생각 하다가
실행에 옮겨 봤던 날 소요시간 1시간 30분으로 나타나던 거리는 실제 도로상황의 악 조건으로 2시간이 걸려서 도착을 하고
하나 하나 입구에서 부터 구경을 하게 되었는데 바위 주변에서 무려 2시간이상 어정 거리고 있었으니 내가 어딜 가자면
어느 누가 날 따라 나서겠는가? 눈 아프게 스마트폰 펼쳐들고 빠짐없이 찾아 보려던 명승지 그래도 한 두곳 빠뜨리고 오게
되었으니 하루 해가 긴 어느 봄 날에 다시 한 번 꼭 가보고 싶은 곳인 것이다.
현수교
송림
거창구연서원관수루 (居昌龜淵書院觀水樓)
관수루는 서원의 문루로 1740년 창건되었으며 자연암반을 활용하고 틀어진 재목을 하부기둥으로 사용하는 등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그 형태 또한 대단히 아름답다고 할 수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중층 누각 건물로
암반 사이에 조성된 가ㄷ기단 위에 자연석의 초석을 놓고 기둥을 세웠으며, 기둥은 모두 원기둥을 사용하였고
기둥 바깥쪽의 네 모퉁이에는 적절하게 높이를 조절한 활주를 세운 형태로 누하부 정면에 출입을 위한 문을 달았으며
나머지 공간은 모두 개방한 상태로 보였다. 상층의 바닥에는 우물마루를 깔았고 주변으로 계자난간을 둘렀다.
계자난간(鷄子欄干) : 계자각을 세운 난간.
'계자각'을 줄여서 '계자'라 한 것. 각(脚) : 다리 각
닭다리 모양의 난간 기둥을 ‘계자각 난간’, '계자난간'이라고 합니다.
계자각(鷄子脚) : 한옥의 누마루나 대청 난간 중간 중간에 풀 무늬를 새겨서 세운 가늘고 짧은 동자기둥.
계자난간(鷄子欄干) : 계자각을 세운 난간.
'계자각'을 줄여서 '계자'라 한 것이다.
판상시문(板狀詩文) 해석판
관수루 정자 안에는 루 내부에 걸려 있는 시를 해설한 판상시문 해석판이란 안내판이 세워져 있기도 했다.판상시문 : 판상(板狀): 널빤지처럼 생긴 모양.
시문(詩文): 시가와 산문을 아울러 이르는 말.
구연사(龜淵祠)
구연서원 뒤쪽에 위치하고 있는 요수, 석곡, 황고선생 세 분의 위패를 모셔 놓은 사당이다.
구연서원(龜淵書院)
1694년(숙종 20) 시대에 건립된 구연서원은 요수(樂水) 신권(愼 權)선생, 석곡(石谷) 성팽년(成 彭年)선생,
황고(黃皐) 신수이선생을 제향하고 있다는데 서원 뜰에는 산고수장(山高水長)이라 새겨진 비가 있다.
"山高水長" 요수 선생의 학문과 덕이 산처럼 높고 물처럼 영원하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구연서원(龜淵書院)의 앞뜰에는 관수루(觀水樓)가 있는데 서원의 남문이며, 그 주위에는 청송(聽松), 야천(夜川)선생의
사적비와 열부 효자의 비각 등이 있으며 수승대 건너편에는 요수정(樂水亭)이 있다. 요수 신권선생이 이 학문과 덕을
쌓으면서 노닐던 곳이라고 전한다.
산고수장비(山高水長碑)와 유적비
관수루를 지나고 드넓게 펼쳐진 구연서원(淵書院觀) 안 마당으로 들어가면 오른쪽에 비석 3개가 나란히 서있었다.
산고수장(山高水長) 이라고 새겨놓은 우뚝 솟은 커다란 비석은 요수 신권(樂水 愼權)선생의 공적비라는데 요수선생의 학문과
덕이 산처럼 높고 물처럼 영원하다는 뜻을 담고 있는듯 하다고 했다. 가운데는 석곡 성팽년(石谷 成彭年), 그 오른쪽은
황고 신수이(黃皐 愼守彛)선생의 공적비라고도 한다. 세분의 학자들은 평생 벼슬길에 오르지 않고 제자들을 양성했는데
문하에서 두 정승과 일곱 명의 판서가 나왔으며, 비석도 그 문하생들이 스승을 존경하여 세운 것이라고 한다.
구연서원을 지나 거북바위 앞 길 옆에는 효녀나 열녀의 비를 세워 놓은듯 효열각이라 적힌 비석도 있고
또 다른 碑閣 안에는 비석은 보이지 않았고 길게 옆으로 판자에 쓰여진 글씨가 걸려있는 모습이었다.
碑閣: 비(碑)를 비바람으로 부터 보호하기 위해 세운 집
구연서원으로 들어가기위해 관수루 앞에 세워져 있던 안내판의 설명문을 읽어봤다.
관수란 맹자의 '물을 보는데 방법이 있으니, 반드시 그 물의 흐름을 봐야 한다.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다음으로
흐르지 않는다' 고 한 말을 인용한 것으로 군자의 학문은 이와 같아야 한다는 뜻으로 이름 지어졌다고 했다.
멀리서 바라다 보았을 때 거북처럼 생긴 형상이 궁금했고 가까이 다가 섰을 땐 바위에 새겨진 수많은 글씨들이 궁금했고
물이 가득차있는 상황이라 거리를 두고 바라 볼 수 밖에 없는 상황 이었지만 언제 부터인지 난 바위에 새겨진 글씨들을 볼
때에는 그 뜻과 함께 어느 시대에 누가 무슨 이유로 썼는지가 참 궁금해질 뿐이다.
그런 생각이 들 때에는 어김없이 사진으로 가지고와서는 관련 자료들을 검색해 보면서 그 시대에 내가 태어났다면 저 시대에
내가 살았다면 역사속에 이름 석 자라도 후세에 남겨져 있을 것이었다고 나도 저 바위처럼 이름난 명승지에 몇 줄의 시문을
남겼을 것이라는 엉뚱한 생각 그리고 착각속에서 아무런 지식도 갖추지 못한채 오늘도 또 다른 명승지를 찾아나설 꿈을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듬어진 바위에 빼곡히 새겨진 한자들을 보면서 늘 저 바위면을 어떻게 매끈하게 다듬었을까? 여러명의 기능을 갗춘이들이
했을 것 같지는 않고 혼자서 저렇게 다듬고 글씨를 새겨파는데 기간은 얼마나 걸렸을까 하는 생각들이 줄 곧 머릿속을
어지럽힐때도 있다. 또 한가지는 대부분이 사람의 이름들 새겨진것 같고 특별히 관심이 쏠리고 넒은 판 모양으로 다듬어진 곳에
길게 많은 글자가 새겨진것이 유명한 선비나 학자들의 글귀가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자료를 찾아보았더니 잘 정리 되어진
한 곳의 블로그에서 내용을 읽어 볼 수가 있었다.
수승대관리사무소 홈페이지에서는 수승대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수승대는 삼국시대 때 백제와 신라가 대립할 무렵 백제에서 신라로 가는 사신을 전별하든 곳으로 처음에는 돌아오지
못할 것을 근심하였다 해서 근심 수(愁), 보낼 송(送)자를 써서 수송대(愁送臺)라 하였다.
수송대라 함은 속세의 근심 걱정을 잊을 만큼 승경이 빼어난 곳이란 뜻으로 불교의 이름에 비유되기도 한다.
그 후 조선 중종 때 요수신권(樂水 愼權)선생이 은거하면서 구연서당(龜淵書堂)을 이곳에 건립하고 제자들을 양성하였고
대의 모양이 거북과 같다하여 암구대(岩龜臺)라 하고 경내를 구연동(龜淵洞)이라 하였다.
지금의 이름은 1543년에 퇴계 이황(退溪 李滉)선생이 안의현 삼동을 유람차 왔다가 마리면 영승리에 머물던 중 그 내력을
듣고 급한 정무로 환정하면서 이곳에 오지는 못하고 이름이 아름답지 못하다며 음이 같은 수승대(搜勝臺)라 고칠 것을
권하는 사율시(四律詩)를 보내니 요수 신권선생이 대의 면에다 새김에서 비롯되었다.
경내에는 구연서원(龜淵書院) 사우(祠宇) 내삼문(內三門) 관수루(觀水樓) 전사청(典祠廳) 요수정(樂水亭) 함양제(涵養齊)
정려(旌閭) 산고수장비(山高水長碑)와 유적비(遺蹟碑) 암구대(岩龜臺) 등이 있는데 이는 유림과 거창신씨 요수종중에서
공동 관리하고 있으며, 솔숲과 물과 바위가 어울려 경치가 빼어나고 또한 자고암과 주변에는 고란초를 비롯한 희귀식물들이
자생하고 있다.
붉은 글씨로 새겨진 부분의 수송대(愁送臺)와 수승대(搜勝臺)라는 글씨와 오른쪽 세로로
'퇴계명명지대(退溪命名之臺)라는
글씨가 있고 옆에는 퇴계선생이 보내준 5언절구 시가 새겨져 있다.
수승으로 이름을 새로바꾸니 (搜勝名新換 : 수승명신환)
봄을 만난 경치가 더욱 아름답구나 (逢春景益佳 : 봉춘경익가)
먼 숲 꽃들이 피어나려하고 (遠林花慾動 : 원림화욕동)
응달의 눈은 녹으려 하는데 (陰壑雪猶埋 : 음학설유매)
스승대를 찾아 구경하지 못했으니 (未遇搜尋眼 : 미우수심안)
속으로 상상만 늘어 가누나 (惟增想像懷 : 유증상상회)
뒷날 한 동이 술을 마련하여 (他年一樽酒 : 타년일준주)
커다란 붓으로 벼랑에 시를 쓰리라 (巨筆寫丹崖 : 거필사단애)
왼쪽에는 '갈천장구지대(葛川杖廐 之臺)'가 새겨져 있는데,
퇴계(退溪)의 제의를 완곡하게 거절하는 뜻을 담은 갈천(葛川)의 시는
수승대 동천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과 이별의 아쉬움을 자연의 변천에 비유하여
아름다운 슬픔으로 승화시킨 경지를 느끼게 한다.
꽃은 강언덕에 가득하고 술은 술통에 가득, (花滿江阜酒滿樽 : 화만강부주만준)
벗과 놀자고 옷깃을 이끌어도 분분히 뿌리치네, (遊人連決漫紛紛 : 유인연결만분분)
봄은 곧 끝나려하고 자네마저 떠나려 하니, (春將暮處君將去 :춘장모처군장거)
홀로 봄을 탄식하는 것은 그대 보내는 시름만은 아닐세, (不獨愁春愁送君 : 불독수춘수송군)
수승대 어느 부분에 새겨진 내용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수승대에 얽힌 시를 해석한 내용을 찾아 볼 수는 있었다.
퇴계 이황(退溪 李滉,1501-1570)선생이 44세 때 마리면 영승에 우거하고 있는 장인 권질(權質)공의
회갑을 축하하기 위해 왔다가 1월 7일날 돌아가기전에 시를 지어 보냈다는 내용.
搜勝臺(수승대)
搜勝名新換(수승명신환) 수승으로 이름을 새로 바꾸니
逢春景益佳(봉춘경익가) 봄을 만난 경치 더욱 아름답겠네
遠林花欲動(원림화욕동) 멀리 숲 속 꽃들은 피어나려 하고
陰壑雪猶埋(음학설유매) 응달의 눈은 녹으려 하는데
未寓搜尋眼(미우수심안) 수승을 찾아 구경하지 못했으니
惟增想像懷(유증상상회) 속으로 상상만 늘어 가누나
他年一樽酒(타년일준주) 뒷날 한 동이 술을 마련하여
巨筆寫雲崖(거필사운애) 커다란 붓으로 구름(단애) 벼랑에 쓰리라
갈천 임훈(葛川 林薰, 1500-1584). 석천공(득번)의 아들. 호는 自怡堂. 6賢
解愁送意以示諸君(해수송의이시제군)
花滿江皐酒滿樽(화만강고주만준) 꽃은 강 언덕에 가득하고 술은 동이에 가득한데
遊人連袂?紛紛(유인연몌만분분) 상춘객은 소매를 이어 분분히 오도다.
春將暮處君將去(춘장모처군장거) 봄이 저물어 가는 곳에 그대도 가려하니
不獨愁春愁送君(불독수춘수송군) 봄보다 그대 보냄을 더 근심하노라.
석곡 성팽년(石谷 成彭年, 1540-1594). 원학동.
搜勝臺(수승대)
華仗春俱至(화장춘구지) 봄이 오면 꽃이 일시에 피어나니
龍門節正佳(용문절정가) 용문의 봄은 참으로 아름답구나.
溪肥磯半沒(계비기반몰) 시냇물 부러 바위가 반쯤 잠기고
山黑雨全埋(산흑우전매) 산은 컴컴하게 먹구름이 덮고 있네.
石帶詩仙字(석대시선자) 바위엔 시와 신선 이름 빼곡이 새겨 있고
盃寬野客懷(배관야객회) 술잔은 나그네의 소회를 넉넉하게 하네.
莫愁雲日暝(막수운일명) 구름이 날마다 덮이는 것 걱정하지 말게
餘照在層崖(여조재층애) 남은 햇빛이 층층의 벼랑에 비추고 있으니
또 하나 바위에 새겨진 한자의 대부분이 사람의 이름으로 보이나 신씨와 임씨의 성이
눈에 뜨인다는 점에서 내력을 살펴 보았더니 여기엔 또 기막힌 사연들이 숨어 있는듯 하다.
수승대(搜勝臺) 사연
삼국시대 백제가 멸망할 무렵, 백제와 신라의 국경지대인 이 곳에서 백제의 사신을 송별하고 돌아오지 못함을 슬퍼했다고 해서
수송대(愁送臺)로 불렸고, 모양이 거북과 같다고 하여 요수 신권선생이 암구대(岩龜臺)라고 이름을 짓기도 했으며,
수많은 현인들이 찾아오는 곳이라고 해서 모현대(慕賢臺)라고도 불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1543년 수승대 인근에 있는 처가집으로 설을 보내러 온 퇴계 이황이, 주변 풍경은 아름다운데 이름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여
수승대(搜勝臺)로 이름을 바꿀것을 제안 했다는데, 요수선생은 반겼다고 하며, 윗마을에 갈천 임훈이란 사람이 살았는데
그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아 했다고 한다. 이리저리 요수선생과 갈천선생은 사이가 평탄하지만은 않았는듯 두 집안이
그런 일이 있고 난 후로는 오랫동안 이 수승대 소유권을 놓고 싸움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1928년 1월 4일자 동아일보에 '수승대쟁탈전'이라는 기사까지 났었다고 하는데 거북바위엔 수승대로 이름을 바꾸자는 퇴계
이황의 시가 새겨져 있고, 그 옆에는 요수선생의 시가 아닌 갈천선생의 시가 나란히 새겨져 있다고 한다.
갈천의 시를 보고 못 마땅해한 신씨집안에서는, 이 곳이 요수선생이 수양한 곳이라는 '요수신선생장수동(樂水慎先生藏修洞)'
라는 글씨를 새기게 되었고, 이에 질새라 임씨집안에서는, 이 곳이 갈천이 노닐던 장소라는 '갈천장구지소(葛川杖屨之所)라는
글씨를 새기게 되었으며, 그 이후로, 신씨 집안에서는 문중사람들 이름을 바위에 새기게 되고, 임씨 집안도 따라 새기게
되었다는것. 그러다보니 신씨 집안과 임씨 집안의 이름으로 도배가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엔 두 집안에서 거북바위에 대한 수 십년에 걸친 소유권 소송을 진행하기에 이르게 되었는데, 많은 집안 사람들이
재산을 탕진하게 되고, 죽는 사람까지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이 곳은 바위일 뿐 누구의 소유가 아니다' 라는 판결이
나온 후에서야 비로소 잠잠해 졌다는 사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수승대 거북바위에 새겨진 글씨엔 말이없고 적지않게 흐르는
물이 맑고 깨끗하기만 했다.
수승대 주차장에 도착 했을때가 12시 10분 경 이었는데 겨울해는 짧기도 하다.
주변을 서성 거린지도 2시간 정도 지났을 뿐인데 어느덧 강건너 요수정은 그림자에 가려지고 있었다.
댓바위 앞의 휘몰아 도는 물굽이를 굽어보고 서있는 정자가 하나 있는데, 이름하여 요수정(樂水亭)이라 한다.
이곳은 요수 신권(愼權)이 제자들에게 강학하던 곳으로서 댓바위와 그 앞으로 흐르는 물, 그리고 정자 뒷편의
울창한 소나무 숲과 조화되어 이곳의 경관을 절경으로 만들고 있다.
촬영일: 2012년 11월 18일
'그룹명 > 풍경사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봉산(五峰山) 여근곡(女根谷) (0) | 2012.12.05 |
---|---|
문화유산 여행지 수승대(搜勝臺) (0) | 2012.12.01 |
四溟大師 護國聖地 表忠寺 2 (0) | 2012.11.30 |
四溟大師 護國聖地 表忠寺 (0) | 2012.11.30 |
신라충신 박제상과 장사 벌지지(長沙 伐知旨) (0) | 2012.11.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