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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장항리 사지(慶州 獐項里 寺址)와 능지탑지,구황리삼층석탑

도랑도랑 2012. 12. 14. 19:53

 

경주장항리사지(慶州獐項里寺址)


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 장항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절터.

1963년 01월 21일 사적 제45호로 지정 되었으며 지정면적 3,580㎡, 석굴암이 있는 토함산(吐含山)에서

동쪽으로 오솔길을 따라 내려가면 좌우에 계곡을 끼고 있는 낮은 대지에 있다.

이 계곡은 감은사(感恩寺) 앞을 지나 동해로 흘러들어가는 대종천(大鍾川)의 상류이다.

 

이곳에 있었던 사찰의 이름을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동리의 이름인

장항리를 따서 장항리사지라고 불러오고 있다. 그러나 원래 장항사(獐項寺)라는

절이 있었기 때문에 동리 이름이 장항리로 되었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절터는 계곡의 비교적 높은 벼랑 위에 있고 오층석탑인 서탑과 파괴된 동탑,

그리고 석조불대좌(石造佛臺座)가 남아 있다. 현재 땅 위에 드러나 있는 건물터는

불상을 모셨던 금당(金堂) 자리로 여겨지며, 석조불대좌는 이 건물터의 중앙에 마련되어 있다.

 

 

건물의 기단 규모는 동서 15.8m, 남북 12.7m로 평면 약 200㎡이며,

그 속에 남아 있는 초석(礎石)을 볼 때 정면과 측면이 각각 3칸으로 된

그다지 크지 않은 규모의 금당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석조불대좌는 상하 각기 다른 돌로 만들어졌는데, 하부는 측면의 안상(眼象) 속에 신장(神將)과

신수(神獸)를 조각한 팔각형으로 되어 있고, 상부는 연꽃을 조각한 원형 연화대좌(蓮花臺座)이다.

크기는 하부의 높이 0.6m, 최대너비 2.4m이며, 상부는 높이 0.53m, 지름 1.84m이다.

 

서탑인 오층석탑은 금당터에서 서남 방향으로 약 15m 거리를 두고 있으며,

동탑은 계곡에 붕괴된 상태로 흩어져 있던 것을 수습하여 금당터와 서탑 사이에

부재를 모아두고 있다. 서탑은 1925년 도굴범이 탑 속에 있는 사리장치(舍利藏置)를 탈취하기 위하여

폭파한 것을 1932년 복원, 보수함으로써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세워졌다.

 

탑은 이중의 기단 위에 통일신라 양식의 전형적인 특징을 갖추고 있으며 높이는 약 10m이다.

현재 파괴되어 있는 동탑도 남아 있는 부재로 미루어 보아 서탑과 규모가 같은 5층탑으로 여겨진다.

 

이 절터의 금당자리에 있는 불대좌 위에 놓여 있던 석조불상은, 1932년 서탑을 복원할 때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져 현재 박물관의 북쪽 뜰에 전시되어 있다. 불상은 여러 조각으로

파손되었던 것을 복원하였으나, 뒷부분의 광배(光背) 일부와 무릎 이하는 결실되었다.

머리와 얼굴모습 그리고 광배에 새겨져 있는 화불(化佛) 등의 새긴 수법을 볼 때

8세기경에 만들어진 여래입상(如來立像)으로 판단되며, 현존 높이 3m이나 실제로는 4m 이상 되는

큰 불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계곡 속의 좁은 면적을 최대한 이용하여 쌍탑(雙塔)을 배치한

통일신라시대의 가람양식(伽藍樣式)을 보이고 있으나, 강당(講堂)이나 회랑(廻廊)의 존재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참고문헌 : 文化財大觀-史蹟篇-(文化財管理局, 1968)

 

 

 

 

 

 

 

월성장항리사지서오층석탑(月城獐項里寺址西五層石塔)
1987년 3월 9일 문화재 지정 국보 제236호

 

 

금당지에서 오른쪽인 남쪽으로 약 15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서탑은 붕괴된 것을 1932년에 재건하여놓은 탑으로,

4층과 5층 옥개석이 약간 깨어지고 상륜(相輪) 일부만이 없어졌을 뿐 거의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상·하 2층 기단 위에 5층으로 이루어진 이 탑의 기단부(基壇部)는 상·하층에 각각 2개씩의 우주(隅柱 : 모서리기둥)와

탱주(撑柱 : 받침기둥)가 모각(模刻)되어 있으며, 하층기단 갑석(甲石) 윗면에는 모굴림과 각형(角形)의 2단굄을 마련하여

상층기단을 받게 하고, 상층기단 윗면에는 2단의 각형 굄을 설정하여 탑신부를 떠받게 하고 있다.

 

1층과 2층 이상 탑신의 체감률이 심한 탑신부는 각 1매씩의 돌로 조성되었는데, 2층부터 5층까지의 각 탑신에는

우주만이 2개씩 새겨져 있고, 1층 탑신 각 면에는 중앙에 문비(門扉)와 자물쇠, 사자머리장식 문고리가 새겨져 있으며,

그 좌우로는 우주와 함께 2구씩의 인왕상(仁王像)이 돋을새김되어 있다.

 

벗은 상체에 무릎 위까지 오는 짧은 군의(裙衣:치마)를 입은 인왕상은 떡 벌어진 어깨와 버티고 서 있는

다리의 근육으로 당당하면서도 활기찬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이것은 부라린 눈과 큼직한 코, 듬직한 입, 강인한 턱과

불거진 광대뼈 등과 함께 인왕상으로서의 형태를 아주 잘 나타내주고 있다.

 

그리고 발 아래의 연꽃대좌 또한 긴장되고 활력이 넘치며 양감(量感)이 풍부한 묘사를 하고 있다.

층급받침이 5단인 옥개석은 낙수면(落水面)이 평박(平薄)하고 네 모서리 전각(轉角)의 반전(反轉)이 뚜렷하여

경쾌한 맛을 풍겨주며, 상륜부(相輪部)는 노반(露盤 : 탑의 최상부 옥개석 위에 놓아 복발·앙화·상륜 등을 받치는 장식)만이

남아 있을 뿐 다른 부분은 모두 없어졌다.

 

 

 

장항리사지(獐項里寺址) 동탑

 

통일신라시대의 절터인 장항리사지(獐項里寺址)에는 현재 동, 서 쌍탑이 나란히 서 있다.

이 2기의 탑 중 십수년 전에 계곡에 흩어져 있던 것을 수습하여 금당지(金堂址)와 서탑 사이에 쌓아 놓은 동탑은
초층 탑신과 5층까지의 옥개석(屋蓋石)만이 남아 있고 계곡에 흩어져 있던 것들을 절터에 모아두고 있다.

 

 

 

 

금당으로 보이는 건물터에 있는 석조불대좌는 2단으로 되어 있는데, 아랫단은 팔각형으로
조각이 새겨져 있고 윗단은 연꽃을 조각한 원형대좌이다. 이 대좌 위에 모셔졌던 것으로 보이는
석조불상은 여러 조각으로 파괴된 것을 복원하였으며 현재는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다.

 

 

 

 

 

 

 

석조불대좌

 

 

 

국보 제236호 장항리사지서오층석탑(獐項里寺址西五層石塔)의 옥개석(屋蓋石)

금당지에서 오른쪽인 남쪽으로 약 15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서탑은 붕괴된 것을 1932년에 재건하여놓은 탑으로,

4층과 5층 옥개석이 약간 깨어지고 상륜(相輪) 일부만이 없어졌을 뿐 거의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다음은 정면에서 좌측방향(시계방향)으로 돌아가면서 동탑 1층 탑신 각 면에 새겨져있는 인왕상등을 담아봤다.

 

 

 

 

 

 

정면을 남쪽으로보고 서쪽면(위에서아래로 두 번째)의 좌측부분은 파손된 상태이며 북쪽과 동쪽(세번째 네번째)면은

마모가 심한 상태로 보이기도 했다. 서오층석탑을 보면 2층부터 5층까지의 각 탑신에는 우주만이 2개씩 새겨져 있고,

1층 탑신 각 면에는 중앙에 문비(門扉)와 자물쇠, 사자머리장식 문고리가 새겨져 있으며, 그 좌우로는 우주와 함께 2구씩의

인왕상(仁王像)이 돋을새김되어 있다.

 

 

 

몇 해전 감포에서 불국사 방향 이길을 오르면서 우측 계곡에 탑이보이던 적이 있었다.

건너가 보고 싶었지만 건너가는 길이 멀게만 보여서 늘 궁금해 하기만 했었다.

12월 1일 아침부터 흐리던 날씨가 비가 오락가락 하던 날 하루 전 담근 김장김치 한통을 가져다 주면서

나선걸음에 한 번 올라가 보기로 했더니 개울을 건너자 마자 비가 오락 가락 하면서 사진 찍기엔 불편한 날이었다.

오천을 지날무렵 제법 하얗게 눈발이 날리기도 했던 날 그것이 첫 눈 이었는지도 모른다.

 

                                                                                                              촬영일: 2012년 12월 1일 토요일 오후

 

장항사지를 처음 들러보고 토함산 방향으로 오를땐 제법 하얗게 눈보라가 날리기도 했다.

여태껏 경주 울산간 국도 주변에 많은 문화유적들이 산재해 있다는 사실을 최근에 알게 되면서

귀가길 내친김에 길 옆 가까이에 있는 두서너곳을 더 둘러보게 되었다.

 

경주 능지탑지(慶州陵只塔址)


1982년 8월 4일 경상북도기념물 제34호로 지정되었다.
중생사 터에 있으며, 능지탑은 능시탑(陵示塔) 또는 연화탑(蓮華塔)이라고도 한다.
기단 사방에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세우고 연화문 석재로 쌓아올린 오층석탑으로 추정되나,
사방에 소조대불(塑造大佛)을 모시고 감실(龕室)을 두었을 가능성도 있다.

주변에서 문무왕릉비의 일부가 발견되었는데,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문무왕이
‘임종 후 10일 안에 고문(庫門) 밖 뜰에서 화장하고 상례(喪禮)의 제도를 검약하게 하라’고
유언하였으며, 근처에 사천왕사(四天王寺), 선덕여왕릉(善德女王陵), 신문왕릉(神文王陵) 등이
있는 점으로 미루어 문무대왕의 화장지(火葬地)라는 주장도 있다.

현재 탑이 일부 복원되었는데, 지대석 위에 상하 이중의 연화대석을 배치하여 중층의 형식을 취하였고
상부의 낙수면을 상층으로 하여 잔디로 처리하였다. 각 층의 옥개에 해당하는 부분에 복련을 돌아가며
수매씩 배치하였다. 하층 옥신에 해당되는 각 면은 한 변이 23.3m, 높이 약 1.9m이며 3구의 12지를
배치하였으나 남면 인상, 동면 인상·신상 등 3상이 결실되어 석재로 보충하였다.
높이 60cm의 연화석은 너비가 고르지 않다.

토단 낙수면 중앙에 토층 옥개부를 여러 매의 석주로 짜 맞추고 상부에 초층과 같은 형식의 연화석을 놓았다.
상층 옥신의 한 변은 길이 12m, 높이 70cm이며, 그 상부에 하층과는 달리 마감돌을 갑석 형식으로 처리하였다.

 

 

 

 

 

 

 

 

경주구황리삼층석탑(慶州九黃里三層石塔)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1962년 12월 20일 문화재로 지정 국보 제37호

 

 

높이 7.3m. 국보 제37호.

이 탑이 있는 자리는 오래 전부터 황복사(皇福寺) 터라는 전설이 있어, 일명 황복사지석탑으로도 불리고 있다.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는 유물 중에, 1937년경 낭산(狼山) 동쪽 기슭에서 수집한 명문(銘文)이 있는

와당편(瓦當片)이 있다. 이것은 당시 부산에 거주하였던 일본사람이 소장하였던 것으로, 평와편(平瓦片) 뒷면에는

 ‘皇福寺(황복사)’라 음각되어 있다.

 

 

 

이 평와편은 비록 발견지점이 확실하지는 않으나 종래의 막연하였던 황복사지설(皇福寺址說)에 유력한 증거를

제공하고 있으며, 역시 낭산 동쪽 기슭에 황복사가 있었다는 전설의 근거를 제공하는 유물이라 하겠다.

이 탑은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우고, 상륜부는 노반(露盤)만 남아 있는 일반형 석탑이다.

 

기단부는 여덟 장의 장대석으로 구축된 지대 위에 구성되었고, 하층기단은 면석과 갑석이 각각 8매로 짜여졌는데,

각 면에는 우주(隅柱 : 모서리기둥)와 2주의 탱주(撑柱 : 받침기둥)가 모각되었으며, 갑석 상면에는 호형(弧形)과

각형(角形)의 2단 굄이 있어, 그 위의 상층기단을 받치고 있다.

 

 

 

상층기단 중석은 8매로 조립하였는데, 각 면에 우주와 2주의 탱주가 모각되어 있다.

4매의 판석을 결구하여 덮은 상층기단 갑석은 하면에 부연(副椽 : 처마 밑에 덧얹어 건 짤막한 서까래)이 있으며,

상면에는 2단의 각형 굄대가 있어, 그 위의 탑신부를 받치고 있다.

 

탑신부는 옥신과 옥개석이 각기 하나의 돌로 조성되어 있는데, 각 층의 옥신에는 각 면에 우주가 있다.

각 옥개석의 받침은 5단씩이고 상면에는 2단의 각형 굄대를 마련하여 그 위층의 옥신석을 받치게 하였는데,

이러한 양식은 신라석탑의 독특한 점이라 할 수 있다.

 

 

 

낙수면이 평평하고 4면의 합각이 예리하며, 네 귀퉁이 전각의 발전도 경쾌하여 단아한 탑신부를 이루고 있다.

이 석탑은 통일신라 초기의 석탑건축 양식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는 점에서 주목된다. 즉, 작은 석재를 이용하여

결구하였던 초기의 석탑과는 달리 단일석으로 쌓아올렸으며, 기단부의 탱주도 3개에서 2개로 줄어들었다.

 

규모에 있어서도 감은사지삼층석탑(국보 제112호)이나 고선사지삼층석탑(국보 제38호)보다 작아졌다.

1942년 수리공사 때 장문의 명문이 조각된 금동사리함과 함께 금제 불상 2구를 비롯하여 많은 장엄구가 발견되었다.

사리함의 명문에 의하여 이 탑은 692년(효소왕 1)부터 706년(성덕왕 5) 사이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별칭(別稱) 이칭(異稱) 달리 부르는 이름. 달리 부르는 명칭으로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慶州 皇福寺址 三層石塔)으로도

불리고 있다.  낭산(狼山)의 황복사 절터에 남아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이다. 황복사는 652년(진덕여왕 6) 의상(義湘)이

출가한 사찰로 알려져 있을 뿐 건립 연도와 창건자 등 자세한 사항은 알려져 있지 않다. 1943년 이 석탑을 해체하여 복원할 때

나온 사리함에서 사리함 뚜껑의 안쪽 면에 새겨진 명문(銘文)에 따르면, 신라 효소왕이 아버지 신문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692년에 이 탑을 세웠다고 한다. 1962년 12월 20일에 국보 제37호로 지정되었다.

 

                                                                                                                                                 촬영일: 2012년 12월 1일

 

토함산을 내려올때 내리던 눈은 다시 비로 내리고 황복사지삼층석탑에서 돌아 나올 무렵
황량한 논 가운데 뻗은길 저앞쪽에는 길잃은 고라니 한마리가 황급히 도망치듯 달아나고 있었다.
촉촉하게 젖은 잔디가 노랗게 보이고 고목의 버드나무 사이로 보이는 커다란 봉분이 바로 지금 드라마
대왕의꿈에서 나오던 신라의 제26대 왕(579~632 재위) 진평왕릉이기도 했다.  

 

 

 

 

 

                                                                                                                                              촬영일: 2012년 12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