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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봉산(五峰山) 여근곡(女根谷)

도랑도랑 2012. 12. 5. 23:11

오봉산(五峰山)

경상북도 경주시 건천읍에 있는 산.

2012년 11얼 24일 토요일 오봉산을 다녀왔다.

높이는 688m 여근곡으로 산을 타고 정상에 올라 부산성으로 내려오는 코스는 천년고도 경주의 역사와
전설을 느낄 수 있으며 산세와 조망도 뛰어나다.

등산은 건천읍 신평 2리를 기점으로 여근곡 입구 버스정류장에서 마을로 들어가 유학사로 간다.
유학사 앞마당에서는 여근곡에서 솟아나는 샘물인 옥문지(玉門池)의 약수를 맛볼 수 있다.
마당을 건너 산속 오솔길에 들어서면 636년 선덕여왕이 매복한 백제군을 섬멸시켰다는 여근곡이 나온다.

울퉁불퉁한 고갯길을 걸어 능선에 오르면 오른쪽으로 바위전망대가 있다.
정면으로는 화랑을 느낄 수 있는 부산성의 넓은 평원이, 오른쪽으로는 정상이 보인다.
능선길을 오르다 오른쪽으로 오르막 샛길로 올라서면 정상이다.

정상에는 1300여 년 전에 의상이 창건했다는 작은 사찰 주사암이 있다.
주사암에서 정상 바로 밑 주차장으로 나와 오른쪽으로 내려서면 부산성으로 가는 길이고,
숲속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임도에 내려서면 하산길이다.
여기서 하산하면 종주에 3시간 30분 걸리고, 부산성을 거치면 6시간 걸린다.
부산성을 거치려면 돌담 성벽과 밭둑 사이를 지나 산길을 걸으면 부산성 정상에 닿고
여기서 숲을 지나 임도로 내려서 송선 2리로 하산한다.

 

지맥석(持麥石)

오봉산 정상 부근 주사암 마당을 지나 50m 정도 더 나가게 되면 오봉산의 명물인 마당바위 위에 올라앉게 된다.

지맥석(持麥石)이라 불리는 이 마당바위는 산정 위에 우뚝 선 평탄한 반석으로 마치 멍석을 깔아 놓은 듯한 암반으로

신라 김유신이 술을 빚기 위하여 보리를 두고 술을 공급하여 군사들을 대접하던 곳이라 하여 지맥석이 되었다고 전하며

곳곳에 움푹움푹 패여 들어간 자리들은 말발굽의 흔적이라고 한다.

 

 

 

건천읍에서 영천 대구방향으로 직진 윗장시버스정류장 앞에서 이정표따라

좌회전하여 들어가면 마을회관이 나오고 넓은주차장이 있다.

 

햇살좋은 맑은 날이었지만 마을 뒤로 보이는 오봉산 여근곡은 뿌옇게 안개처럼 가려져 수줍은듯 어렴풋이 그 형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주차장은 텅텅 비어있었고 마을사잇길로 빠져나가니 경부고속도로 아래 좁은 길을 빠져나가 유학사가 있는 산책로 

입구에 주차를 하고 유학사를 돌아 본 후 좌측으로 올라갔다. 

 

오봉산 여근곡에 얽힌 설화

 

오봉산 중간 산허리를 뻗은 능선은 동쪽 앞산을 향해서 유순히 내려 뻗었는데 사람들은 썹들이라고 부르지만 어떤 괴짜스러운

사람들은 -씹들-이라 부른다. 발음이 비슷한데다 동내 뒷산이 여근곡(女根谷)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마을에 바람난 처녀가

많다는 우스개말도 있다. 음기가 새기 때문에 견디지 못하고, 밖으로 나간다는 속설이다. 이 신평리 마을에 경부고속도로가

생겨서 오봉산 산허리를 달랑 잘라 놓은 듯 별로 좋은 관경은 아니다.

 
이 썹들 마을 뒷산을 신라 때부터 흡사 여자 성기의 골짜기 같다고 해서 일찍부터 이 골짜기 마을을 두고 여근곡이라고 불렀다.

서면들과 건천읍을 지나가는 철길과 일반국도, 지금은 고속도로까지 이 앞을 달려 가고 있지만 차창으로 서쪽 산을 쳐다보노라면

이 능선과 계곡이 흡사 여성의 그 곳을 닮아서 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인지 옛날 경주 부윤이 부임하기 위해 내려오면서

이 곳을 지나게 되면 반드시 이 여근곡을 보게 되는데 재수가 없다고 해서 영천에서 안강으로 가는 노팃재를 넘어 돌아갔다고 한다.

 

신라 제27대 선덕여왕은 매우 총명하고도 현명한 여왕이었다. 이 여왕이 중국의 황제로부터 작약 꽃씨와 그림 한 폭을 선물로

받게 되었다. 여왕은 이 선물을 펼쳐 보고 "이 꽃에는 향기가 없을 것이다." 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했었다.

신하들이 그 이유를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왜냐면 그 그림에는 나비가 그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자신에게 남자가 없는 여왕이라고 놀리려고 일부러 선물을 보낸 것으로 알아챘기 때문이다. 사실 황제가 보낸 꽃씨는 싹이

트지 않았다. 이 씨가 삶은 꽃씨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선덕여왕은 날카롭고 예리한 통찰과 총명함이 있었다.

 

때는 선덕여왕 5년의 일이다. 어느 추운 겨울이었다. 어인 일인지 개구리 우는 소리가 왕궁 안 옥문지에서 요란히 들려왔다.

한 겨울에 개구리소리라니 가당치 않은 일이다. 신하들은 틀림없이 어떤 불길한 흉조라고 수근거리고 있는데 현명한 여왕은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두 사람의 장군을 불렀다. 그러면서 명령하였다. “지금 당장 달려가 서북쪽 여근곡에 있는 적을 섬멸하라.”

라는 것이었다. 지금 건천읍 신평리 썹들 여근곡에 출전할 것을 명령한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곳에는 500여명의 백제

기습군사가 숨어서 진을 치고 있었다. 물론 출동한 신라군은 계곡 속에 숨어 잠복하고 있던 적군을 포위해서 섬멸하고 말았다.

그 뒤 신하들은 여왕에게 어떻게 하여 적군의 매복을 알아차렸느냐고 물었다. 하얀 것은 여자를 가리키는 것이고, 곧 이것은

서쪽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개구리가 하얀 것은 여성의 기운이 왕성한 그 곳 옥문의 여근곡을 가리키고 있다는 뜻이 된다.

그래서 옥문에 들어간 것은 힘을 잃고, 맥을 추지 못하고 죽는다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닌가.』 선덕여왕은 이렇게 설명을 했다.

 

지금 와서 아주 오랜 일을 확인하기는 어려우나 이 골짜기 속에 수백명의 군사가 숨어 있다가 기습전을 감행할 만한 곳은 못된다.

다만, 지리적으로 여근곡에 대한 전설처럼 어찌 그리도 멀리 혹은 가까이서 보아서도 이상하리 만큼 그곳이 둥글고 또 돋아

있어서 가운데의 도톰한 모양은 그림으로 그려도 어떻게 여자의 그것과 흡사히 닮도록 그릴 수 있을까 할 정도로 닮아 있다.

그런데다가 그렇게 도톰하게 불그레한 한복판 밑에서는 사시사철 질퍽한 물이 가뭄 없이 쏟아나고 있다.

바로 그 밑에 물을 받아 가두어 두는 자그마한 연못이 바로 사서에 나오는 전설을 그대로 뒷받침해 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여근곡의 전설 그대로 산등성이 넘어 부산성에 적이 넘어 들어와 여기서 진을 친 것이 아닌가하는

추측을 갖게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6.25 때의 일이다.

두 달만에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인민군이 경주를 점령 직전에 부레이크가 걸리고 말았다.

적의 밀물 같은 포화가 오봉산 아래에 있는 단석산을 향해 공격했지만 이곳은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명장 김유신 장군의 혼이

깃들어 있는 수련장이라, 그렇게 경주를 진격하려고 했지만 수포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또 한편, 이야기로는

이 서면에 위치한 여근곡인 썹들의 음기가 백제군을 견뎌내지 못하게 포로로 만들었듯이 인민군의 공격은 하필 경주 경계인

서면 외곽까지 들이닥쳐 왔지만 이상하게도 한발짝도 들어오지 한 것이 바로 이 여근곡의 음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금도 향토적 전설로 전해지고 있다. (참고문헌 : 삼국유사)                                

                                                                                                                    출처: 전통사찰관광종합정보 Korea Teaple

 

 

지난 여름 이곳에서 멀지않은 건천에 오봉산(五峰山)이 있고 자태 야릇하고 이름도 야한 여근곡(女根谷)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많은 날들 중에 하늘 새파랗게 보기좋은 가을 날에 한 번쯤 가봐야지 하는 생각으로 기회만 엿보고 있었는데

이런일 저런일들로 아름다운 계절 다 지나버린 어느 날 신항으로 연결된 산업도로를 달려 건천으로 가보았다.

인터넷검색으로 지도를 확인하고 신평2리 라는 이정표가 있는 국도변에서 90년대 종종 이길을 지나 다니면서 부산성이란

표지판을 보아왔던 기억은 떠 올랐지만 오봉산이나 여근곡에 대해선 아는것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마을 입구엔 성테마박물관이란 간판도 보였고 작은 저수지에 비춰진 늦가을의 풍경에 잠시 눈을 돌려봤다.

 

주차장에 설치된 안내판의 일부인 지도

 

 

여근곡 입구에 설치되어 있는 이정표와 여근곡 산책 안내도 좌측 유학사로 올랐다가 좌측으로 내려오는 산책코스로 보였다.

입구에서 좌측 또는 우측 어느쪽으로 올라가도 920m 지점에서 만나게 되어있다.

쉼터에서 15분정도 올라가면 능선에서 우측으로 오봉산 표지석지나 주사암을 거처 지맥석까지 갔다가 왔던길을 되돌아 내려 오면서

쉼터 지점에서 좌측길로 내려오게 되었다.

 

 

 

 

 

 

 

 

 

유학사

 

 

 

 

 

옥문지(玉門池)

유학사 앞 마당을 지나 좌측 산책로를 따라 조금만 오르다 보면 이정표가 서 있는지점 이것이 옥문지(玉門池)라니 궁금했던

만큼 특별하지도 않게 보이는 아무곳에서나 만날 수 있는 옹달샘 정도로만 보였으나 이곳에 얽힌 이야기가 참 별스럽기도 하다.

옛날에는 이 샘을 작대기로 쑤시고 휘저으면 동네 처녀들이 바람이 나기 때문에 샘물은 동네 어른들에 의해 철저하게 지켜져

왔다고 전한다.  조금만 감시를 소홀해도 이 동네 처녀들의 바람기를 추스리려고 타동네 총각들이 이 골짜기에 몰래 들어와

작대기로 휘젓기가 예사였다는 것이다.

 

 

산책로 입구에서 920m로 표시된 지점의 이정표

 

 

주변지역의 풍광이 한 눈에 펼쳐져 들어 오던곳 사람들은 이곳을 망대라고 부르는것 같았다.

 

 

 

 

 

 

 

 

 

오봉산 625m 표지석에서 내려다 보이던 주사암(朱砂庵) 입구                                                      

 

                                                                                                                   촬영일: 2012년 11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