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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서부자 도잠서원

도랑도랑 2022. 11. 1. 21:32

 

도잠서원(道岑書院)

조선 중기의 학자 조호익(曺好益:1545~1609)의 학덕과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 

1985년 8월 5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1612년(광해군 4) 모사리에 창건하였으며, 창건 당시에는 지봉서원이라고 하였다. 

1678년(숙종 4) 용호리로 이건하였는데 이때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되었다.

 

이후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폐되었다가 1914년 복원하였고, 1981년 보수하였다. 
강당 5칸, 망회정 등 6동이 있으며, 조호익 신도비와 하마비도 있다. 
신도비는 높이 2.67m, 폭 0.9m, 두께 0.21m이며, 신도비가 보관된 비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목조 건물이다.

조호익(1545~1609)은 이이(李珥:1536~84)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연구하였고, 최황(崔滉:1529~1603)에게 반항한 죄로 
평안남도 강동(江東)에 유배되었다. 이후 임진왜란 때 소모관이 되어 전공을 세웠다.

 

 

 

 

 

도잠서당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도잠서원이 있다. '도잠(道岑)'은 '도의 봉우리'란 뜻으로 숙종 임금이 내린 사액이다. 
서원입구에는 '관서부자(關西夫子)'라는 까만 표석이 있다. 지산은 1576년에 경상도도사 최황에게 반항한 죄로 

평안도 강동현에 유배 되었다. 그는 유배지에서 독서에 몰두했고 제자들을 길렀다. 그의 관서 제자 중 한 명이 대동법으로

백성을 구하고자 했던 김육(金堉)이다. 선조임금은 관서지방의 문풍을 크게 일으킨 공으로 그에게 '관서부자(關西夫子)'의

어필을 내렸고 그는 유배지에서 17년을 살았다. 유배에서 풀려난 것은 임진왜란 때다. 그는 의병장으로 많은 전공을 세웠고

또 벼슬을 지냈다. 그가 생을 마쳤을 때 김육(金堉)은 이곳으로 달려와 스승의 장례를 살피고 석 달 동안 시묘를 했다고 한다.

 

 

 

도잠서당(道岑書堂)의 돌담 안에는 인조 20년 1642년에 건립된 지산의 신도비각과 '도잠서당(道岑書堂)' 편액이 걸린 5칸

강당이 있고, 망회정(忘懷亭)이라는 한 칸 작은 집이 있다. 망회정은 지산의 거처이기도 했으며 1609년 이 작은 방에서

주자대전(朱子大全)을 뒤적이다가 '이 책이 반드시 이 늙은이가 없는 것을 서운해 할 것'이라는 말을 남긴 뒤 세상을 떠났다.

 

 

 

 

오르막길 옆에는 허름해보이기도 한 작은 하마비가 서 있다. 오른쪽 못둑위 까만 비석에는 도화담(桃花潭)의 내력을

간단히 적어놓고 있다. 지산(芝山)은 1603년 이곳으로 들어와 물길을 막고 주변에 복숭아나무를 심어 도화담(桃花潭)

이라 했다고 한다. 못 가운데에는 지어대(知魚臺)를 만들었다고 전하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당시 영천군수 황여일(黃汝一)이 거룻배를 보냈고 그와 따르는 생도(生徒)들은 도산12곡(陶山十二曲)을 부르면서

도화담에서 뱃놀이를 즐겼다고 한다. 

 

 

 

 

 

 

 

 

도화담(桃花潭)

도화제(桃花堤)

堤(둑 제, 대개 시)의 한자 유래

堤자는 ‘둑’이나 ‘방죽’, ‘(둑을)쌓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堤자는 土(흙 토)자와 是(옳을 시)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是자는 시간이 정확하게 흘러간다는 의미에서 ‘옳다’나 ‘바르게 하다’라는 뜻이 있다. 
堤자는 이렇게 ‘바르게 하다’라는 뜻을 가진 是자에 土자를 결합한 것으로 ‘둑을 바르게 쌓다’라는 뜻으로 만들어졌다.

 

 

 

관서지방(關西地方)
한반도의 북서부, 현재의 평남·평북·평양·자강도 일대를 포함하는 지방.

관서 또는 서관이란 관(關)의 서쪽이란 뜻인데, 그 관은 강원 회양군(淮陽郡)과 함경 안변군과의 경계에 있는 

철령(鐵嶺:685m)에 있던 관을 말한다. 따라서 철령의 서쪽을 뜻하는 관서라는 말을 평안남 ·북도지역의 지방명으로 

사용하는 것은 그리 적절하지 못하다. 그래서인지 관용상으로는 관서라는 말보다는 서북로(西北路) ·서북계(西北界) ·

서로(西路) 또는 서북도(西北道)라는 이칭(異稱)이 더욱 널리 사용되어 왔다. 그런 이칭은, 995년(고려 성종 14)에 
전국을 10도로 나누었는데, 그 때 이 지역을 패서도(浿西道), 평양(平壤)을 서경(西京)이라 하고, 그 후에 북계(北界) ·

서북면(西北面)이라 개칭하였다가 1102년(숙종 7)에 서북계(西北界)라고 한 데서 연유한다. (두산백과 두피디아)

 

夫子 부자 
1. 덕행(德行)이 높아 모든 사람의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의 높임말.
2. 남편(男便)의 높임말.
3. 공자(孔子)의 높임말.

 

 

 

 

도잠서원의 건축물


사당은 성모묘(聖慕廟), 내삼문은 영수문(永綬門), 강당은 회만당(會萬堂), 동협은 양원협(養源夾), 서협은 구단협(求端夾), 
동재는 희안재(希顔齋), 서재는 봉원재(逢原齋), 외삼문은 지수문(止水門)이다. 그 외에 망회정, 포사, 비각 등이 있다. 
망회정은 1603년(선조 36)에 조호익이 건립하여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며, 포사는 향례 때 제수(祭需)를 장만하여 

두는 곳이다.

 

 

 

 

 

 

 

 

 

영천 지산고택 (永川 芝山故宅)

경상북도 영천시에 있는 조선 전기 선조 때 문신인 조호익(曺好益)이 건립한 살림집.
영천 지산고택은 행정구역으로 경상북도 영천시 대창면 영지길 117-9관련항목 보기에 있다. 
대창면소재지에서 북안면 북리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가면 우측으로 영지사 방면 도로가 있다. 
이 도로를 따라 가면 폐교된 신광 초등학교를 지나자마자 지일동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 동쪽 산 밑에 영천 지산고택이 보인다.

 

 

 

 

평평한 대지에 안채·사랑채·고방채·사당이 남동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일반적인 종택의 규모에 비해 아담하고 소박한 배치구성이다. 
사랑채 대청에 ‘지산 고택’이란 현판이 걸려있고, 대청 대들보와 우측 청방간 대들보에 시렁을 얹어 수장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조선 후기의 살림집으로 다소 규모는 작지만 실용적이고 가식 없는 간결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특히 주 상부와 대공의 모습은 도잠서당의 것과 유사해 두 건물간의 유기적 관계를 엿 볼 수 있다.

 

 

 

 

 

 

촬영일 : 2022년 10월 30일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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