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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문화재(有形文化財)

도랑도랑 2020. 3. 27. 20:15

 

 

이렇게 구불구불한 소나무숲을 만나면 경주의 삼릉숲이나 안강의 흥덕왕릉의 소나무숲이 먼저 떠오른다. 이런곳이 여기에도 있었네! 하면서 차를 세우고

내려본 곳은 경북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이다. 69번 지방도 포항시 죽장면과 영천시 금호읍 구간 자양면 행정복지센터 앞을 지나 조금만 지나면 도로 우측에

작은 주차공간이 있는 소나무숲 앞에 다다르고 스테인레스 파이프 기둥에 매달린 유형문화재 안내판이 나타난다. 언듯 고택들이 모여있는 민속마을 같은

느낌도 들지만 일렬로 늘어선 축대나 형식으로 보아 영천댐 수몰지역에 흩어져 있던 문화재들을 한 곳으로 이건해 놓은것임을 알 수 있게 된다. 호기심에 한곳

한곳 둘러보게 되었다.

 

 

 

유형문화재(有形文化財)

 

1995년 현행 문화재보호법에 따르면, 문화재는유형문화재·무형문화재·기념물·민속자료로 분류된다. 이 가운데 유형문화재에속하는 것으로는건조물(建造物)

전적(典籍)·서적(書蹟)·고문서·회화·조각·공예품 등 유형의문화적 소산으로서 역사상 또는 예술상 가치가 큰 것과 이에 준하는고고자료(考古資料) 등이 있다.


일반적인 개념으로 문화재를 분류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탑이나불상·건조물같이 일정한 형태가 있어서 눈에 보이는 것과, 승무·탈춤·판소리등의

예술활동처럼 일정한 형태가 없어서 눈에 안 보이는 것으로 크게 나눌 수있다. 이 중 전자가 넓은 의미의 유형문화재에 해당되고, 후자가 무형문화재에해당된다.


형태가 없는 무형문화재를 제외한 모든 문화재를 넓은 의미의 유형문화재라 볼 수있는데, 국보·보물·민속자료·사적·명승·기념물·문화재자료가 포함된다.

그종류로는 각종 건축물과, 책·글씨·그림·고문서 등의 문예품, 조각·도자기·탑·불상·종 등의 공예품이 있다.


형태가 없는 문화재에 비하여 형태가 있는 문화재는 그 종류나 수가 훨씬 많으므로구분·보호 방법이 종류에 따라 서로 달라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에서는형태가 있는 문화재 중에서도 동식물이나 광물 및 경승지·성지·고분·유적지 등은기념물로 따로 분류하고, 의식주나 신앙·사회·놀이·풍습 등

일상생활과 관련된도구들은 민속자료로 구분하고 있다.  


즉 민속자료와 기념물을 제외한 문화재를 좁은 의미의 유형문화재라 하며, 일반적으로 유형문화재라 하는 것은 이를 말한다. 여기에서 인간의 손을

거치지않은 자연물은 제외된다. 

 

 

 

추원당의 편액

 

 

 

하천재(부비각) (夏泉齋(附碑閣) / 경북유형문화재 제73호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紫陽面) 성곡리(聖谷里)에 있는 오천정씨(烏川鄭氏) 문중의 사묘재실.


1975년 8월 18일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73호로 지정되었다. 진주목사 정호인(鄭好仁)이 1637년(인조 14)에
오천정씨(烏川鄭氏) 문중의 묘소와 호수 정세아(鄭世雅:1535~1612)의 신도비를 수호하기 위하여 세운 건물이다.


지금의 건물은 후대에 고쳐 세운 것으로 보이며 영천댐 수몰지역으로 편입되어 1976년에 영천시 자양면(紫陽面) 성곡리(聖谷里)로 옮겨 세웠다.
경내에는 추원당(追遠堂)·신도비각(神道碑閣) 등이 있는데 모두 단순하고 소박하게 짜여져 있다.

 

 

 

 

 

 

 

 

 

 

 

 

 

 

 

오회공종택(五懷公宗宅) / 경북유형문화재 제72호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에 있는 조선시대 가옥.


정수번(鄭守藩)이 그의 셋째아들인 호신(好信)을 분가시키기 위해 조선 광해군 12년(1620)경에 건립한 주택이다.
정수번은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활약하여 영천·경주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정세아(鄭世雅:1535~1612)의 아들이며,

의번(宜藩)의 아우이다. 묘우(廟宇)는 효종(孝宗) 6년(1655)에 세웠다.


본래는 정세아가 조정에서 수여하는 모든 명예를 사양하고 고향인 자양(紫陽)으로 돌아와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을 위해 선조 32년(1599)에

현 용산동(龍山洞)에 창건한 것이라고도 한다. 이 건물을 정씨종택이라고도 불렀던 점으로 미루어 보면, 정수번의 창건인지 확실하지 않다.

영천댐 건설공사로 1977년 3월에 현 위치로 이전·복원하였다.

 

종택은 자연석으로 쌓은 낮은 기단 위에 자연석 주초를 놓고 세운 정면 5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집이다.
팔작이라도 보기에는 맞배지붕에 눈썹지붕을 단 형식이다. 중앙의 2칸은 마루로 꾸미고, 좌우에 1칸씩 방을 들였다.
좌측 1칸은 부엌이다. 묘우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1975년 8월 18일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72호로 지정되었다.

 

 

 

 

 

 

오회당(五懷堂) / 경북유형문화재 제76호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에 있는 조선시대 누각.
소재지 : 경북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 산78


1975년 8월 18일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76호로 지정되었다. 정남식이소유·관리하고 있다.


오회당 정석현(鄭碩玄)을 추모하기 위하여 조선 영조 3년(1727) 관찰사권대규(權大規)의 후원으로 도내의 인사들이 건립한 것이다.
영천댐 건설공사로인하여 1977년 3월 현위치로 이전·복원하였다.


건물은 낮은 기단 위에 소박하게 짜여진 목조기와집이다.
주초는 자연석을 다듬어사용하고, 지붕의 형태는 맞배지붕 좌우에 눈썹지붕을 덧달아 마치 팔작지붕처럼보이게 하였다.
이런 형태는 이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식이다. 규모는 정면 4칸에 양쪽에 각각 퇴 1칸을 달았다.
오른쪽 한칸은 꾸밈이 없이 기둥만 세웠고, 전면에는 좁은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기둥은 모두 네모기둥을 사용하였다.

 

 

 

 

 

 

 

 

 

 

사의당(四宜堂) / 경북유형문화재 제74호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자.


1975년 8월 18일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74호로 지정되었다.
1732년(영조 8)에 정중호, 중보, 중락 등 4형제가 형제간의 우의를 더욱 돈독히 하기 위하여 함께 모여 즐기는 장소로,
또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을 위한 장소로 사용하기 위하여 건립한 것이다. 원래의 위치는 지금의 자양면(紫陽面) 용산동(龍山洞)이었으나,
영천댐 건설로 이 지역이 수몰되게 되어 1977년 3월에 현재의 장소로 이전·복원하였다.

 

 

 

 

 

 

 

 

 

 

 

 

 

 

 

 

 

 

 

 

삼휴정(三休亭) / 경북유형문화재 제75호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에 있는 조선 후기 학자 정호신(鄭好信)이 건립한 누정.


1975년 8월 18일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75호로 지정되었다. 1635년(인조 13)에삼휴(三休) 정호신이 학업을 위해 지었다.
정호신은 임진왜란 때 영천 지방에서 의병을 일으켜 큰 공을 세웠던 조부 정세아(鄭世雅)가 살던 이 곳에 정자를 지어놓고 학문에 정진하였고,
그 절경을 바라보며 삼휴라는 시를 지었다. 이로써삼휴당이라는 당호가 생겼다.

 

건물은 팔작지붕으로 꾸며졌으며 정면 4칸, 측면 1칸 반의 규모이다. 다락집으로건물의 전면에만 난간을 시설하였으며 기둥 가운데 다섯 개만 원주(圓柱)이고

나머지는 육축(陸築) 위에 초석을 놓고 평주(平柱)처럼 세워져 있다. 평면은 중앙에 2칸이 대청으로 꾸며져 있고 좌우 2칸에 반 칸의 전퇴를 두고 각각 1칸 반

크기의 방을 배치했다. 영천댐 건설 공사로 수몰 위기에 있어 1977년 3월에 지금의 자리로옮겨 복원하였다.

 

 

 

 

 

 

 

 

 

 

 

 

 

 

 

 

 

 

 

 

 

 

 

강호정(江湖亭) / 경북유형문화재 제71호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紫陽面) 성곡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자.
소재지 :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 산78  


1975년 8월 18일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71호로지정되었다. 정재종이 소유하고 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의병대장으로 전공을 세운

정세아(鄭世雅)가 1599년(선조 32) 창건 하였다. 원래는지금의 용산동(龍山洞)에 있었으나, 영천댐 건설공사로 인해 1977년 3월 이곳으로 이전

복원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맞배지붕집으로 중앙이 대청, 좌우 협간(挾間)이 방이며 앞면에 퇴를 두어마루를 넓게 쓰도록 하였다.
‘자호정사(紫湖精舍)’라고 씌어진 편액과, 정세아의 시(詩)를 포함한 시액(詩額) 15점이 걸려 있다.

정세아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국가에서 수여하는 모든 명예를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자호언덕에 정자를짓고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