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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산 고택(芝山故宅)

도랑도랑 2019. 12. 9. 23:35

 

 

지산 고택(芝山故宅)

 

경상북도 영천시에 있는 조선 전기 선조 때 문신인 조호익(曺好益)이 건립한 살림집.
경북문화재자료 제99호  / 경상북도 영천시 대창면 영지길 117-9(신광리 699)


1985년 8월 5일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99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선조 때의 문신으로 임진왜란 때 소모관(召募官)이 되어 공을 세운 조호익(曺好益)의

종택이다. 조호익이 1603년경 지산촌으로 이거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때 건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1989년 영천시에서 보수했다.


가옥의 배치는 一자형의 안채가 남향으로 세워져 있고, 전면 좌측엔 ㄴ자형의 사랑채가, 우측엔 一자형의 헛간채가 있는데 전체적으로는 ㅁ자집 형태이다. 동북쪽으로 경역을 달리하여 사당이 한 단 높은 곳에 토석담장으로 둘러져 있다.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4칸에 ㄴ자형 맞배지붕집이며 전체면적이 13.18평이다. 막돌기단 위에 각기둥을 사용한 3량가구집이다.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에 一자형 팔작지붕집으로 면적은 15.06평이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집으로 4.66평에 이른다.

 

 

 

 

 

 

 

 

 

 

 

유후재 및 옥비(遺厚齋-玉碑)

 경상북도 영천시 대창면 대재리 210-1 에 있는 조선 시대 문신 조치우(曺致虞)의 묘를 수호하기 위해 건립한 재실과 옥비.


조치우[1459~1529]의 호는 정우당이며 조선 성종 때의 문신으로, 1494년 별사문과에 급제해 예문관 검열을 거쳐 성균관 전적이 되어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중종반정 이후 장령을 지내고 대구 부사를 역임하면서 어진 다스림을 펼쳐 칭송을 받았다.


사옹원정(司饔院正)에 임명되었으나 어머니의 봉양을 위해 거절했는데 어머니의 상중에 조치우도 생을 마쳤다.
그가 죽은 후 조정에서는 옥비 2기를 하사해 그의 청렴결백과 효행의 덕을 표창했으며, 조치우는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다.

 

 

 

청렴결백과 효행으로 청백리에 녹선된 조치우의 묘소를 수호하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1539년 후손들이 유후재(遺厚齋)를 건립했다.
옥비는 1529년 중종이 조치우 사후에 내린 옥으로 만들었는데 비각은 1854년 건립되었지만 최근에 중수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유후재는 해발 127m의 낮은 구릉성 산지의 말단부에 재실·문간채·비각·변소·협문간채가 일곽을 이루며 남향하고 있다.
재실을 둘러싸고 있는 방형의 토석 담장 좌측으로 고직사가 있고 평소에는 이곳을 통해 재실 일곽의 서편 일각문을 들어선다. 

 

 

 

조선 성종 때 문신이며 학자로 청백리에 녹선된 조치우(曺致虞) (1459-1529) 선생의 묘하재사이며, 선생이 대구부사 재임 시 선정을 베풀어 나라에서

하사한 옥비이다. 선생의 호는 정우당(淨友堂), 본관은 창녕(昌寧), 성종 25년(1494)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을 거쳐 성균관 전적으로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그 후 중종반정 후 장령(掌令)을 지내고 대구부사 재임 시 선정을 펼쳐 칭송을 받았으며 사옹원정(司饔院正)에 임명 되었으나 모침 봉양을 위하여 사임, 모상 중 일생을 마쳤다. 사후 조정에서 옥비 두 좌를 하사하여 그의 청렴결백한 덕을 표창하였다.


옥비(玉碑) 1좌는 대창면 대재리 송청산(松靑山)의 유후재(遺厚齋)속의 옥비각(玉碑閣) 에 안치(安置) 되어 있고 또 1좌는
부인의 묘소가 있는 경남 창원군 북면 지계동 청룡산(靑龍山) 의 모선재(慕先齋) 속의 옥비각(玉碑閣)에 안치하고 있다.   

 

 

 

유후재는 정면 5칸, 측면 1.5칸의 홑처마 팔작지붕 목조 와가로 중앙에 대청 두 칸을 두고 좌측에 온돌방[충효당(忠孝堂)] 두 칸, 우측에 온돌방

입교당(立敎堂) 한 칸을 둔 중당협실형(中堂夾室型)이다.

 

전면으로는 반 칸의 퇴를 두어 공간을 확장시켰다. 유후재는 덤벙 주초에 전면에 원형 기둥을 세우고 나머지는 네모기둥을 세워 몰익공(勿翼工,소로 수장과 같은 양식)으로 가구를 완성했다. 가구는 대들보 상부에 제형 판대공을 얹어 종도리를 받도록 한 전체적으로 3량 가로 구성하고 있다.

 

 

 

문간채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홑처마 맞배지붕으로 중앙에 판문의 대문을 두고 좌우에 방을 들인 전형적인 문간채 형식이다.
문간채 서쪽으로는 최근에 변소 칸을 두었고, 그 옆에 직각으로 고직사에서 드나드는 협문간채가 있다.
보통 협문은 일각문 혹은 사주문으로 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특이하게 우진각 지붕에 두 칸의 문간채를 세웠다.

 


 

비각은 기문에 따르면 1529년 조선 중종 대왕이 직접 옥비를 내려 비를 새기고 난 후 1854년에 옥비를 보호하기 위해 비각을 건립했다.
단칸 규모의 겹처마 맞배지붕인 비각은 낮은 외벌대 기단에 원형 초석을 놓고 짧은 석주를 세운 뒤 다시 원형기둥을 세웠다. 유후재와 다른 건물의 향과

달리 약간 남서향으로 앉혀져 있다.

 

 

 

기둥 상부는 연화문의 앙서와 수서의 익공 위에 봉두를 초각하고 주두와 짧은 행공으로 짜맞춘 이익공 양식으로 처리했다. 주간에는 창방과 장혀 사이에 화반 2구를 두었다. 벽은 전면을 홍살벽으로 처리하고 가운데 외여닫이 살문을 내었으며, 나머지 좌우 측면과 배면은 하부를 토벽으로 하고 상부를 홍살벽으로 마감했다.

 

 

 

비각 내부에는 옥으로 만든 비가 있다. 비는 하부에 해학적으로 표현한 귀부를 앉히고 비몸과 일체형의 꽃봉우리 조각을 화려하게 한 비를 꽂았다.

비의 전면에만 비명을 새겼다.

 

 

 

 

비각의 전면 상부에는 ‘내사옥비각(內賜玉碑閣)’이라는 현판을 걸었고, 내부의 비의 전면 중앙에는 ‘어사청백리조치우비(御賜淸白吏曺致虞碑)’라는

비명을 세로로 새기고 나머지 면에는 빈 면으로 처리했다.

 

 

 

 

 

촬영일 : 2019년 12월 04일(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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