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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남의진(山南義陣) 영천

도랑도랑 2019. 12. 9. 08:10

 

 

산남의진 (山南義陣)

 

산남의진(山南義陣)은 중추원 의관 정환직(鄭煥直)이 광무황제로부터 의병 봉기의 밀지를 받고 아들 정용기(鄭鏞基)와 함께 영천을 중심으로 거병한

의병 부대이다. 초기에 정용기가 관군에게 체포되기도 하였으나 1906년 9월 그의 석방을 계기로 의병진을 재편하여 영천·경주·청하·청송 등지에서 활동

하였다.


산남의진은 신돌석(申乭石) 등 인근의 의병들과 연합작전을 벌이거나 또는 독자적으로 수차례 일본군과 교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입암 전투에서 일본군의 공격을 받은 의병진은 대장 정용기 이하 참모진이 전사하였다. 그 후에도 산남의진은 정환직과 최세윤(崔世允)을 중심으로

1908년까지 경상북도 일원에서 활동하였다.


역사적 배경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 이후 반일 감정은 극에 이르러 전국적으로 의병이 봉기하였다.
대표적인 의병 부대는 경기도와 강원도의 원용팔·정운경·박장호 등의 부대, 경상도의 김도현·유시연·신돌석 등의 부대와 정환직·정용기 부자의 산남의진

충청도의 홍주 의병, 전라도의 최익현·백낙구·고광순 등의 부대, 그리고 양서 지역의 우동선·전덕원의 부대가 있었다.


경과

 

광무황제(光武皇帝)의 밀지를 받은 정환직은 아들 용기에게 의병을 일으키도록 명하였다.
이에 정용기는 1906년 3월 고향인 영천에서 이한구(李韓久)·손영각(孫永珏) 등과 의병을 규합하여 산남의진(山南義陣)을 결성했다.


산남의진은 대장 정용기를 중심으로 중군장 이한구, 참모장 손영각, 소모장 정순기, 도총장 이종곤, 선봉장 홍구섭,
후군장 서종락, 좌영장 이경구, 우영장 김태언, 연습장 이규필, 도포장 백남신 등이 포진되었다.


산남의진은 영해 지방의 신돌석 의병부대를 후원하고자 북으로 진군하던 중, 경주 우각(牛角)에서 참령 신석호(申錫鎬)의 간계로 정용기가 체포되었다.
이후 산남의진은 중군장 이한구가 지휘하였으나 7월 하순 경 해산하고 말았다.


1906년 9월 아버지 정환직의 주선으로 석방된 정용기는 1907년 4월 재기하여 죽장·포항 등지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1907년 9월 초 영일군 죽장의 입암 전투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대장 정용기와 장령 다수가 전사하는 피해를 입고 의병진은 괴멸하고 말았다.


그 후 정환직이 아들을 대신하여 대장이 되어 의병진을 이끌었으나 일본군의 추격과 단약 및 식량의 부족으로 해산하였고, 대장 정환직은 1907년 12월

청하에서 체포되어 영천에서 순국하였다.


최세윤(崔世允)이 다시 의병을 규합하여 대장에 취임한 후 산남의진은 산악 지대를 중심으로 1908년 7월까지 유격 활동을 하며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영천조양각(永川朝陽閣)

정면 5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건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44호.


1368년(공민왕 17) 부사 이용(李容)이 명원루(明遠樓)를 창건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그 후 1637년(인조 15) 군수 한덕급(韓德及)이

누각 15칸, 협각 3칸을 중창하여 이름을 ‘조양각’이라 고쳤다 한다.


1742년(영조 18) 군수 윤봉오(尹鳳五)가 3중창하였으나 1920년대 일본인들에 의해 협각을 비롯한 내ㆍ외문이 철거되고 조양각 1동만 남게 되었다.


조양각은 좌협칸에는 전면에 전퇴 1칸이 형성되고, 그 뒤쪽으로는 2고주를 좌우로 세워 2통칸의 온돌방을 꾸몄는데, 현재 사면의 벽은 모두 개방되어

있다. 온돌방 이외는 모두 우물마루를 깔고 개방시켰다.


대청의 가구는 5량가인데, 대량 위에 주두(柱頭)를 놓고 보아지를 두공처럼 짜아 중도리 및 받침 장여를 받는 이중의 첨차를 결구시켰고, 종량 위에는

판대공을 두어 종도리를 받쳤다.


측면에서 우미량(牛尾樑)처럼 충량이 휘어올라와 중도리 왕지 부분이 충량 등에 얹히도록 하였다. 평주상의 공포는 2익공형이며, 창방과 짜인

주두 아래의 헛첨차와 대량 받침 보아지가 내부에서는 한몸의 보아지로 처리되었다.


각 주칸 사이에는 화반(花盤: 주심도리 밑 장여를 받는 초새김한 받침)을 두었는데, 전후 퇴칸에만 1매씩이고 나머지는 각각 2매씩 두었다.

이 건물은 금호강의 풍경과 잘 어우러진 위치와 더불어 주상의 공포형식과 상부 가구수법 등이 볼 만하다.

 

 

 

 

 

 

 

백신애 (白信愛)
1906년 5월 20일 경북 영천읍 창구동 출생. 어려서 독학하다가 16세 때인 1922년 영천 공립보통학교 졸업반에 편입학하였다.


1923~1924년에는 대구사범학교 강습과에서 수학하였고 이어 경북 경산군의 자인공립보통학교에 부임하였으나, 곧 사임하고 상경했다.
이후 조선여성동우회‧여자청년동맹 등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1928년에는 시베리아를 여행했다.
1934년에 발표한 「꺼래이」는 이때의 체험을 작품화한 것이다. 1929년 「나의 어머니」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하였고,
1929년에는 도쿄에 건너가 문학‧연극을 공부하다 1932년에 귀국했다.

이후 경산군 안심면 반야월의 과수원에서 기거하며 가난한 농촌민들의 세계를 체험했으며, 이것을 기반으로 「복선이」(1934), 「채색교(彩色橋)」

(1934), 「적빈(赤貧)」(1934), 「악부자(顎富者)」(1935), 「빈곤」(1936) 등의 작품을 썼다. 1939년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긴 작품은 총 20여 편으로 많은 수는 아니나, 작품 세계의 면모는 비교적 다양하다고 할 수 있다.
「꺼래이」에서는 식민지 조국을 떠나 만주‧시베리아 등지를 방황하는 실향민들의 고초를 그렸고,「적빈」에서는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는

민중의 모습을 형상화했으며, 유고작인 「아름다운 노을」에서는 나이 어린 소년을 사랑하는 화가를 통해 여성의 애욕을 대담하게 그려내는 등

그의 관심은 민중의 궁핍한 삶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여성의 능동성을 금기시하는 사회적 억압을 의문시하는 데까지 다양한 문제에 걸쳐 있었던 것이다.

 

 

 

왕평(王平)

 

자는 광희(光熙), 본명은 이응호(李應浩)다. 이동암의 장남으로 경상북도 영천시에서 출생했다.
일제강점기 때의 대중음악 작사가이다. 고학으로 배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조선배우학교 1기생으로 연기를 공부했다.
후에 일본의 포리돌 레코드사의 서울지사 초대 문예부장을 지냈다.

 

주요 작품으로는 《황성옛터》, 《대한팔경》, 《고도의 정한》, 《비오는 포구》, 《비단장사 왕서방》, 《신아리랑》, 《신쾌지나 칭칭》 등이 있는데
모두 일제강점기의 민족의 애환과 혼을 불러일으켰던 기념비적인 노래다. 특히 《대한팔경》, 《항구의 일야》는 조선인을 선동하는 노래라 하여 발표가 금지되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성봉영화원에 들어가 영화《나그네》에 출연하기도 했으며 유랑극단과 함께 전국을 돌아다니던 중 뇌일혈로 졸도하여 세상을 떠났다. 경상북도 청송군 파천면 송강리 수정사골에 묘소가 있다. 

 

 

 

 

금호강 풍경(琴湖江風景)

 

금호강은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죽장면 상옥리의 가사령(佳士嶺,500m)과 기북면 성법령(省法嶺, 709m)에서 발원하여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강으로

낙동강의 지류 중 그 규모가 두 번째로 큰 강으로, 금호강의 유역면적은 2,087.9㎢, 금호강 본류 길이는 118.4㎞, 총 유로연장은 5,123㎞,

하계밀도는 2.45㎞/㎢이다. 금호강 유역은 낙동강 전체 유역면적의 약 9.2% 정도를 차지하며 동서로 걸친 장방형 형태를 이루고 있다.

 

 

 

금호강 공원에서 올려다본 조양각 서세루

 

 

 

 

금호강 공원에서 올려다본 영천문화원

 

 

 

 

 

 

 

 

촬영일 : 2019년 12월 04일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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