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문화유적유물산책

시령봉표석(枾嶺封標石)

도랑도랑 2014. 9. 21. 09:21

 

 

시령봉표(枾嶺封標) / 延慶墓 香炭山 因 啓下 嶺封標枾(연경묘 향탄산 인 계하 시령봉표)

시령봉표석의 끝부분을 판독해 놓은 글을 참고해 보면  辛卯十月 日 墓監 臣 金昌祜 監董 臣 李命喜 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신묘년은 1831년에 해당 효명세자 연경(延慶)이 죽은 해와 같은해 라는것이다.

 

연경(延慶)은 조선 제23대 임금 순조의 외아들로서 순조와 순원왕후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영, 자는 덕인, 호는 경헌이다. 1812년 순조 12년에 왕세자에

책봉 되었으며, 1819년 연동녕부사 조만영의 딸을 맞아들여 가례를 올렸다. 1827년 부왕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하였으며, 이때 그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어진 인재를 등용, 형옥을 신중하게 하는 등 백성을 위한 정책 구현에 노력했으나 대리청정 4년 만인 22세에 죽었다.

 

효명세자가 죽자 처음 의릉(懿陵 경종릉)의 왼쪽에 안장하고 연경(延慶 또는 延景)으로 묘호를 삼았다. 아들인 철종이 즉위하자 익종(翼宗)으로 추존하고

수릉(綏陵)으로 승격 하였으나 헌종 12년(1846)에 풍수지리상 불길하다 하여 양주 용마봉 아래로 옮겼다가 다시 철종 6년(1855)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의

건원릉(健元陵 태조릉) 왼쪽으로 옮겼다. 1890년 신정왕후가 죽자 이곳에 합장 하였고 1899년 고종에 의해 다시 문조익황제(文祖翼皇帝)로 추존 되었다.

 

그의 무덤을 조성하는데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하여 이 일대의 나무로 향탄(香炭) 즉 목탄(木炭)을 구웠던 것으로 보이는 데 이때 일반 백성들이 나무를

베지 못하도록 봉표를 세웠던 것이다.

 

 

계곡을 돌아 나오면서 누렇게 익어가는 논바닥 가장자리 웅덩이에 피어난 물달개비

 

넘쳐나는 정보화시대(情報化時代) 지난해 여름 쯤 어느 블로거의 글과 사진에서 계곡 바닥에 박혀있는 시령봉표(枾嶺封標)라는 내용을 읽어본적이 있었다.
일이십년도 아닌 적어도 수백년 전의 흔적들이 닳고 닳아 계곡의 바닥에 덩그러니 놓여져 있다는 사실이 매우 흥미로웠다. 글자의 판독이 쉽거나 어렵거나

문제될것은 없었다. 그져 한 번쯤 가까이에서 구경이라도 해보고 싶은 생각으로 봄 부터 기회를 엿보아 왔는데 마침 들판의 벼도 누렇게 익어가고 맑고 높은

가을 하늘이 그려지는 계곡을 터벅 터벅 아침 이슬 걷어차며 겁없이 혼자서 들어가 보았다.

 

 

 

 

 

 

 

계곡의 폭이좁고 상류쪽을 바라보니 양쪽으로 솟아있는 지형 가운데로 낮은지형이 그 옛날 사람들이 다녔을 재가 있었을것 같은 느낌과 새파란 하늘이 펼쳐저

보이는점, 갑자기 솓아지는 폭우로 인해 불어난 계곡물에 저바윗돌이 구르고 떠밀려 내려왔을것 같은 생각 보다는 좁은계곡 옆으로 사람들이 지나다닐 만한

소로가 있었거나 그 길옆의 바윗돌이 무너지는 흙더미와 함께 스르르 밀려내려와 앉았을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우선 바위의 형태를 돌아보며 글씨가 새겨진

뒷부분을 보니 그러한 생각이 들고 글씨가 새겨진 바윗돌의 경사각도가 인위적인 형태인것 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만약에 저 바위가 급물살에 구르고 부딫이다 보면 글씨가 새겨진 부분들이 떨어져 나가거나 깨어지기라도 했을것만 같은 생각도 들었다.

내가 어릴적 동네 바로 옆 언덕을 이룬 지형으로 저 계곡의 폭보다는 서너배가 넓은 작은 냇가가 있었는데 여름날 폭우가 내리거나 홍수가 날 만큼 많은 양의

물이 넘쳐 불어나면 정말 돌구르는 소리도 들으며 자랐던 시절도 있었다. 물이줄어들고 어쩌다 보면 우리동네 부근에 있던 큰 바윗돌이 아랫마을 부근 강가에

까지 떠내려가 자리잡은 모습들을 가끔씩 볼 수가 있었기 때문에 이 바윗돌의 정체가 참 흥미롭기도 했다.옆에서 보면 삼각형 같은 모양에 무게의 중심은

아랫쪽에 쏠리게되면서 글씨가 새겨진 면은 저절로 잘보이는 형태가될 수 있도록 경사면을 이루게 다듬어져 길 옆으로 세워둔 안내판의 경사각도와도 흡사한

모습이었다.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키지 못하는 대상이었을까? 인터넷 검색창을 두드려 봐도 찾아가는 길이 자세하게 나타나는 곳은 별로 없었다. 대충 어디쯤 일 것이

겠구나 라는 생각으로 지명을 중심으로 지도를 펼쳐보니 가장 근접하고 확실하게 믿을만한 곳이 바로 예비군 훈련장 이었다. 이전부터 시령봉표를 검색해 봐도

네비게이션에선 나타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경감로(慶甘路, Gyeonggam-ro) / 경주시 구황동 구황교네거리에서 시작하여, 감포읍을 거쳐, 전촌삼거리까지

연결하는 도로이다. 과거에는 천군로 이었으나, 2009년 12월 11일 도로명 주소 사업에 인하여 경감로로 지정되었다. 감포에서 추령터널 방향 기림사로 들어가는

안동(安洞)삼거리 직전 약 500m 지점에서 우측으로 들어가는 왕복 2차로 초입에 와읍리, 용동리,권이리를 알려주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아스팔트 도로를 따라 직진하면 용동교가 나오고 용동교 삼거리에서 계속 직진하다 보면 아스팔트 도로 차선이 없어지고 콘크리이트 포장도로가 이어진다.

이 도로를 끝까지 들어가면 마을이 나오고 마을에 도달하기 직전 양북예비군훈련장이 있다. 마을 공터에 주차를 하고 걸어서 들어가 보면 약 30여분이 소요

되는데, 어림 짐작으로 약 1.5 ~ 2Km 정도로 보면 될것이다. 아래 사진에서 처럼 크고 작은 사방댐이 나오고 두 번째 댐을 지나 약 3 ~ 4백여 미터 지점 계곡

바닥에  봉표석은 박혀 놓여 있었다.

 

 

 

 

 

 

 

 

 

 

 

 

 

 

 

 

감재(枾嶺)는 경주의 함월산 동편 용동리에서 포항 장기를 잇는 옛 길이라고 한다. 지금은 이 고개를 넘어서 다니는 사람이 없지만 조선시대까지는 가장 가까운

길이었다고도 한다. 감재(枾嶺) 입구에 있는 감골마을 사람들에 의하면 암행어사 박문수가 이곳을 지나다가 허기가 저 쓰러졌는데 꿈에 나타난 산신령이 보낸

호랑이의 젖을 먹고 기운을 차렸다는 이야기가 전한다고 한다. 호랑이의 양쪽 젖을 먹었다 하여 양바위골로 불리기도 했다는데......

 

감재(枾嶺), 감골이란 지명이 정겹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도 그럴것이  시령봉표(枾嶺封標) 枾嶺이 감나무 "시"자에 고개 령,고개 영 자를 쓰고 있으니

시령봉표(枾嶺封標)라는 이름이 붙여진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시령산성(枾嶺山城)은 포항시 남구 장기면과 경주시 양북면(陽北面)의 경계지점인데 경주에서 옛길을 따르면 감포길을 가다가 추령(楸嶺:관해동재)에서 부처재

(佛嶺)를 거쳐 기림사(祇林寺)계곡을 건너면 감재에 이른다.  이곳에 산성이 있고 장기와의 거리는 불과 5∼6km 밖에 되지 않는 직행길로 80∼90里 정도이다.
이 길은 경주에서 동북방향으로 포항과 감포의 중간지점이 된다고도 했다.

 

                                                                                                                                                         촬영일: 2014년 09월 20일(토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