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 (慶州 掘佛寺址 石造四面佛像)
경상북도 경주시 동천동(東川洞)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화강석제 불상 / 보물 제121호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동천동 산4번지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21호로 지정되었으며, 본존의 높이 3.51m, 미륵보살상 높이 1.61m, 석가여래상 높이 1.36m, 동면약사여래상 높이 2.06m이다.
큰 석주(石柱)의 4면에 조각된 불상으로, 서면에 아미타여래, 동면에 약사여래, 북면에 미륵보살, 남면에 석가여래의 상을 새겼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경덕왕이 땅 속에서 커다란 4면 석불을 발견하고, 이 곳에 절을 지었다고 한다. 서쪽 아미타여래는 3존상으로 본존은 신체만 석주에
조각하였고, 머리는 따로 만들었으며, 두 협시보살(脇侍菩薩)은 각각 다른 돌로 만들었다. 머리는 소발(素髮)인데 얼굴보다 크고 목에는 삼도(三道)가
명확하며, 어깨가 넓어 체구가 당당할 뿐더러 몸의 굴곡도 뚜렷하다. 어깨에 걸쳐 입은 법의는 얇게 밀착되었으며, 하체의 V자형 옷무늬는 간결하고,
군의(裙衣)의 아랫도리가 발목에 꼭 끼인 것이 특이하다. 대좌(臺座)는 반원통(半圓筒)이고, 상면에는 발을 올려놓고 있으며 앞면에 연꽃무늬를 조각하였으나
땅에 묻혀 있다.
왼쪽 보살은 머리의 앞면에 화불(化佛)이 있는 크고 높은 보관(寶冠)을 쓰고 있다. 오른쪽 보살은 가슴 위쪽의 파손이 심하고 얼굴이 없어졌으며, 목 위에
얹힌 보관에 정병(淨甁)이 표현되어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임을 알 수 있다. 동면상(東面像)은 결가부좌하고 몸 전체가 앞으로 숙여졌다. 숙인 얼굴,
긴 눈썹, 가는 눈, 세련된 얼굴 윤곽, 활기찬 신체 등은 종교적 긴장감이 충만한 표현이며, 석굴암 본존상과 비슷하다. 가슴과 무릎에 몇 가닥의 형식적
의문(衣紋)이 표현되었고, 광배(光背)는 두 가닥의 두광(頭光) ·신광(身光)이며 외연(外緣)에는 화려한 화염(火焰)무늬가 음각되었으며, 왼손에 약합(藥盒)을
들고 있어 동방약사임을 알 수 있다.
북면상(北面像)의 왼쪽이 양각상이고, 오른쪽은 음각상인데, 음각상은 마멸이 심하다. 왼쪽 보살상은 천의의 표현이 거의 없어지고 흐르는 듯한 율동감이
전신을 감싸며, 둥글고 예쁜 얼굴, 굴곡 있는 우아한 모습 등은 육감적인 처리를 정신적으로 승화시킨 신라조상사(新羅彫像史)에 손꼽히는 걸작이다.
남면상(南面像)은 원래 삼존상(三尊像)으로 만든 것이나, 일제강점기 때에 오른쪽 보살상과 본존상의 머리를 잃었다. 북면의 미륵상과 마찬가지로 굴곡진
신체의 맵시 있는 처리, 얇은 옷무늬의 흐르는 듯한 묘사로 인해 우수한 작품으로 꼽힌다.
굴불사지(掘佛寺址)
경상북도 경주시 동천동(東川洞)에 있는 신라 때의 절터.
굴불사 창건에 관한 설화로 《삼국유사》 권3의 <굴불산조(掘佛山條)>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경덕왕(景德王)이 백률사(栢栗寺)에 거둥하여
굴불산 밑에 이르자, 땅 속에서 불성(佛聲)이 들렸으므로 그곳을 파도록 명하여 큰 돌을 얻었는데, 4면에 불상이 새겨져 있음을 신기하게 여겨 그 자리에
절을 세우고 그 이름을 굴불사라고 했는데, 그것이 잘못 전해져 굴석사(掘石寺)라고 한다”. 이 곳에는 화강암(花崗巖)으로 된 사면석불상(四面石佛像:보물 121)
이 현재도 남아 있다.
촬영일: 2014년 07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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