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률사(栢栗寺)
경상북도 경주시 동천동(東川洞) 소금강산에 있는 절.
소재지: 경북 경주시 동천동 소금강산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佛國寺)의 말사이다. 법흥왕 14년(527)에 불교의 전파를 위하여 이차돈(異次頓)이 순교를 자청했을 때,
그의 목을 베자 흰 우유가 솟았고, 잘린 목은 하늘 높이 솟구쳐 올랐다가 떨어졌는데, 바로 그 떨어진 곳이 지금의 백률사 자리였다고 한다.
이를 본 사람들이 슬퍼하여 다음해인 법흥왕 15년(528) 그 자리에 절을 세우니, 그 절이 자추사(刺楸寺)로서 훗날 백률사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신라에서는 음이나 뜻이 같으면 쉽게 이름이 바뀌어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곧 자(刺)는 '잣'이니 백(栢)과 같고, 추(楸)는 '밤'이니 율(栗)과
같은 의미인 것이다.
헌덕왕 9년(817) 이차돈을 추모하여 석당(石幢)을 세웠으며,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이 절을 1600년경에 경주 부윤(府尹) 윤승순(尹承順)이 중건하고
대웅전을 중창한 기록이 있다. 대웅전 동쪽 암벽에 삼층탑이 음각되어 있으나 상륜부를 제외하고는 알아보기 힘들다. 신라시대의 작품이며 대웅전 앞에
탑을 건립할 자리가 없어 소금강산 암벽에 만들었다고 한다. 이 밖에도 경내에는 옛 건물에 쓰였던 것으로 보이는 초석과 석등의 지붕돌 등이 남아 있다.
대웅전에 봉안되었던 금동약사여래입상(金銅藥師如來立像:국보 28)과 이차돈의 석당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이곳에는
마애삼존좌상(磨崖三尊坐像)·마애탑(磨崖塔)·굴불사지석불상(窟佛寺址石佛像:보물 121), 기타 선원(禪院) 1동과 석탑·석등재(石燈材) 등이 있다.
자추사(刺楸寺)
이차돈(異次頓)의 순교를 기념하기 위하여 527년(법흥왕 14)에 창건한 사찰이다. 경상북도 경주시 동천동의 금강산(金剛山) 중턱에 있는 백률사(栢栗寺)가 곧
자추사였다는 설과, 금강산 정상으로부터 북쪽 20m쯤의 마애삼체석불(磨崖三體石佛)이 있는 곳을 자추사지로 추측하는 설이 있다.
527년 이차돈이 불법의 홍포를 위하여 순교하였을 때, 옥리가 그의 목을 베자 흰 젖이 솟았고, 그의 목은 금강산에 날아가 떨어져 그곳에 장사지냈다.
이를 슬퍼하던 내인들이 승지(勝地)를 택하여 절을 짓고 자추사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삼국유사』의 기록만으로는 자추사가 있던 곳을 정확히 알기 어렵다.
다만, 그 승지가 이차돈의 목이 날아가 떨어진 곳과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미루어, 순교 장면이 조각된 석당(石幢, 경주박물관 소장)이 세워졌었던 백률사가
자추사였을 가능성이 크다.
범종각(梵鐘閣)
불교 사찰에서 범종을 두는 당우(堂宇) 범종을 달아 놓은 전각을 말하며, 당호는 절에 따라 범종루, 종각, 종루라고도 하는데, 일반적으로 단층일 경우
각(閣)이라 하고 중층일 경우 루(樓)라고 한다. 규모가 큰 사찰에서는 중층으로 세워 법전사물(法殿四物)을 함께 두기도 한다. 전각의 외양은 대개 기둥과
목책이 있는 사각의 단층 건물이거나, 2층 누각형태이며, 범종각에 범종과 함께 두는 법전사물은 법고(法鼓)와 운판(雲板),목어(木魚)이다. 법고는 바닥에 두고
운판과 목어는 보나 도리에 매단다.
백률사(栢栗寺) 범종(梵鐘)의 유두(乳頭)
유곽(乳廓)은 윗부분의 네 곳에 있는 네모난 테이며, 그 안에는 각각 9개의 볼록 솟아 있는 꼭지가 있는데, 이것이 마치 젖꼭지 같다고 하여 유두(乳頭)라고 함.
백률사(栢栗寺) 범종(梵鐘)의음관(音管)과 용뉴(龍鈕)
음관(音管)은 용뉴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대나무 마디 모양의 소리 대롱이며, 용뉴(龍鈕)는 범종의 가장 위쪽에 있는 용의 모습을 한 고리로, 이곳에 쇠줄을 연결
하여 종을 매단다. 언제부터 였는지 나는 사찰에 들어서면 빠뜨리지 않고 한 번씩 들여다보는곳이 범종에 새겨진 문양인듯 하다. 이곳 백률사의 범종 역시
규모는 작지만 첫 눈에 들어오는 모습은 비천상을 연상하면서 들여다 봤는데......
이차돈의 순교
이차돈의 머리가 떨어졌다는 금강산은 토함산(동), 선도산(서), 남산(남), 낭산(중)과 함께 경주 5악의 하나인 북악으로 신라인들이 신성시 여기던 곳
이라고 한다. 이곳에 이차돈을 장사지내고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창건한 사찰이 바로 백률사라는데, 창건 당시의 이름은 자추사(刺楸寺)였다고도 한다.
이차돈은 박씨로 지증왕의 생부인 습보갈문왕의 손자라고 한다. 이름은 염촉(厭髑), 법흥왕이 신하들의 반대로 불교 공인을 이루지 못함을 보고 자신의 몸을
버려 뜻을 이루고자 했다. 왕이 이를 허락하지 않자 “모든 것 중에 버리기 어려운 것이 몸과 목숨[身命]입니다. 그러하오나 소신이 저녁에 죽어 불교가 아침에
행해지면 불법은 반드시 일어나고 성주(聖主)께서는 길이 편할 것입니다.”라며 허락을 얻는다.
이에 이차돈은 거짓으로 어명을 전해 천경림(天鏡林)에 절을 짓기 시작하고 법흥왕은 그것을 구실로 처형한다. 이차돈은 죽음에 앞서 “부처님이 신령하다면
내가 죽은 뒤 상서로운 일이 일어날 것”이라며 하늘을 향해 기도 했다. 목을 베자 머리가 금강산 꼭대기에 떨어졌고 잘린 목에서는 흰 젖과 같은 피가 솟았다고
하며, 하늘은 캄캄해지고 땅은 진동했으며 꽃비가 내렸다고 한다. 이에 왕과 신하들은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불교를 공인하였다고 하는데, 이때
이차돈의 나이 22세였다고 한다.
백률사 마애탑(栢栗寺磨崖塔)
높이 3.15m로, 경주시 동천동 소금강산(小金剛山)의 백률사(栢栗寺) 대웅전 앞 암벽에 선각(線刻)되었다. 탑신은 3층으로 이루어졌으며 각 층의 옥개석마다
3단의 층급받침이 있다. 기단은 너비 1.4m에 단층으로 조성되었고, 상륜부는 보주(寶珠)와 용차(龍車)가 생략되었다. 보존 상태가 양호한 편이나 1층 옥개석
부분에 누군가가 이름을 새겨 훼손한 자국 "兼尹尹秉寬(겸윤윤병관)"이 있다. 탑의 형식으로 미루어 통일신라 말기에서 고려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마애(磨崖)란?
자연 암벽에 부조(浮彫)나 선각(線刻) 등으로 조각한 것을 말하며, 부조(浮彫)는 조각에서, 평평한 면에 글자나 그림 따위를 도드라지게 새기는 것이며,
선각(線刻)은 선으로 새기거나 또는 그런 그림이나 무늬를 말하는 것이다.
암벽에 불상을 새긴 것을 마애불이라고 하듯이 암벽에 새긴 탑을 마애탑이라고 한다. 마애탑은 돌을 다듬어 쌓아 만든 석탑처럼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이차돈의 순교 설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백률사에 마애탑이 있다. 이 마애탑은 백률사 대웅전 앞의 거대한 바위에 새겨져 있는데, 신라시대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고 했다.
통일신라시대에 새겨진 것으로 여겨지며, 탑의 높이는 3.2m 정도 된다는데, 마애탑이 새겨진 바위는 대웅전과 불과 약 6.8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대웅전 앞의 공간이 좁아서 탑을 세울 만한 터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대웅전 앞 바위 면에 탑을 새겼을 것이다.
이 마애탑은 상륜부와 삼층 탑신부, 기단부까지 제대로 갖춘 탑 모양을 하고 있지만, 자세히 살펴 보아도 마멸이 심하여 눈에 잘 띄지도 않았다.
마애탑의 1층 지붕돌 부분에 한자가 깊게 새겨져 있었는데, '겸윤 윤병관(兼尹 尹秉寬)'이라 쓰여져 있으며, 이 글자는 후대에 와서 마애탑과는 무관하게
새겨진 것으로 보여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마애탑은 백률사외 경주 남산 탑골 부처바위의 구층마애탑과 칠층마애탑이 있으며, 탑골 입구와 절골 사이 언덕의 마애조상군 가운데 있는 오층마애탑,
대구 북구 읍내리 안양마을에 있는 구층마애탑과 경북 봉화군 물야면 북지리에 흔적만 남아 있는 작은 마애탑 정도를 들 수 있다고 한다.
경주 남산 탑골 부처바위에 있는 것은 목탑을 새긴 것으로, 탑의 구조나 형식이 석탑 형식인 백률사 마애탑과는 다르지만 백률사 마애탑은 나름대로 큰 의미를
지니고 있을것 같다.
마애탑의 1층 옥개석 부분에 인명(人名)이 조각되어 탑의 일부가 파손된 상태라고 한다. 1972年 7月 1日 土曜日 동아일보 7면에......
마애 三層塔 發見이란 기사의 내용으로 보아 발견된지 42년만에 난 처음 보게된 셈이다. 주로 이용하는 NAVER 검색창에 마애 三層塔 發見 으로 검색하면
뉴스 라이브러리 文化財管理局(문화재관리국) 백률寺岩壁(사암벽)서 마애三層塔(삼층탑) 發見(발견... 으로 확인해 볼 수도 있다.
백률사(栢栗寺)
삼국유사 제3권 탑상 제4(三國遺事 卷第三 塔像 第四)
계림(鷄林) 북쪽 산을 금강령(金剛嶺)이라 하는데 산의 남쪽에는 백률사(栢栗寺)가 있다. 이 절에는 관음보살상이 하나 있는데 언제 만들었는지 알 수 없지만
자못 영험이 있었다. 어떤 사람이 이러한 말을 하였다. “이것은 중국의 귀신 같은 솜씨를 가진 장인이 중생사(衆生寺)의 불상을 만들 때 같이 만든 것이다.”
또 세상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이 부처님이 일찍이 도리천(忉利天)에 올라갔다가 돌아와 법당에 들어갈 때 밟았던 돌 위의 발자국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부처님이 부례랑(夫禮郞)을 구출해 돌아올 때 보였던 자취이다.”
鷄林之北岳曰金剛嶺 山之陽有栢栗寺 寺有大悲之像一軀 不知作始 而靈異頗著 或云 是中國之神匠 塑衆生寺像時幷造也 諺云 此大聖曾上忉利天 還來入法堂時
所履石上脚迹 至今不刓 或云 救夫禮郞還來時之所視迹也
천수(天授) 3년 임진(서기 692) 9월 7일 효소왕(孝昭王)은 대현(大玄) 살찬(薩飡)의 아들 부례랑을 받들어 국선으로 삼았다. 따르는 무리가 1,000명이나 되었는데, 그중에서도 안상(安常)과 더욱 친하였다. 천수 4년[장수(長壽) 2년이다.] 계사(서기 693) 3월에 부례랑은 무리들을 거느리고 금란(金蘭)으로 놀러갔는데,
북명(北溟)의 경계에 이르렀다가 말갈에게 잡혀 갔다. 무리들은 모두 어쩔 줄 몰라 하며 돌아왔지만 유독 안상만이 홀로 추격하였으니, 이때가 3월 11일이었다. 대왕이 이 말을 듣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말하였다.
“선왕께서 신령스러운 피리를 나에게 전해주시어 지금 현묘한 가야금과 함께 궁궐 창고에 보관되어 있다. 그런데 어찌하여 국선이 갑자기 적에게 잡혀갔단
말인가?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가야금과 피리에 대한 일은 다른 전에 자세하게 실려 있다.]
이때 상서로운 구름이 천존고(天尊庫)를 뒤덮었다. 왕은 또 다시 더욱 두려워하며 이를 조사해보도록 하였다. 그랬더니 천존고 안에 보관되어 있던 가야금과
피리 두 보물이 모두 사라졌다. 왕이 말하였다.
“짐이 복이 없어 어제는 국선을 잃었고, 또 오늘은 가야금과 피리까지 잃었단 말인가?”
왕은 즉시 창고를 관리하던 김정고(金貞高) 등 5명을 가두었다. 그리고 4월에 나라 안에 사람들을 모집하여 말하였다.
“가야금과 피리를 찾아오는 자에게는 1년 조세를 상으로 주겠노라.”
5월 15일에 부례랑의 부모가 백율사 관음보살상 앞으로 나아가 여러 날 동안 저녁마다 기도를 드렸다.
그러자 갑자기 향을 놓는 탁자 위에 가야금과 피리 두 보물이 놓여 있고, 부례랑과 안상 두 사람도 불상 뒤에서 나와 이르렀다. 부모는 넘어질 듯 기뻐하며
어찌된 일인지 그 내력을 불어보았더니, 부례랑이 대답하였다.
“제가 포로가 되어서 적국의 대도구라(大都仇羅)의 집에서 목동이 되어 대오라니(大烏羅尼)[다른 책에서는 도구(都仇)의 집 종이 되어서 대마(大磨)의
들에서 가축을 길렀다고 한다.]라는 들에서 방목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용모가 단정한 한 스님이 손에 거문고와 피를 들고 오셔서는,
저를 위로하며 ‘고향 생각을 하느냐?’ 하시기에, 저는 저도 모르게 그 앞에 무릎을 꿇고는 ‘임금님과 어버이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하였습니다. 그러자 스님이 ‘그렇다면 나를 따라 와야 하느니라.’ 하시고는 저를 이끌고 바닷가로 가셨는데, 또 안상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스님은 곧
피리를 둘로 쪼개어 저희 두 사람에게 각각 하나씩 타게 하고는 자신은 가야금을 타고서 둥실둥실 떠서 돌아왔는데, 잠깐 사이에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리하여 이 일을 갖추어 급히 왕에게 아뢰었다. 왕은 매우 놀라며 사람을 보내 맞아들였다. 부례랑은 가야금과 피리를 가지고 대궐로 들어갔다. 왕은 금과 은
그릇 다섯 개씩 두 벌 각 50량과 비단 승복 5벌, 비단 3,000필과 밭 10,000경을 백률사에 바치어 부처님의 은덕에 보답하였다. 그리고 나라 안의 모든 죄인들을
용서하여 풀어주고 관리들에게는 벼슬 3계급씩을 높여 주었고 백성들에게는 3년 치 조세를 면제해 주었다. 백률사의 주지는 봉성사(奉聖寺)로 옮겨 머물도록
하였다. 부례랑을 봉하여 대각간(大角干)[신라 재상의 관직 이름이다.]을 삼고, 그 아버지 대현아찬(大玄阿飡)은 태대각간(太大角干)으로 삼고 어머니
용보부인(龍寶夫人)은 사량부(沙梁部)의 경정궁주(鏡井宮主)를 삼았다. 안상(安常)을 대통(大統)으로 삼고 창고 담당자 다섯 명은 모두 용서해 주고 각각
벼슬 5급을 올려주었다.
天授三年壬辰九月七日 孝昭王奉大玄薩飡之子夫禮郞爲國仙 珠履千徒 親安常尤甚 天授四年[卽長壽二年]癸巳暮春之月 領徒遊金蘭 到北溟之境 被狄賊所掠而去 門客皆失措而還 獨安常追迹之 是三月十一日也 大王聞之 驚駭不勝曰 先君得神笛 傳于朕躬 今與玄琴 藏在內庫 因何國仙 忽爲賊俘 爲之奈何[琴笛事 具載別傳]
時有瑞雲 覆天尊庫 王又震懼 使檢之 庫內失琴笛二寶 乃曰 朕何不弔 昨失國仙 又亡琴笛 乃囚司庫吏金貞高等五人 四月募於國曰 得琴笛者 賞之一歲租
五月十五日 郞二親就栢栗寺大悲像前 禋祈累夕 忽香卓上 得琴笛二寶 而郞常二人 來到於像後 二親顚喜 問其所由來 郞曰 予自被掠 爲彼國大都仇羅家之牧子
放牧於大烏羅尼野[一本作都仇家奴 牧於大磨之野] 忽有一僧 容儀端正 手携琴笛來慰曰 憶桑梓乎 予不覺跪于前曰 眷戀君親 何論其極 僧曰 然則宜從我來
遂率至海壖 又與安常會 乃批笛爲兩分 與二人 各乘一隻 自乘其琴 泛泛歸來 俄然至此矣
於是具事馳聞 王大驚使迎 郞隨琴笛入內 施鑄金銀五器二副 各重五十兩 摩衲袈裟五領 大綃三千疋 田一萬頃納於寺 用答慈庥焉 大赦國內 賜人爵三級
復民租三年 主寺僧移住奉聖 封郞爲大角干[羅之冢宰爵名] 父大玄阿飡爲太大角干 母龍寶夫人爲沙梁部鏡井宮主 安常師爲大統 司庫五人皆免 賜爵各五級
6월 12일에 혜성이 동쪽에서 나타났는데, 17일에 또 서쪽에서 나타났다. 그러자 천문을 담당하는 관리가 아뢰었다.
“가야금과 피리의 상서로움에 대해 작위를 봉하지 않아서 그러한 것이옵니다.”
그래서 신령스러운 피리를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으로 봉하였더니 혜성이 곧 사라졌다. 이후에도 영험하고 기이한 일이 많았지만 글이 번거로워 이루 다
기록하지 않는다. 세상에서는 안상을 준영랑(俊永郎)의 무리라고 하였지만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영랑의 무리에는 오로지 진재(眞才)와 번완(繁完) 등의
이름만 알려져 있는데, 이들 역시 알 수 없는 사람들이다.[다른 전에 상세히 보인다.]
六月十二日 有彗星孛于東方 十七日 又孛于西方 日官奏曰 不封爵於琴笛之瑞 於是冊號神笛爲萬萬波波息 彗乃滅 後多靈異 文煩不載 世謂 安常爲俊永郎徒
不之審也 永郞之徒 唯眞才繁完等知名 皆亦不測人也[詳見別傳]
농로에서 바라다보이던 신라 제41대 왕(재위 809∼826)의 무덤인 사적 제29호. 1963년 지정. 보호면적 17만 9750m2. 문화재지정명칭 신라헌덕왕릉.
촬영일: 2014년 07월 20일
'그룹명 > 문화유적유물산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불령봉표석(佛領封標石) (0) | 2014.09.21 |
---|---|
시령봉표석(枾嶺封標石) (0) | 2014.09.21 |
경주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 (慶州 掘佛寺址 石造四面佛像) (0) | 2014.07.24 |
이견대(利見臺) (0) | 2014.06.21 |
감은사지 삼층석탑 (感恩寺址三層石塔) (0) | 2014.06.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