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은사지 삼층석탑 (感恩寺址三層石塔)
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 감은사지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 국보 제112호
소재지: 경북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 55-3, 55-9
2기(基). 목탑의 구조를 단순화시켜 석탑 양식의 시원을 마련한 탑이다. 감은사는 『삼국유사』에 의하면 682년(신문왕 2)에 건립되었는데,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려고 이 절을 처음으로 지었으나 역사를 마치지 못하고 돌아가자 그 아들 신문왕이 완성하였다. 1962년에 국보 제112호로 지정되었다.
감은사의 지형을 살펴보면 비탈진 경사면에 절을 짓기 위하여 인공으로 공간을 마련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동해안에 이러한
대사찰과 거대한 삼층탑을 쌍으로 건립했을까. 『삼국유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한다.
대왕(문무왕)은 평시 항상 지의법사(智義法師)에게 말했다. "나는 죽은 뒤에 나라를 지키는 큰 용이 되어 불법(佛法)을 숭봉(崇奉)해서 나라를 수호하려 하오."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를 평정하고 당나라 군사의 위협마저 물리쳐 백성들을 오랜 전쟁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했지만, 남은 걱정은 동해안으로 침입하는
왜구의 침략이었다. 문무왕은 자신이 죽은 후 시신을 화장해 동해에 안치하면 해룡(海龍)이 되어 바다를 건너오는 왜구들을 물리치겠다고 유언하였고,
지의법사와의 대화 내용처럼 불법을 받들기 위하여 감은사를 창건하였다. 그리고 절 좌우에는 천사백여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우뚝 솟은, 통일신라시대
석탑으로는 가장 높고 우람한 2기의 삼층석탑을 세웠다.
감은사지석탑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세워지는 모든 삼층석탑의 시원(始原)이 되는 석탑이다. 석탑은 미륵사지석탑에서 본 바와 같이
백제에서 시작되었으나 그것은 단지 재료가 석재일 뿐 전체적으로 목탑의 구조를 그대로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복잡한 목조 구조를 단순화시킨 석탑
양식은 감은사지석탑에서 시작되었다. 그것이 성립된 시기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시점이라는 점은 또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지대석과 기단부에서 눈에 띄는 점이 있다. 동탑의 경우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서탑의 경우 탑 주변으로 인도 스투파의 베티카에 해당하는 일정한 너비의
탑구(塔區)가 마련되어 있다. 이를 따라 자연스럽게 탑을 돌 수 있으며 그 자체가 탑을 예배하는 탑돌이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는 목탑의 경우 기단 상부에
일정한 공간이 있어 그곳을 통하여 탑돌이가 가능하나 석탑의 경우에는 기단 위로 올라갈 수 없으므로 이러한 구조가 탄생된 것으로 생각된다.
감은사지석탑의 양식과 기존 석탑 양식의 가장 큰 차이점은 감은사지석탑의 기단이 이중기단이라는 점이다. 기단이 2중으로 되어 있다는 것은 목탑의 구조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중기단으로 말미암아 상대적으로 탑신이 지상에서 높아져 전체 구성에 있어 매우 높은 안정감을 준다.
감은사지삼층석탑의 동탑
감은사지석탑은 화강암으로 조성된 것이 아니라 화강암보다 입자가 약한 응회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변에서 생산되는 석재를 그대로 이용한 것이다.
전체적으로 사리장엄구를 안치한 3층탑신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돌을 짜맞추는 방식으로 조립되었는데, 돌과 돌 사이를 연결하기 위하여 쇠로 만든
나비장이 사용되었다. 기단과 1층탑신 그리고 2층탑신 내부는 잡석과 흙으로 단단히 채워져 있다.
대부분의 탑들이 상륜부는 물론 그것을 꿰뚫는 찰주도 남아 있지 않은데 비해 감은사지탑은 동서탑 모두 찰주가 남아 있다. 현재 노출되어 있는 찰주의
높이는 3.9m이나 해체·수리시 찰주를 들어낸 결과 제작 당시 전체 높이가 5.0m에 이르는 주조(鑄造)된 철주(鐵柱)로, 사리장엄구가 봉안된 3층탑신까지
연장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두 기의 탑은 전체적인 결구 방식과 쓰여진 석재의 수가 동일하지만 크기에 있어서는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즉 서탑에 비해 동탑의 각 부재가 조금씩 크다.
그 결과 양 탑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동탑이 더욱 괴체적(塊體的)이고 장중한 느낌이 든다. 1959년과 1996년 서탑과 동탑이 각각 해체·복원되는 과정에서 신라
금속공예의 정수인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 이 다량의 공예품을 통하여 감은사지석탑이 당시 신라뿐 아니라 동아시아에서도 인정받는 뛰어난 예술품이라는
점과 함께 국제적 우수성과 독창성이 다시 한 번 확인되었다. 이는 감은사지 삼층석탑이 위대한 시대 정신을 바탕으로 탄생된 명작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글 /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 미의 재발견 - 탑에서 발췌
감은사지삼층석탑의 서탑
촬영일: 2014년 06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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