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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강재(鳳岡齋)

도랑도랑 2014. 6. 12. 21:30

 

 

봉강재(鳳岡齋)

 

파평윤씨 시조의 사당. / 경북문화재자료 제201호

소재지: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기계면 기남길253번길 74(봉계리 552) 

 

1987년 12월 29일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201호로 지정되었다. 1752년 파평윤씨(坡平尹氏) 시조인 태사공(太師公) 윤신달(尹莘達:893∼973)의

묘소를 관리하기 위하여 창건한 사당이다. 경상북도 포항시 기계면 봉계리에 있다.

 

윤신달은 어려서부터 학문과 무예가 남달리 뛰어난 인물로, 고려 태조 왕건의 막료(幕僚)가 되어 고려의 건국에 큰 공을 세웠으며, 국기(國基)를

다지는 일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봉강재는 정면 6칸, 측면 4칸의 ㄱ자형 팔작지붕 겹처마 집으로, 조선 중기의 건축 양식을 잘 보존한 건축물이다. 치목 수법이 우수하며, 평면

구성에서 독특한 점이 있다.

 

28세손(世孫)인 윤광소(尹光紹)가 안동부사로 있을 때 헌금 50량과 목재 15칸분을 헌납하여 창건하였다. 그후 1762년 경상감사로 있던 26세손

윤동도(尹東度)에 의하여 수축(修築)되었고, 다시 1763년 경상감사 윤광안(尹光顔)과 안동부사 윤성대(尹聲大)가 위토(位土)를 늘리고 재사를

중수하였다.

 

 

 

 

 

 

재실 정면의 봉루암 현판

 

 

 

 

 

 

 

재실루 상단 봉강재ㆍ태사공분암(鳳岡齋ㆍ太師公墳庵) 현판

 

구봉산 아래 송림이 울창한 곳에 예부터 이 마을 사람들이 왕릉이라 칭하기도 한 큰 묘소 동측에 위치한 봉강재는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재실 정면에 봉루암

이라는 현판과 재실루 상단에 봉강재ㆍ태사공분암(鳳岡齋ㆍ太師公墳庵)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봉강재는 조선중기 건축양식을 잘 보존한 건축물로

평면구성에서 독특하고 치목수법이 우수하며, ㄱ자형 팔작지붕에 접처마로 정면 6칸, 측면 4칸의 구조로 되어 있다.

 

 

 

 

 

 

봉강묘(鳳岡廟)

 

서원이 훼철된 후 본채 뒤에 별묘신축과 태사공 위패를 이안(移安)하고 지금까지 춘향(한식일)과 동지다례를 봉행하고 있으며,

1982년 10여평에 지나지 않던 협소한 묘당(廟堂)을 헐어버리고 원래의 규모보다 확장하여 다시 지었다고 한다.

 

 

 

 

 

 

파평윤씨 시조 태사공의 분암영역(墳庵領域)인 재사본당(齋舍本堂) 봉서암(鳳棲菴)의 앞 마당에서 좌측의 작은 문을 나가보니 넓게 펼쳐진 초원위로

석물이 세워진 큰 묘가 보였고 우측의 길로 조금 올라가 보니 봉강묘가 있었다. 다시 작은 문을 들어와서 우측으로 펼쳐진 건물들을 구경해 보았다.

 

 

 

 

 

 

 

 

 

 

 

 

 

 

 

 

 

 

                                                                                               촬영일: 2014년 06월 04일 제6회 6.4지방선거일 투표를 마치고......

 

 

파평윤씨(坡平尹氏) 시조인 태사공(太師公) 윤신달(尹莘達 : 893~973)의 묘소를 관리하기 위해 1751년에 창건한 재사(齋舍)로서 28세손(世孫)인

윤광소(尹光紹)가 안동부사(안동부사)로 재임시 헌금 50량과 목재 15칸분을 헌납하여 창건한 후 27세손 윤동도(尹東도)가 경상감사(慶尙監司)

재직시(1762년) 수축(修築)하고 1763년 경상감사 윤광안(尹光顔)과 안동부사 윤성대(尹聲大)에 의해 위토(位土)를 늘리고 재사를 중수하였다.
태사공(太師公)은 어려서부터 학문과 무예가 남달리 뛰어났고 장성하여서는 고려 왕건의 막료(幕僚)가 되어 고려 건국(建國)과 국가기반을 다지는

일에 많은 공을 세웠다. 공(公)은 918년 신숭겸 등과 함께 왕건(王建)을 도와 궁예를 추방하고 고려 창건에 공을 세웠고, 후백제의 견훤을 복속 시킬

때와 신라 경순왕을 귀순 시킬 때에 공이 컸으며, 나아가서 견훤의 아들 신검을 토멸하여 후삼국(後三國)을 통합하는데 많은 공을 세워 삼국통일 후

건국 공로로 벽상삼한익찬공신(壁上三韓翊贊功臣)의 서훈(敍勳)과 삼중대광(三中大匡) 및 태사(太師)의 관직이 내렸다.

 


그 후 944년(혜종 1년)에 혜종(惠宗)이 공(公)을 두려워한 나머지 공을 신라 유민을 다스리는 경주대도독(慶州大都督)으로 내보내는 한편 공의 아들

선문(先文)을 인질로 하여 개경에서 봉직(奉職)케 함에 본의 아니게 혈육별리(血肉別離)의 고통을 겪게 된다.  30년 재임 기간 중 한 번의 반란도 없이

이역땅 경주에서 선정(善政)을 베풀다가 973년(광종 24년) 81세를 일기로 결국 임지(任地)에서 일생을 마치니 신라유민(新羅遺民)들은 공의 유덕(遺德)을

흠모(欽慕)하여 이 곳, 금닭이 알을 품은(금계포란지형 : 金鷄抱卵之形) 형상의 경주 기계현 벌치동(현 포항시 북구 기계면 봉계리) 구봉산(丘峯山)

아래에 예장(禮葬)하였다.그러나 이 묘소는 후손이 천리 원거리에 있었기에 실전 직전에 이 지방의 토호(土豪) 이하지(李廈榰)가 전래하던 묘비를

동강내어 땅속에 파묻고 투장(偸葬)을 감행하였다. 그 후 오랜 세월이 지나 영조 연간에 이르러 경주 종인 참봉 도(燾)가 전래하는 야설에 의하여 이를

탐지하고 요로에 알렸더니 당시 영부사 지완(趾完)과 판부사 지선(趾善), 판서 헌주(憲柱), 선지 봉조(鳳朝), 영장 봉정(鳳廷)과 경주부윤리(慶州府尹里)

등이 힘을 모아 심묘에 전력하였으나 확증을 잡지 못하다가 영조 13년(1737년)에 양래(陽來)가 경상감사로 부임하여 7일간에 걸쳐 전 묘역을 샅샅이

파헤쳐 묘비 동강을 발견함으로써 확증을 얻어 비로서 심묘하기에 이르렀고 이에 곧 봉분을 개축하고 석물(石物)을 다시 다듬어 세웠다.

 

그 후 1751년 광소(光紹)가 재실(齋室)을 창건하고 봉서암이라는 현판을 붙이고 승려를 상주시켜 묘역을 수호케 하다가 수 차례의 중수(重修)를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구봉산 아래 송림이 울창한 곳에 예부터 이 마을 사람들이 왕릉이라 칭하기도 한 큰 묘소 동측에 위치한 봉강재는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재실 정면에 봉루암이라는 현판과 재실루 상단에 봉강재ㆍ태사공분암(鳳岡齋ㆍ太師公墳庵)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봉강재는 조선중기

건축양식을 잘 보존한 건축물로 평면구성에서 독특하고 치목수법이 우수하며, ㄱ자형 팔작지붕에 접처마로 정면 6칸, 측면 4칸의 구조로 되어 있다.
평면구성은 ㄱ자형으로 타지방의 일반적인 평면과 약간의 차이가 발견된다. 전체적으로 보아 깨끗한 감을 주고 유지관리에 세심했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다.대문을 들어서면 잘 다듬은 화강석 기단 위에 화강석 정평주초(定平柱礎)를 놓고 원주(圓柱)를 세운 정면 6칸, 측면 4칸의 익공식 3량가(樑架)

ㄱ자 팔작와가(八作瓦家) 겹처마로 구성되어 있다.
평면상으로는 통문 5칸의 온돌 강당 전면에 툇마루를 놓고 우측에 중문의 원로인이 거처하는 고문실이 온돌 2문으로 연립하고, 그 전면에 통문 루가

강당 우측 ㄱ자 평면 끝에 자리하고 있다.강당의 좌측단 온돌 1칸은 1977년 보수할 당시 부엌칸을 개수 변경한 것이다. 강당 천정은 고미반자로 처리하였고

루(樓)는 처마도리 위에 대들보를 걸고 그 위에 판대공을 이용하여 원형 종도를 받는 3량(樑)을 채택하고 있다. 기둥은 모두 원주를 쓰고 도리도 모두

굴도리를 사용하였으며 주요 구조부재(構造部材)의 치목(治木)은 주로 도끼나 자귀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재사 전면 좌우측에 동서재는 1950년대에 건립된 것으로 구조적으로 별다른 특색이 없고 각주에 납도리를 사용한 홑처마 박공와가로 구성되어 있다.

재사(齋舍) 우측의 회의실은 1981년 신축한 철근 콘크리트 라멘조(造)로 지붕은 겹처마 팔작와가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통문 온돌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글 : 지역정보포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