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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불의 머리는 왜 없어졌을까?

도랑도랑 2014. 2. 25. 21:04

 

 

석불의 머리는 왜 없어졌을까?

 

1965년 경주 분황사(芬皇寺)를 발굴 조사할 때, 절 안에 있는 우물 속에서 통일 신라시대에 만든 석불들이 나왔다. 그런데 한결같이

머리가 잘려진 것들이었다. 불상의 머리는 왜 없어진 것일까? 그 원인으로는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를 들 수 있다. 지진이 나면

받침대 위에 있던 불상이 굴러 떨어지는데, 약한 부분인 목이 부러지기 쉽다. 또 몽고군의 침입, 왜란, 호란과 같은 전란(戰亂)에 의해 피해를 입기도 한다. 유교(儒敎)를 국가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시대는 일부러 불상을 훼손한 적도 있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에는 간혹 땀을 흘리는 불상에 관한 기록이 보인다. 이러한 일이 나면 유생(儒生)들은 세상을 현혹시키는 것으로 간주하여 불상을

파괴했다. 목불은 태우고, 석불이나 금동불은 우물, 저수지, 바다에 던져 버렸다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머리를 잘라

관청에 신고하기도 했다. 분황사 우물 속에서는 머리가 없는 불상의 몸체에 비해 적은 수의 머리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 머리 없는 불상들은 머리가 잘리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깊은 우물 속에 버려지는 수난을 껶었다는 내용으로 안내판 설명문은 

적고 있다.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 / 국보 제29호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가장 큰 종으로 높이 3.75m, 입지름 2.27m, 두께 11∼25㎝이며, 무게는 1997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정밀측정한 결과 18.9톤으로 확인되었다.


신라 경덕왕이 아버지인 성덕왕의 공덕을 널리 알리기 위해 종을 만들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뒤를 이어 혜공왕이 771년에 완성하여 성덕대왕신종이라고 불렀다. 이 종은 처음에 봉덕사에 달았다고 해서 봉덕사종이라고도 하며, 아기를 시주하여 넣었다는 전설로 아기의 울음소리를 본따 에밀레종이라고도 한다.

 

종의 맨 위에는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音筒)이 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 동종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구조이다. 종을 매다는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는 용머리 모양으로 조각되어 있다. 종 몸체에는 상하에 넓은 띠를 둘러 그 안에 꽃무늬를 새겨 넣었고,

종의 어깨 밑으로는 4곳에 연꽃 모양으로 돌출된 9개의 유두를 사각형의 유곽이 둘러싸고 있다. 유곽 아래로 2쌍의 비천상이 있고,

그 사이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가 연꽃 모양으로 마련되어 있으며, 몸체 2곳에는 종에 대한 내력이 새겨져 있다. 특히 종 입구 부분이 마름모의 모서리처럼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어 이 종의 특징이 되고있다.

 

통일신라 예술이 각 분야에 걸쳐 전성기를 이룰 때 만들어진 종으로 화려한 문양과 조각수법은 시대를 대표할 만하다. 또한, 몸통에

남아있는 1,000여자의 명문은 문장뿐 아니라 새긴 수법도 뛰어나, 1천 3백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손상되지 않고 전해오고 있다.

                                                                                                                                               (문화재청 문화재검색에서 ......)

 

 

 

 

 

범종(梵鐘)

 

종(鐘)은 시간을 알리거나 사람들을 모을 때, 그리고 의식을 거행할 때 쓰였다. 특별히 절에 있는 종은 불교를 의미하는 '범(梵)'를 붙여

범종이라고 부른다. 이 범종 소리는 부처님의 말씀에 비유되기도 하며, 이 소리를 듣게 되면 지옥에 떨어져 고통 받던 중생까지도 구제 받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보통 한자로 종하면 '쇠 금(金)'변에 '아이 동(童)'자가 붙은 '鐘(종)'자를 쓴다. 중국이나 일본 종을 일컬을 때는 이렇게 쓴다. 하지만 우리나라 종을 지칭할 때는 '쇠 금(金)'변에'무거울 중(重)'자가 붙은 '鐘(종)'를 쓴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종에 새겨진 글씨나 기록에 '鐘(종)'자가 쓰였기 때문이다. 중국, 일본 종과 우리나라 종은 쓰는 한자가 다를 뿐만 아니라 그 모습에서도 많은 차이가 있다. 우선 종을 매다는 종뉴(鐘紐)(용 모양을 하고 있다하여 용뉴(龍鈕) 라고도 함)는 중국식의 머리가 둘 달린

용이 아니라, 머리와 다리를 힘차게 뻗치고 있는한 마리의 용이다. 이 종뉴 옆에는 중국이나 일본 종에는 없는 음통(音筒) (용통(甬筒), 음관(音管)이라고도 부름)이 있다. 또한 중국 종이나 일본 종과 달리 종의 위아래에는 보상화무늬나 모란당초무늬를 새긴 띠(문양대(文樣帶)와 4개의 유곽(乳廓),(연곽(蓮廓)이라고도 함)이 있으며, 유곽 내에는 각각 9개씩, 총36개의 유두(乳頭)(연꽃봉오리 형태와 같아 연뢰(蓮蕾)라고도 부름)가 있다. 그리고 비천상(飛天像)과 종을 치는 부분에 당좌(撞座)가 새겨져 있다.

 

                                                                                                                                                        (안내판 설명문에서 발췌)

 

 

 

당좌(撞座): 종을 칠 때에 망치가 늘 닿는 자리.

유곽 아래로 2쌍의 비천상이 있고, 그 사이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가 연꽃 모양으로 마련되어 있으며,

몸체 2곳에는 종에 대한 내력이 새겨져 있다.

 

 

 

 

성덕대왕신종에 새겨진 글은 무슨 내용일까?

 

성덕대왕신종에는 두 군데에 글이 새겨져 있다. 한 면(현재 동면)에는 성덕대왕신종을 만들게 되기 까지의 기록인 산문이 있고,

그 반대 면(현재 서면)에는 네 글자씩 50줄로 된 운문과 글을 짓고 쓴 사람, 종을 만든 사람 등이 새겨져 있다.  산문은 "성덕대왕신종지명(聖德大王神鍾之銘)"으로 시작하고 있다. 이로써 종의 이름이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임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그 다음의 내용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신라 경덕왕(景德王) (재위 742∼765)이 선대왕인 성덕왕(聖德王)(재위 702 ~ 737)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구리 12만 근으로 큰 종을

만들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승하(昇遐)하자, 경덕왕의 아들 혜공왕(惠恭王)(재위 765 ~ 780)이 즉위 7년만인

대력(大歷)(중국 당나라 대종(代宗)의 연호) 6년(771) 신해년(辛亥年) 12월 14일에 종을 완성하였다고 한다. 운문은 우선 삼국을

아우른 신라를 예찬(禮讚)하였다. 이와 더불어 나라 구석까지 성스러운 교화(敎化)를 펴 모든 것이 새롭게 뻗어나게 하고, 다시는

흔들리지 않을 질서를 기반으로 만대의 번영을 누리자는 각오와 다짐을 적고 있다고 한다.

 

                                                                                                                                                       (안내판 설명문에서 발췌)

 

 

 

비천(飛天)


천상에 사는 천인, 천녀 혹은 천(天). 천은 복수의 의미가 있으며, 보통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초인간적인 힘이 있고 자유롭게

날 수 있다. 보통 부처가 설법하거나 보살이 머무는 곳에서 허공을 날면서 꽃을 뿌리거나 악기를 연주하며 공양한다.

 

인도 미술의 초기엔 남녀 한쌍이 날면서 산화공양(散華供養)하는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인도신화에서 이들 신은 하급의 신으로, 특히 여성신 즉 천녀는 아프사라사타(또는 데바타)라고 불렸다. 서양의 천사와는 달리 날개 없이 나는 모습이 인도 비천의 특색이다. 그 후 불교 미술이나 힌두교 미술에서도 비상하는 모습으로 많이 등장한다.

 

중국과 한국에서는 신선같이 자유롭게 비상하는 모습으로, 천의(天衣)를 길게 펄럭이면서 비스듬히 내려오는 형상으로 표현되었다. 한국에서는 고구려 고분벽화와 백제 무령왕릉의 왕비두침에서 나타나기 시작하여 통일신라시대에는 주로 불상의 광배나 대좌, 범종. 사리구와 같은 금속공예품 등에 장식문양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대표적으로 통일신라시대의 <상원사上院寺 동종>(725)과 <성덕대왕 신종>의 비천상이 유명하다.

 

 

 

 

 

                       

성덕대왕신종의 명문(聖德大王神鍾銘文)

 

 

 

 

 

 

 

                                                                                                                                                           촬영일: 2014년 2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