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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 미륵곡석불좌상(慶州南山彌勒谷石佛坐像)

도랑도랑 2014. 1. 5. 08:57

 

 

경주 남산 미륵곡석불좌상(慶州南山彌勒谷石佛坐像)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36호로 지정되었다.

전체 높이 4m, 불상 높이 2.35m, 광배(光背) 2.7m이다.

경주 남산 미륵골에 있는 보리사(菩提寺)에 있는 석불좌상이다.

 

 

 

                 광배와 대좌(臺座)를 모두 갖추었고, 본질적으로 석굴암 본존불(本尊佛)과 비슷하나

                 보다 많이 형식화되어 있다. 앞면에는 당초문과 보상문을, 뒷면에는 약사불을 좌상으로

                 조각한 보리사 마애석불(경북유형문화재 제193호)이 있다.

 

 

 

                 얼굴은 둥글지만 풍만하지 않으며, 가는 눈과 날카로운 코, 뚜렷한 입에 침잠(沈潛)한

                 웃음이 8세기 신라인의 정신적 고고함과 비범한 조각솜씨를 보여준다. 귀는 길며 목에는

                 명확한 삼도(三道)가 있다. 어깨는 약간 움츠렸으며 가슴은 풍만한 편이나 평판적(平板的)인데,

                 이는 신체의 비율과 함께 8세기 불상의 이상형에서 9세기 양식으로의 이행을 보여준다.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손과 팔은 연약하게 표현되었고, 하체는 딱딱하게 처리되었으며,

                 통견(通肩)의 법의(法衣)는 힘없이 늘어져 있는 점 등이 간결한 수법은 이미 사라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보리사(菩提寺)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말사이다.

886년(신라 헌강왕 12)에 창건했으며, 경주시 남산에 있는 여러 사찰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삼국사기》에 ‘헌강왕과 정강왕의 능이 보리사의 동남쪽에 위치한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왕릉의 위치를 정하는 기준이 될 정도로 유서 깊은 사찰이었으나 이후의 연혁이 전하지 않아 자세한 역사는 알 수 없다고 한다.


 

 

오랫동안 폐사로 남아 있던 것을 1911년 보경사(寶鏡寺) 비구니 박덕념(朴德念)이 중창하고, 1932년 비구니 남법명(南法明)이 중수하였다. 1977년에는 비구니 추묘운(秋妙雲)이 불사를 시작하여, 1980년 대웅전과 선원·요사채 등을 세우고 비구니 사찰로 만들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과 산신각·선원·종각·요사채 등이 있으며 유물로는 보리사석불좌상과 마애불이 유명하다.


 

 

그 중 보리사 석불좌상은 경주 남산에 있는 불상 중에서 가장 우수한 것으로 평가된다. 총 높이 4m, 불상 높이 2.35m, 광배 2.7m로 앞에는 당초문과 보상문·화불 등의 무늬를 새겼고, 뒷면에는 약사불을 좌상으로 조각하였다. 주존불의 수인이 항마촉지인이라 석가모니불로 볼 수도 있으나, 뒷면에 동쪽의 부처인 약사불을 배치한 것으로 보아 앞쪽은 서쪽의 부처인 아미타불로 보는 것이 옳다. 보물 제136호로 지정되었다.
 

 

 

한편 절 남쪽 산허리로 난 오솔길을 따라 35m쯤 가면 바위에 새긴 마애석불이 있다. 1.5m의 좁은 감실 안에 90cm 크기로 새겨진 이 불상은 조각이 거칠고 아래 부분이 생략되어 공중에 떠 있는 듯하다.

신라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15시 30분경 어느단체에서 답사나온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많은 사람들이 얼른 답사를 마치고 내려

가야 사진 몇 장이라도 담아 갈텐데 하는 생각으로 뒷전에서 해설사의 설명을 어깨너머로 들으며 지켜보고 있었는데 소낙비 그친 여름날에나 볼 수 있는 무지개가 저 멀리  비쳐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일년 중 가장 춥다는 소한을 하루 앞 둔 한겨울에 무지개 구경을 할 수가 있었다. 이후 보리사를 내려오면서 우측으로 오르는 가파른 오르막길 따라 조금 올라가서 보리사마애여래좌상을 둘러보고 내려와서 시내 근처 해장국집에서 허기를 채우고 돌아오면서 솓아지던 비는 다음날인 5일 아침까지 내렸다. 

 

 

 

 

 

 

 

 

 

 

 

 

 

 

보리사마애석불(菩提寺磨崖石佛)

 

불상 높이 1.2m.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93호.

암벽을 배 형태로 파내어 감실(龕室 : 궁전 안의 옥좌 위나 불좌 위에 만들어 다는 집 모형)을 조성한 뒤

얕게 부조(浮彫 : 돋을새김)한 여래좌상이다.

 

 

 

 

통일신라시대의 마애불로서는 드물게 보는 온화한 얼굴 표정과 단정한 자세에 의해 명상에 잠긴 부처의 자비심을 효과적으로 표현한 마애불이다. 네모진 얼굴은 살이 쪄 풍만한 모습이다. 명상하는 눈은 가늘게 눈매를 표현하고 작은 입은 양 입가를 깊이 파내어 이른바 ‘고졸(古拙 : 기교는 없으나 예스럽고 소박한 멋이 있음)의 미소’를 띠고 있다.이러한 온화한 미소는 통일신라시대 석불에서는 드물게 나타나는 것이다. 눈매가 날카롭고 이목구비가 뚜렷하여 마치 미청년을 연상시키는, 같은 보리사 경내의 석불좌상과는 자못 다른 느낌을 준다.

 

 

 

머리는 나발(螺髮 : 부처의 머리카락. 소라 껍데기처럼 틀어 말린 모양)이 뚜렷하고 육계(肉髻 : 부처의 정수리에 있는 뼈가 솟아 저절로 상투 모양이 된 것)는 삼각형이다. 하지만 머리와의 윤곽선이 불분명하다.

 

세부 굴곡까지 표현한 두 귀는 길어서 어깨까지 닿았으며, 목에는 삼도(三道)가 두 겹으로 부조되어 있다.

신체는 방형(方形 : 네모반듯한 모양)의 구조물을 포개 놓은 듯 평면적이다.

 

전체 윤곽은 얕게 부조한 반면, 옷주름은 내의의 가슴 띠를 제외하고는 모두 선조(線彫 : 가는 선으로 쌓아 올리거나 선을 파 들어가는 조각법)로 표현하였다. 법의(法衣 : 중이 입는 가사나 장삼 따위의 옷)는 통견(通肩 : 어깨에 걸침)이다. 직사각형으로 길게 트인 가슴의 옷깃 사이로 두툼하게 새긴 내의 자락이 드러나 있다.

 

 

 

                 양손은 복부에서 곧게 드리워진 옷자락에 가려 수인(手印)을 확인할 수 없다.

                 이처럼 대의 자락이 가슴의 옷깃 속에 한 번 여며진 뒤 복부 중앙으로 곧게 드리운 착의(着衣)

                 형식은 신라 조각에서 처음 나타나는 예이다.

 

                 가부좌(跏趺坐)한 하체 밑으로 연꽃무늬를 얕게 선각(線刻 : 선으로 새김)하였다.

                 배 모양의 감실 자체가 광배(光背 : 회화나 조각에서 인물의 성스러움을 드러내기 위해서

                 머리나 등의 뒤에 광명을 표현한 둥근 빛)를 의도한 듯 달리 광배는 표현되지 않았다.

 

 

 

                  방형의 풍만한 얼굴, 특이한 선정의 자세, 신체 굴곡이 무시된 평면적인 모델링(modelling),

                  선조화된 옷주름 선 등에서 8세기 후반의 보리사 경내 석불좌상과 동일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촬영일: 2014년 1월 4일 (토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