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각사(麟角寺)
경상북도 군위군 고로면 화북리 612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桐華寺)의 말사이다. 643년(선덕여왕 12)에 원효(元曉)가 창건하였다.
절의 입구에 깎아지른 듯한 바위가 있는데, 속전(俗傳)에 기린이 뿔을 이 바위에 얹었다고 하여 절 이름을
인각사라 하였다고 한다.
그 뒤 1307년(충렬왕 33)에 일연(一然 : 普覺國師)이 중창하고 이곳에서 『삼국유사』를 저술하였다. 당시
이 절은 크고 높은 본당을 중심으로 하여 그 앞에 탑, 좌측에는 회랑, 우측에는 이선당(以善堂) 등이 있었고,
본당 뒤에 무무당(無無堂)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일연은 총림법회(叢林法會) 등 대규모의 불교행사를
개최하였다. 시대는 미상이나 조정의 명으로 김용검(金龍劍)이 절을 크게 중건하고 밭 100여 경(頃)을 헌납
하였다. 조선 중기까지 총림법회를 자주 열고, 승속(僧俗)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하나, 그 뒤의 역사는 전하지 않는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법당과 2동의 요사채 뿐이다. 중요문화재로는 보물 제428호로 지정된 인각사보각국사탑 및 비(麟角寺普覺國師塔─碑)가 있다. 이 탑비는 1153년(의종 7)에서 1155년 사이에 사승(寺僧) 죽허(竹虛)가
왕희지(王羲之)의 글씨를 모아서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의 병화로 글자의 훼손이 심하여 알아보기 어렵다. 그 밖에도 법당 앞에는 삼층석탑이 있고,
정조탑 앞에는 높이 1.5m의 석불이 있으며, 절 앞 길가에는 만월당(滿月堂)과 청진당(淸眞堂)의 석종형 부도가 있다.
인각사 보각국사탑 및 비(麟角寺普覺國師塔─碑)
1965년 9월 1일 보물 제428호로 지정되었다. 재료 화강석, 높이 약 2.42m이다.
자연석으로 된 지대석 위에 8각 하대석이 놓였고 상면은 급경사를 이루었으며 중앙에 얕은 8각 괴임이 표출되었고 이 괴임과 연접하여 작은 연꽃이 조각되어 있다. 중석(中石)도 8각이며 각면에는 넓은 광곽(框廓)을 마련하고, 그 안에 동물상이 양각되었으나 명료하지는 않다. 상대석도 8각이지만 거의 원형에 가까워졌고 밑에는 얕은 받침이 있으며, 주위에는 소대(素大)한 연판(蓮瓣) 8엽(葉)이 두 줄 음각되어 있다.
탑신도 8각이며 앞면의 1면에는 광곽 안에 “普覺國師靜照之塔”이라고 쓴 자경(字徑) 6cm의 해서(楷書)로 된
제명(題銘)이 있고, 후면에는 문비형(門扉型)이 있으며 남은 6면에는 사천왕상, 연좌 위의 보살입상이
양각되었다. 상륜부에는 보개 앙련(仰蓮)과 화염에 싸인 보구(寶球)로 된 1석이 놓였다. 탑비는 크게 손상되었고 1295년(충렬왕 21)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한다.
최근에 이렇게 문화재나 유적, 유물에 관심이 생기고 즐겨 찾는 이유중의 하나가 오랜 세월속의 풍파를 견디고
이겨낸 이끼덮인 정겨움과 아름다움이 좋고 여가 활용의 묘미를 더해주는 휴식의 시간을 가질수 있다는 점이
좋아서 일지도 모른다.
가까이 있으면서도 언젠가 그 앞길을 지나쳐 다니면서도 인각사가 멀리 있는줄로만 알았고 최근엔 복원 공사중
이란 이야기 또한 들어왔다. 산령각 앞에 섰을땐 어렴풋이 한번쯤은 와 봤던 흐릿한 기억속의 느낌으로 살아나는듯 하기도 했다. 그렇게 오랜 세월속의 유물, 유적지엔 반드시 이끼낀 석탑이나 기왓장들이 보는 느낌 만으로도
좋았는데 麟角寺 普覺國師塔을 마주하는 순간 금방 흙속에서 발굴해낸 모습처럼 깨끗한 모습에서 기분은 반감된듯 하지만 여기엔 그 동안의 많은 사연들이 숨어 있기도 했던 것이다.
인각사에는 일연의 무덤이라고 할 수 있는 보각국사정조지탑(普覺國師靜照之塔)과 생애를 기록한 보각국사비가 남아 있다. 비문에는 저서가 100권에 이른다고 적어 놓았지만,‘삼국유사’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국존(國尊)으로 추앙받았지만,‘삼국유사’를 지었기 때문은 아니라는 뜻이라고 한다.
일연의 부도와 비가 겪은 수난의 역사를 보면 ‘너무’ 좋은 것이 어째서 좋지 않은지를 실감할 수 있다고 전문기자가 쓴 글을 읽으면서 공감을 한다.
부도는 일연이 세상을 떠난 석달 뒤 인각사에서 동남쪽으로 2㎞쯤 떨어진 능선자락에 세워졌고, 그곳은 일연이 보아 두었던 대단한 명당이라고 한다. 하지만 조선 후기 불교에 대한 유림의 탄압이 극심하던 시절 한 양반집안이 명당을 찾은 끝에 일연의 부도를 무너뜨리고 무덤을 들였다는것이다.
도진(道晉1850∼1902)스님 등이 나서 제자리에 세워놓았으나, 또 다른 양반이 명당값을 쳐서 산을 비싸게
사들인 뒤 일연의 부도를 60m 떨어진 곳에 옮겨놓고는 역시 조상의 산소를 만들었다고 한다.
부도는 한일합병 이후 몇년이 지나지 않아 사리장치를 탐낸 못된 사람들이 다시 무너뜨렸고, 이후 반세기 가까운 동안 방치되어 왔다는 것이다.
1958년 3월 현장을 찾은 미술사학자 이홍직은 “나는 이 부도를 냉정한 미술품만으로는 볼 수 없는 심정으로 다시 한번 보살피며 사리가 놓였던 구멍을 응시하였다.…되돌아오는 차중에서 나는 침통한 감상에 묵묵하였다.”고 참담한 심경을 토로했다는 기사의 내용이기도 하다.
부도는 1962년 인각사 정문 앞으로 옮겨 세워졌다고 한다. 하지만 사리공이 비어있는 것도 모르는 무지한 도굴꾼이 한차례 더 손을 댔다고 하며, 1978년에는 명부전 앞으로 이전됐는데, 최근 인각사가 유명세를 떨치면서 복원을 위한 발굴조사가 벌어지는 바람에 임시장소로 옮겨졌으며,
보각국사비는 1295년 8월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유명한 문인 민지(閔漬)가 왕명으로 지은 비문은 지금
흔적만 드문드문 남았을 뿐 차라리 바위조각이라고 해야 좋은 몰골이란다.
중국의 서성(書聖) 왕희지(307∼365) 글씨를 집자한 까닭에 무절제한 탁본이 계속되면서 크게 닳았다는 것이다.
비석을 갈아마시면 일연의 신통력으로 과거에 급제한다는 소문이 나돌았고, 벼룻돌로 쓴 작자도 있어 벌써 1760년 이전에 열몇쪽으로 깨졌다고 한다. 좋은 글씨와 비석으로 추모하려 했던 것이 오히려 화근이 되었다는 것이다.
인각사삼층석탑 (麟角寺三層石塔)
탑의 양식은 전형적인 신라탑의 양식을 이어 받은 삼층석탑으로 보기 드물게 상륜부 일부가 남아 있다.
3층의 옥개석 위에는 노반(露盤)과 복발(覆鉢), 앙화(仰花) 등이 차례로 놓여 있다. 그 위에 보륜(寶輪)이 얹혀져 있는데 앙화와 마찬가지로 문양이 많이 마멸되어 있다. 보륜의 위에는 불꽃 모양의 장식물이 이어져 있는데, 상륜부의 다른 부재에 비해서 석질이 달라 원래 탑재가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기단의 우주하단에 있는 재목을 서로 이을 때 쓰는 나뭇조각 자국이나 갑석과 면석이 이완되면서 보이는 적심석을 볼 때 한번 해체되었다가 조립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문화재청 자료에서)
촬영일: 2013년 9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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