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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출지(書出池)

도랑도랑 2013. 9. 16. 05:52

 

 

서출지(書出池)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에 있는 연못.

 

지정면적 7,021㎡. 사적 제138호. 월성(月城)에서 남천(南川)을 따라 남산동록(南山東麓)으로 접어들면 정강왕릉(定康王陵)을 지나 남산리(南山里)에 이른다.


그 마을 한가운데에 삼층석탑 두기가 있고 동쪽에 아담한 연못이 보이는데, 이곳이 사금갑(射琴匣)의 전설이 간직된 서출지이다.


즉, ≪삼국유사≫ 기이(紀異) 제1 사금갑조에 실려 있는, 신라 21대 소지왕(일명 비처왕)이 즉위 10년(488)에 못 속에서 나온 노인의 편지 때문에 죽을 위기를 넘겼다는 전설을 간직한 곳이다.


≪삼국유사≫에 적힌 내용을 살펴보면 이 연못은 인위적으로 꾸며진 원지(苑池)가 아니라 마을 밖에 자연적으로 생겨난 못으로 보이며 곡지(曲池)의 생김새를 가지고 있다. 옛이름은 양기못[壤避池]이었는데 사금갑의 전설이 생겨난 뒤 서출지로 이름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자연 그대로의 유수지(溜水池)이기는 하나 주변의 경관이 수려하여 경주 부근에서는 보기 드문 경승지가 되고 있으며 조선조로 접어들어서는 1664년(현종 5)에 임적(任勣)이라는 사람이 물 위로 누마루가 돌출한 팔작지붕의 건물을 지어 글을 읽는 한편 경관을 즐겼다고 한다.


현재 이 건물은 폐가가 되기는 했으나 서출지의 서북쪽 구석진 물가에 소박하면서도 우아한 자태를 유지하고 있어서 연못의 경관을 돋보이게 해주고 있으며, 추녀에는 ‘二樂堂’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건물을 감싸듯이 우거진 여러 그루의 팽나무 고목과 물가의 배롱나무는 이 못에 원지에 못지않는 아름다움을 부여하는 구실을 하고 있다.

 

 

 

 

경주남산(慶州南山)

 

고위산(494m)과 금오산(468m) 2개의 봉우리가 솟아 있다. 남북 8㎞, 동서 4㎞의 크기이며 완만한 동남산

골이 깊고 가파른 서남산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40여 계곡이 있고, 동쪽에는 낭산(狼山)·명활산(明活山),

서쪽에는 선도산(仙桃山)·벽도산(碧桃山)·옥녀봉(玉女峰), 북쪽에는 금강산(金剛山)·금학산(金鶴山)이 솟아 있다. 뿐만 아니라 토함산(吐含山) 줄기가 동해를 막는 성벽 구실을 하고 있어 남산은 옛 서라벌을 지키는 요새로서

훌륭한 역할을 하였다.

 

2013년 9월 15일 추석 나흘 남겨 놓은 하늘 새파란 모처럼 한가한 휴일날이었다.

유난히도 무덥던 여름 지나간 자리 지난 봄 찾아보았던 경주남산의 유적지에 다시 흥미가 생겨났다.

세상에서 말하는바 동남산 유적으로 신선바위(神仙巖)에는 반가상(半跏像)을 한 보살상이 있다고

했는데 지난 봄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茸長寺址磨崖如來坐像)을 보고난 이후 국보 제312호 경주 남산

칠불암 마애불상군(慶州南山七佛磨崖佛像群)과 보물 제199호 경주 남산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 (慶州

南山神仙庵磨崖菩薩半跏像)을 보고 와야지 하면서 도착한 곳 동남산주차장 관광안내도 옆엔 동남산관광

안내소가 자리잡고 있었다. 휴일날이지만 연세들어 보이는 아저씨 한분이 친절한 설명을 해주셨고

비치되어 있던 팜플렛 두장을 들고 주차공간 넉넉한 서출지에 올라보았다.

 

 

 

 

 

 

 

경주 남산동 서출지
이 연못에서 나온 노인의 편지로 당시 신라 소지왕이 목숨을 구했다고 한다. 연꽃이 아름답게 피는 이 못은

보름 약밥의 유래가 된 곳이라고 한다.


경주 남산동에 서출지(書出池)란 연못이 있다. 못 속에서 나온 노인의 편지로 인해 왕이 죽음을 면했다는 전설이 깃든 이 연못은 한여름이면 연꽃이 만개한다. 주변엔 해묵은 배롱나무 꽃이라도 피는 날이면 더욱 운치가 있다.

 

신라 소지왕이 정월 보름에 천천정(天泉亭)으로 행차하였다가 쥐가 사람의 말로 까마귀를 따라가라고 하여

기사(騎士)를 시켜 까마귀를 따르게 하였다. 그런데 기사는 도중에 돼지싸움을 구경하다가 그만 까마귀의

행방을 놓쳐 버린다. 이때 못 가운데에서 한 노인이 나와 글을 쓴 봉투를 주기에 받아 보니 겉봉에 “열어 보면

두 사람이 죽고 안 열어 보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라고 씌여 있었다고 한다.

 

기사가 그 봉투를 왕에게 바치니 왕은 한 사람이 죽는 편이 낫다고 하여 개봉하지 않으려 했다.

이에 일관(日官)이 나가 “두 사람은 보통 인간이고 한 사람은 임금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일러 준다.

하는 수 없이 왕이 그 봉투를 개봉하니 “거문고갑〔琴匣〕을 쏘라”고 씌여 있어 문안대로 활로 거문고갑을

쏘니 놀랍게도 그 안에 왕비와 정을 통하던 중이 숨어 있었다.

 

그중은 왕비와 사통하면서 장차 왕을 해치고자 거문고갑 속에 잠복하던 중이었다.

개봉하면 두 사람이 죽는다는 예언서대로 왕비와 중은 왕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이 일이 있고부터 매년 정월 상해일·상자일·상오일 사흘간은 모든 백성이 근신하는 날로 정했으며,

특히 정월 보름은 오기일(烏忌日)이라 하여 찰밥으로 까마귀에게 공양하는 풍속이 생겨

오늘까지 전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서출지란 이름도 여기서 유래한 것이지만 이 전설에서는 편지보다는

그 편지를 전해 준 도인에게 초점이 맞춰져야 할 것 같다. 연못에서 나왔다는, 흰 수염을 길게 늘어뜨렸음직한

이 노인은 보통 인간이 아니었을 것이다. 널리 알려진 ‘은도끼·금도끼 전설’에서 보듯 이 노인은 옥황상제의

사자쯤으로 보인다. 사금갑(射琴匣)이란 제목으로 《삼국유사》에 전하는 이 전설은 당시 왕의 신변을

하늘이 돌보아 주고 있다는 사실을 넌지시 내비치고 있다는 것이다.

 

 

 

 

 

동남산 주차장에서 서출지에 올라 시계방향으로 한바퀴 돌면서 물위에 작고 귀엽게 피어나있던 어리연꽃이

유혹을 했지만 서출지를 돌아보고 칠불암으로 가야 한다는 조급함 전에도 본적은 있었나 싶을 정도로 無量寺라는 현판이 보이는걸 보면서 여기에도 절이 있었구나 했는데 자세한 자료는 찾을수가 없으며, 어느 블로그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었다. 

무량사는  서출지에 있는 '이요당'의 소유자인 풍천 임씨(임적선생의 후손)의 종가집이었으나 1972년경 무량사라는 절이 되었다고 한다.  '풍천 임씨' 종가집이 사찰이 되었는지는 모르나 법당으로 쓰이는 안채 건물은 400년

전의 건물이며, 40여년 전에 법당으로 개조 되었다고 한다.

 

 

 

 

 

 

 

 

 

                                                                                           촬영일: 2013년 9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