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담사 금정암 화엄강당(龍潭寺金井庵華嚴講堂)
경상북도 안동시 길안면 금곡리에 있는 조선시대 사찰건축.
1996년 1월 20일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317호로 지정되었으며 용담사에서 관리하고 있다.
용담사 소속 금정암의 부속건물이며, 금정암은 금학산 상부 능선에 자리잡고 있다.
용담사 앞을 흐르는 길안천의 지류인 개울을 건너 산정으로 오르는 길을 따라 1km 정도 오르면 된다.
금정암은 금자암(金子庵)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화엄강당은 금정암의 가장 대표적인 건물로, 규모는 정면 8칸, 측면 3칸의 일자형(一字形) 건물이다.
기단은 막돌허튼층쌓기로 하였다. 그 위에 자연석 주춧돌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웠는데, 전면의 기둥은
배흘림으로 다듬었다. 겹처마 팔작지붕집으로 용마루 양쪽 끝에는 망새[雉尾]기와를 얹었다.
정면 8칸은 건물의 쓰임새로 보아 4개의 영역으로 나눌 수 있는데 왼쪽으로 2칸은 부엌이며, 그 다음 3칸은
법당이고, 그 옆 2칸은 선원(禪院:강당), 제일 우측 1칸은 창고로 짜여져 있다.
2칸의 부엌을 제외한 나머지 칸에는 전면으로 1칸 넓이의 툇마루를 깔았다.
법당의 내부 바닥은 온돌이며 천장은 보와 도리가 보이지 않도록 막힌 구조를 하였다.
원래는 연등천장인 것을 후에 개조한 것으로 보인다. 불단은 뒷벽에 붙여서 장방형의 단을 놓고 그 위에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이 협시한 석가모니불을 모셨다. 불상 뒤에는 불벽을 조성하여 후불(後佛)탱화와
칠성(七星)탱화를 봉안하고, 우측면 벽에는 신장(神將)탱화를 봉안하였다.
강당도 온돌방으로 꾸몄으며 창고는 흙바닥인데, 출입문은 우측면에 판문으로 짜여져 있다.
부엌은 전면에 판벽과 살창으로 벽체를 구성하였고 출입문은 좌측면에 여닫이 판문이 분합으로 짜여져 있다.
판문을 들어서면 2단 정도 낮은 부엌 바닥이 있고, 부뚜막은 법당쪽으로 배치되어 있다.
부뚜막 위 약 150cm 높이에는 조왕단을 설치하고 조왕탱화를 모셨다.
부엌은 전면에 판벽과 살창으로 벽체를 구성하였고 출입문은 좌측면에 여닫이 판문이 분합으로 짜여져 있다.
판문을 들어서면 2단 정도 낮은 부엌 바닥이 있고, 부뚜막은 법당쪽으로 배치되어 있다.
부뚜막 위 약 150cm 높이에는 조왕단을 설치하고 조왕탱화를 모셨다.
금정암은 화엄강당 외에도 산신각(山神閣), 우상전(禹像殿), 전등전(傳燈殿) 등이 있으며,
《금정암중수기(金井庵重修記)》에 의하면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창건하였고, 정조 24년(1800)에
중수하였다 한다.
금정암전등전(金井庵傳燈殿)
전등전(傳燈殿)은 20세기 중반에 지은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서 현재 요사로 사용한다.
안에는 '안동황학산용담사화주질' 현판이 걸려 있다.
금정암전등전(金井庵傳燈殿)의 편액(扁額)
우상당의 주련 (禹像堂柱聯)
十二大願接群蒙(십이대원접군몽) 열두 가지 큰 원을 세워 온갖 중생 건지시고
一片悲心無空缺(일편비심무공결) 중생 향한 자비심에 부족함이 없으신데,
凡夫顚倒病根深(범부전도병근심) 범부와 중생 잘못하여 병의 뿌리 깊었으니
不遇藥師罪難滅(불우약사죄난멸) 약사여래 만나지 못하면 죄 멸하기 어렵다네.
금정암(金井庵) 우상당(禹像堂)
우상당(禹像堂)은 근대에 지은 맞배지붕에 앞면 3칸, 옆면 1칸 규모의 전각으로,
본래 조사 진영을 봉안 하였으나 도난 당하고 지금은 비어 있다.
금정암(金井庵) 산령각과 천태각(山靈閣 天台閣)
산령각(山靈閣), 천태각(天台閣)은 한 건물로 같이 사용된다. 앞면 3칸, 옆면 2칸의 규모에 맞배지붕으로 20세기 중반에 지어졌다.
안에는 최근에 조성한 산신탱과 독성탱이 봉안되어 있다.
산령각(山靈閣)
산신각(山神閣)
산신을 모시는 전각이다. 사찰에 따라서는 산령각(山靈閣)이라고도 부른다.
또 삼성각(三聖閣)을 두어 칠성신·독성(獨星)과 함께 모시는 경우도 흔하다.
본래 산신은 도교에서 유래한 신으로, 불교가 전래되기 전에 많이 믿던 토착신이다.
특히 산지가 70%나 되는 한국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조선 말에 이르기까지 산신신앙이 널리 유행하였다.
이 산신이 불교에 수용되면서 호법신중(護法神衆)의 하나로 자리잡았다.
불교가 대중화되기 시작한 것은 삼국시대부터이므로 산신도 비교적 일찍 불교에 수용되었을 것을 여겨지나,
산신각이 세워진 것은 조선 중기 이후부터이다. 대개 전각의 뒤쪽에 세우며, 크기는 정면1칸, 측면 1칸이
보통이다. 산신각 내에는 산신을 그린 탱화를 모시는데 대개 흰수염, 대머리, 긴 눈썹이 휘날리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손에는 하얀 깃털부채나 파초선, 불로초 등을 들고 있고 주로 봉래산·영주산·방장산 등의 삼신산을
배경으로 한다.
한라산이나 속리산·계룡산·지리산 등지의 사찰에는 드물게 여자 산신을 모시는 경우도 있다.
여자 산신은 트레머리에 댕기를 두르고 치마저고리를 입고 있다.
호랑이에 걸터앉거나 기대고 있는 모습이며, 손에는 대개 불로초를 들고 있다.
이밖에 복건(福巾)이나 유건(儒巾)·정자관(程子冠)을 쓰고 지팡이를 든 유교적 산신도 있고,
삭발한 스님이 《묘법연화경》과 같은 불경을 들고 있는 불교식 산신도 흔하다.
이 경우 의상은 가사와 비슷하나 적녹색이 주류를 이룬다.
천태각(天台閣)
독성각(獨聖閣)이라고도 하며, 나반존자를 모신 전각이다.
나반존자(那畔尊者)
우리나라 불교에서만 숭상하는 신앙의 대상 중 하나인 성자.
독성수(獨聖修) 또는 독성존자(獨聖尊者)라고도 한다.
독성은 홀로 인연의 이치를 깨달아서 도를 이룬 소승불교의 성자들에 대한 통칭으로 사용되었으나,
나반존자가 ‘홀로 깨친 이’라는 뜻에서 독성 또는 독성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나반존자라는 명칭은 석가모니의 10대 제자나 5백 나한의 이름 속에 보이지 않고, 불경 속에서도 그 명칭이나
독성이 나반존자라는 기록을 찾아볼 수 없으며, 중국의 불교에서도 나반존자에 대한 신앙은 생겨나지 않았다.
나반존자에 대한 신앙은 오직 우리나라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신앙형태이다.
우리나라 사찰에 모셔지는 나반존자의 모습은 하얀 머리카락을 드리우고 있으며, 눈썹은 매우 길게 묘사되어
있고 미소를 띤 경우가 많다. 이에 대해서 최남선(崔南善)은 “절의 삼성각(三聖閣)이나 독성각(獨聖閣)에 모신
나반존자는 불교의 것이 아니라 민족고유신앙의 것이다. 옛적에 단군을 국조로 모셨으며, 단군이 뒤에 산으로
들어가서 산신이 되었다고도 하고 신선이 되었다고도 하여 단군을 산신으로 모시거나 선황(仙皇)으로 받들었다. 그래서 명산에 신당을 세우고 산신 또는 선황을 신봉하여왔는데, 불교가 들어오면서 그 절의 불전 위 조용한
곳에 전각을 세우고 산신과 선황을 같이 모셨으며, 또 중국에서 들어온 칠성도 함께 모셨다.”라고 하였다.
마루에는 금정암중창기, 용담사중수게, 송계대화상임종게(松桂大和尙臨終偈), 근차판상운(謹次板上韻)등의
현판이 걸려 있는데 모두 금정암과 용담사의 연혁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자료가 된다고 한다.
금정암(金井庵) 비 부도(碑 浮屠)
절 입구에서 조금 못 미쳐 왼쪽 산기슭에 '웅파당비' 와 부도 2기가 있다. 웅파당비는 1838년(헌종 4)에 세운 것인데
앞면에 웅파(雄波) 스님의 행적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현재 1987년에 지은 비각 안에 놓여져 있다.
또한 웅파당 비 부근에 조선시대 후기의 석종형 부도 2기가 있는데, 당호가 새겨져 있지 않아 정확히 누구의 부도인지
알 수 없으나 그 가운데 1기는 웅파당비가 옆에 있는 것으로 보아서 웅파 스님의 부도가 아닐까 생각된다.
촬영일: 2013년 9월 8일
촬영일: 2012년 4월 11일 이미지 첨부
편액(扁額)
흔히 현판(懸板)으로 통칭된다.
대개 가로로 걸기 때문에 횡액(橫額)이라고도 하나 글씨의 경우 세로로 쓰기도 한다.
편(扁)자는 원래 서(署)의 뜻으로 문호(門戶) 위에 제서(題書:제자;쓴 글자)함을 가리키며, 액(額)자는 이마,
즉 상(顙)의 뜻이다. 따라서 건물 정면의 문과 처마·반자(천장) 사이에 건물명칭을 쓴 액자를 일컬었으나,
넓게는 건물에 관련된 사항이나 묵객(墨客)들의 서화(書畫)가 담긴 일체의 현판도 편액이라 부르게 되었다.
문헌상으로는 이미 중국 진대(秦代)에 당시의 상용서체(秦書八體) 중 서서(署書)라 하여 건물의 명칭을
제서하는 서체가 있었다 한다. 오늘날 전하는 편액글씨는 크기가 일정하지 않으나 대개가 큰 글씨이므로
대자(大字)를 액자(額字)라고도 한다.
편액에 쓰인 한자 서체는 전(篆)·예(隷)·해(楷)·행(行)·초(草)로 다양하며, 최근에는 한글로 된 편액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편액은 건물의 얼굴이므로 해당 건물의 격식에 맞는 글씨를 택하게 되는데, 당대 명필의 글씨나
역대 제왕의 엄정한 어필(御筆)에서부터 문인·일사(逸士:숨어사는 선비) 등의 개성 있고 정신성이 돋보이는
글씨에 이르기까지 선현들의 필적을 두루 살필 수 있다.
이밖에 명필의 글씨를 모각(模刻)하기도 하며 최근에는 활자체나 도안체를 사용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김생(金生)의 글씨로 구전되는 공주 마곡사의 ‘大雄寶殿(대웅보전)’이라는 편액을 비롯하여
공민왕의 ‘安東雄府(안동웅부)’·‘映湖樓(영호루)’ 등이 있다.
또 조선시대의 편액으로는 도성의 문루나 궁실의 전각 등에서부터 지방의 사찰·관아·향교·서원의 건물이나
일반주택에 걸린 편액에 이르기까지 많은 예가 있다. 편액의 재료는 주로 널빤지를 사용하며 건물의 규모와
격식에 맞게 색채와 조식(彫飾:꾸밈)을 가한다. 글씨는 금니·은니·먹·분청·호분(백분) 등을 주로 쓰며 바탕색은
글씨의 색을 고려하여 칠한다.
또한 편액의 틀에는 무늬를 새기거나 색채를 가하기도 한다. 민간에서는 널빤지에 직접 쓰거나, 종이나
비단에 써서 액자로 만들어 걸기도 한다. 편액은 건물의 기둥에 거는 주련(柱聯)과 함께 건물을 치장하는
주요 수단이었으므로 당시 주생활(住生活)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건물의 명칭 및 내력,
서자(署者)·제작방법 등을 살필 수 있다.
또한 도성의 화기(火氣)를 막기 위하여 남대문의 편액인 ‘崇禮門(숭례문)’을 세로로 썼다는 이야기,
서울의 동쪽에 큰산이 없어 지세가 기운다고 하여 동대문의 편액을 ‘興仁之門(흥인지문)’의 넉자로 썼다는
구전 등에서 편액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도 적지 않게 전하고 있다.
'그룹명 > 문화유적유물산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출지(書出池) (0) | 2013.09.16 |
---|---|
용담사(龍潭寺) (0) | 2013.09.10 |
금곡사지원광법사부도탑 (金谷寺址圓光法師浮屠塔) (0) | 2013.09.04 |
수재정(水哉亭) (0) | 2013.09.03 |
성산서당(聖山書堂) (0) | 2013.09.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