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재정(水哉亭) 경북문화재자료 제166호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하곡리에 있는 조선 중기의 문신 정극후(鄭克後)의 별장.
1985년 12월 30일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166호로 지정되었다. 정극후의 후손 정인현이 소유, 관리한다.
정극후는 학문에 비범하였으나 60세까지 과거에 응하지 않다가 1634년(인조 12)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동몽교관에 임명되었다. 1636년 선릉 참봉이 되었고 1643년에 왕자 사부가 되었다.
이 누각은 자옥산(紫玉山)과 삼성산(三聖山)이 서로 접하는 계곡에 자리잡고 있으며, 1620년(광해군 12)에
세웠다. 높은 석축 위에 세워진 3칸 규모의 맞배기와집인데 평면은 어간(御間)에 우물마루를 두고 좌우 협칸에
방을 두었으며 전면에는 마루를 내어 계자난간(鷄子欄干)을 두른 누각형의 정자이다.
누각 남쪽에는 취야문(取也門)이 있고, 북쪽에 고직사로 연결되는 시지문(是之門)이 있다.
1728년(영조 4)에 중건하였는데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쳐 누각의 건축 기법에 조선 중기 양식과 후기의 양식이
섞여 있다. 지금의 건물은 조선 영조 때의 양식이다.
시지문(是之門)
수재정 후원에 드는 문 이름은 시지문(是之門)이고 맞은편 문 이름은 취야문(取也門)이다.
모두가 맹자의 문장에서 취하여 온 것이라고 한다. 수재정은 하계서사(霞溪書舍)로 불리기도 하는데,
매산(梅山) 정중기(鄭重器)가 지은 하계서사기문이 전하고 있다. 본래는 1620년경 초가로 건립하였고,
그 후 6세손 정충필이 다시 보수하였으며 1804년경에 정호검(鄭好儉)이 중건하였다고 한다.
취야문(取也門)
경주시 안강읍 하곡리(霞谷里)에 있는 수재정(水哉亭)은 조선시대 학자 쌍봉(雙峯) 정극후(鄭克後·1577~1658)가 맹자에 나오는 '수재수재(水哉水哉)'의 뜻을 취하여 수재정을 짓고 일생동안 제자들과 강학한 곳이라고 한다.
‘물이여! 물이여!水哉水哉(수재수재)’
徐子曰(서자왈)
제자인 서자(徐子)가 맹자께 여쭈었다.
仲尼?稱於水曰(중니극칭어수왈)
"중니(孔子)께서는 자주 물을 칭송하여 말씀 하시기를,
水哉水哉(수재수재) 何取於水也(하취어수야)
‘물이여! 물이여!’ 하셨는데, 물에서 무엇을 취한 것입니까?"
孟子曰(맹자왈)
맹자께서 대답 하셨다.
原泉混混(원천혼혼) 不舍晝夜(불사주야)
"근원이 깊은 샘물은 졸졸하며, 주야를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흘러,
盈科而後進(영과이후진) 放乎四海(방호사해)
패인 구덩이를 채우고 난 후에 앞으로 나아가고, 해서 바다에 이른다.
有本者如是(유본자여시) 是之取爾(시지취이)
근본이 있는 것은 이와 같은 것이므로, 바로 그 점을 취했던 것이다.
苟爲無本(구위무본) 七八月之間雨集(칠팔월지간우집)
진실로 근본이 없다면, 비록 7·8월 사이에 빗물이 모여서,
溝澮皆盈(구회개영)
크고 작은 개천들을 다 가득 차게 할 수 있지만,
其涸也(기고야)
이내 그 물이 말라 버리는 것을,
可立而待也(가립이대야)
가히 서서 기다려 볼 수 있을 정도이다.
故聲聞過情(고성문과정)
그러므로 명성이 실제보다 지나치게 나는 것을,
君子恥之(군자치지)
군자는 부끄러워 하는 것이다"
공자는 일찌기 졸졸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물을 바라보며,"수재(水哉)여! 수재(水哉)여!"
하고 자주 탄미(嘆美)하는 말을 하고는 하였다. 이것을 궁금히 여긴 맹자의 제자인 서자(徐子)가 맹자에게
그 까닭을 물었던 것이다. 맹자는 이에 대답 하여, 공자(孔子)의 이념(理念)을 밝힌 것이다.
즉 공자는 군자의 덕망을 흐르는 물에 비유하여 말한적이 있음을 상기한 것이다.
수심(水深)이 깊지 못한 시냇물은 비가 많이 내릴 때에만 흐르다가, 날씨가 개이면 이내 말라 버리고 만다.
그러나 근원이 깊은 물은 결코 마르는 일이 없이, 계속해서 밤낮으로 흘러 내린다.
이러한 차이는 사람에게도 늘 볼 수 있는 일이다.
즉 수양을 쌓아 도덕적 근본자세가 확립되어있는 도덕군자는 아무리 사회악이 그를 방해하고 모해하여도
조금도 마음의 동요됨이 없이 늘 영향력있는 덕성(德性)을 보임으로 해서, 세상 사람들의 모범이 되는 것이다.
또한 한 때 7·8월 간에 빗물이 모여서 크고 작은 도랑들이 모두 가득 채워 졌다가 비가 그치면 모두 말라 버리는 것과 같이, 일시적인 명망(名望)을 부끄러워 하며, 늘 자신의 도덕적 자질향상에 끊임없는 노력을 경주하는 것이 군자의 도리임을 강조하고 있는 대목이다.
수재정 앞 시냇물은 도덕산(道德山) 서쪽 기슭에서 발원하여 자옥산(紫玉山)과 삼성산(三聖山) 두 협곡으로
몇 십리를 흘러와서 작은 여울과 폭포를 이루고 있다. 또한 암반이 아름다워 뜻을 가진 선비가 은둔하여
독서하기에 그만인 곳이다. 쌍봉은 이곳 산수를 사랑하여 초가 정자를 짓고 평생 동안 벼슬길을 멀리하고
학문에만 종사하였다고 한다.
경주시 안강읍 하곡리 이 앞길을 두번정도 지나 다닌 기억이 난다.
성산서당 직전 계곡을낀 숲길이 시원했다. 물소리 들리는 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은
철책으로 막혀있고 상수원 보호구역인것 같기도 한데 조금 윗쪽에 작은 마을하나가 있어서 인지
생활하수인듯 뿌옇게 흐린물이 계곡의 아름다움을 무색케 하는듯 했다.
이리 저리 둘러보아도 다리하나는 철구조물 대문으로 닫혀 있었는데 때마침 열려있는것을 보면서 여름 휴가철은 끝난듯 하지만 옥산서원의 역락문이 활짝 열려 있었던것 처럼 여기도 외지의 관광객을 배려한 모습이구나 라는 생각을 하면서 여유롭게 지나 걸어들어 갔다.
열려있는 철문에 붙여진 안내판을 보는 순간 낙서라기 보다는 여기까지 왔다가 구경하지 못하고 되돌아 가야만
했던 어떤이의 속마음을 불만처럼 적어둔 글귀가 이전에 내 심정을 대변해 주는듯 했다. 100%공감 ......
이렇게 들어갔던 길을 차분히 돌아보고 1시간 가량 머물다가 돌아 나오다가 보니 아뿔사 대문이 닫혀있고 체인으로 칭칭 감아 자물쇠가 채워져 있는것이 아닌가 이런 낭패가 있나 계곡에 내려오는 길도 막혀 있었는데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166호라면서 일반인의 관람을 통제한다는 뜻인가? 그제서야 들어올때 안내판에 네임펜으로 낙서를 해 둔 사람의 심정을 또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 생각 해 보니 들어갈 때 다리 아래에는 화물차 한 대가 있었고 어린아이들 소리도 들렸는데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 생겨 버렸던것이다.
계곡 아래에서 한창 사진을 찍고 있을때 연세드신 아저씨 한 분이 이 길 아니고 어디 나가는 길이 또 있느냐고
묻길래 별난 아저씨 다 보겠네 거기까지 들어 왔으면 왔던길 도로 돌아 나가면 되지 나보고 물으면 나도 처음
들어 왔는데 하면서 잘 들리지 않는 거리여서 손짓으로 왔던곳을 가리켰더니 아마 그 아저씨가 이곳을 관리 하시는 분이었는지 문을 잠궈야 하니까 나보고 다른길이 있더냐고 물어 보는 중이었는걸 모르고 다행히 철문을 넘어 나오는데는 그다지 위험하지 않아서 천만 다행이었던 것이다.
촬영일: 2013년 9월 1일 일요일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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