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곡사지원광법사부도탑 (金谷寺址圓光法師浮屠塔)
부도는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여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셔둔다. 금곡사터에
자리하고 있는 이 부도는 신라 진평왕 때의 승려인 원광법사의 사리를 모시고 있다.
원광법사(?∼630)는 화랑도의 생활신조인 세속오계를 제정한 인물로, 불교사상 뿐만 아니라
문장에도 능하여『걸사표』를 지어 중국 수나라에 보내기도 하였다. 진평왕 52년(630)
황룡사에서 돌아가서 명활산에서 장사를 지낸 후 이곳에 그의 사리탑을 세웠다고 한다.
부도는 부서진 채 일부만 남아있던 것을 최근에 새로이 복원한 것으로, 3층 석탑의 형식을 하고 있다.
널다란 바닥돌 위로. 높직한 1층 기단(基壇)을 두고 3층의 탑신(塔身)을 올려 놓았는데, 그 중 바닥돌과
탑신의 1층 몸돌 및 3층 지붕돌만이 원래의 것이다. 탑신의 1층 몸돌은 네 면마다 문모양의 무늬를 두고
그 안을 살짝 파내어 불상을 도드라지게 새겨 두었다. 지붕돌은 밑면에 4단씩의 받침을 두었으며, 윗면에는
느린 경사가 흐른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치던 네모난 받침돌만 남아있다.
신라가 통일하기 이전에 세운 것으로, 일반 석탑의 형식을 하고 있는 독특한 모습의 부도이다.
원광은 속성(俗姓)이 박씨이며 13세에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화랑도의 생활신조가 된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제정했으며 불교사상뿐 아니라 문장에도 능했다. 또한 대승불교를
깊이 연구하고 그것을 신라에서 강의한 최초의 학승이었고, 불교의 토착화에 크게 공헌했다.
금곡사는 원광이 30세 되던 해, 평소 수도생활을 하던 경주 안강의 삼기산(三岐山) 아래에 창건한 절인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지금은 절터만 남아 있다. 현재의 탑은 당시에 도괴된 것을 복원한 것이다.
승탑은 하층 기단에 있는 사각형의 문비(門扉) 안을 아치형으로 파고 그 안에 좌불상을 양각한 탑신을 놓고
그 위로 옥개석(屋蓋石:지붕돌) 2개만 놓았다. 상층 옥개석 윗면에는 노반(露盤)이 남아 있다.
원광은 속성(俗姓)이 박씨이며 13세에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화랑도의 생활신조가 된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제정했으며 불교사상뿐만 아니라 문장에도 능했다. 또한 대승불교를 깊이 연구하고 그것을 신라에서 강의한 최초의 학승이었고, 불교의 토착화에 크게 공헌했다.
촬영일: 2013년 9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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