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진 봉평리 신라비 전시관 (蔚珍 鳳坪里 新羅碑 展示館)
울진봉평신라비 전시관은 국보 제242호 울진봉평신라비의 효율적인 보존과 관광자원으로 개발하기 위하여
조성하여 2011년 6월 23일 개관하였다. 위치는 경북 울진군 죽변면 봉평리 521번지 일원으로 대지면적 41,732㎡, 전시관 건축 연면적 2,050㎡으로 지상 2층, 지하 1층으로 이루어져있다. 야외 시설물로는 정자, 연못,
인라인스케이트장, 공연장, 주차장, 휴게소 등이 있다.
전시관은 3전시실로 이루어져 있는데, 제1전시실에는 울진봉평신비의 실물을 전시하고 비의 발견과정과 해석 등이, 제2전시실에는 신라?백제?고구려 3국에서 중요한 석비 10기를 실물크기와 똑같이 만들어 전시하였다.
제3전시실에는 우리나라 금석학의 계보, 시대별 비의 양식, 한문과 한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야외에는 전시관으로 들어가기 전에 울진지역에 산재한 송덕비 45기를 이전설치하여 비석거리를 조성하였으며, 후원에는 우리나라 국보?보물급 석비 중 25기의 비를 실물크기와 똑같이 제작전시하여 우리나라 비석
문화를 한 곳에서 알 수 있게 하였다. 국보 제 242호 울진 봉평리 신리비의 효율적인 보존을 위해 2000~ 2010년 경북 북부 유교문화권 관광개발사업으로 건립하였다.
전시관은 실내전시관, 야외비석공원, 비석거리, 정자, 연못, 주차장, 관리시설등의 시설을 갖추어 2011년 개관
하였다. 실내에는 울진 봉평리 신리비 실물 및 고구겨, 백제, 신리시대의 주요 석비 모형을 전시, 금석학의 계보와 시대별 비의 양식변화, 한자 서체와 한글등을 소개 하고 야외에는 울진지역 송덕비와 삼국시대~조선시대 국보. 보물급 모형비가 전시되어 있다.
제1전시실
울진봉평리신라비(蔚珍鳳坪里新羅碑)
울진봉평신라비는 대구에서 발행되는 일간지인 매일신문에 1988년 4월 15일자로 특종으로 보도되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발견 당시 울진봉평신라비는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 봉평2리 118번지 주두원씨 소유의 논에 밑 부분의 극히 일부만을 바깥으로 드러낸 채 거꾸로 박혀 있는 상태였다. 논의 주인은 평소 농사를 짓는데 적지 않게 지장을 받고 있었으므로 때마침 같은 해 1월 20일 인근에서 객토작업을 진행하던 굴착기를 불러 돌
자체를 들어내고서 논 밖의 길가에다가 버렸다. 표면에 흙이 잔뜩 묻어 있었으므로 글자가 새겨진 비인지 어떤지를 전혀 알지 못하였다.
그 뒤 몇 개월이 지나는 사이에 봄비가 내려 자연히 돌에 묻은 흙이 씻겨내려 가자 글자의 일부가 드러나게 되었다. 이 돌 곁을 매일 지나다니던 마을 이장 권대선이 1988년 3월 20일 글자가 새겨진 사실을 우연히 확인하여 바로 다음 날 죽변면사무소와 울진군에 신고하였다. 울진군 공보실 직원들이 즉시 현장에 파견되었으나 내용을 잘 알 수가 없어 일단 그대로 놓아두었다.
1988년 3월 26일에는 울진군의 관광문화재계장 이규상이 다시 현장에 출장하여 알 만한 몇몇 글자를 대충 읽고서는 그것이 예사롭지 않은 고비임을 짐작하여 3월 29일 경북도청에 들러 구두로 신고하였다. 글자를 세로 줄로 읽어야 함에도 가로로 잘못 읽어 조선시대의 비로 간주하는 등 약간의 촌극도 벌어졌다. 4월 7일에는 향토사가 윤현수가 울진군청의 도움을 받아 비를 처음으로 탁본하였다. 울진군청은 이때 파악된 내용을 토대로 경상북도에 서면으로 정식 보고하였다.
그와 같은 정보를 입수한 대구 매일신문의 문화부기자 박진용은 곧장 현장으로 달려가 비의 출현 사실을 독점 취재하여 4월 15일자로 특종 보도하였다. 당시 신문의 1면 거의 전부를 울진봉평신라비 관련 기사로 메울 정도로 크게 다루었다. 신문사에서는 비밀이 자칫 새어나갈까 염려하여 미리 기사를 작성하여 편집부에 넘기고 나서 전문연구자들에게 알렸다. 전문가로부터 아무런 도움을 받지 않고 비문을 멋대로 판독하고 내용을 해석한 탓에 처음 보도된 기사에는 잘못되거나 부정확한 면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수정 보완하여 다시 보도할 필요성이 제기되자 비로소 대구 시내 대학에 근무하는 교수들에게 비의 출현 사실을 통보해서 도움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울진봉평신라비가 발견되기 꼭 1년 전인 1987년 대구를 중심으로 결성된 한국고대사연구회라는 학회에 소속한 연구자들이 여러 사람 연락을 받고 1988년 4월 16일 비문을 조사하고자 갔다. 현장에서 비문을 정식으로 탁본도 하고 글자를 하나하나 읽으면서 전체적인 내용과 의미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는 다음날
매일신문을 통하여 재차 보도되었다. 그 뒤 각종 매스컴에서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전국적으로 비의 출현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굴착기로 비를 들어내는 작업 과정에서 비의 일부가 떨어져 나갔으나, 1988년 5월 5일 한국고대사연구회 주최로 비문을 다시 정밀 판독할 때에 참관한 대구대학교 학생에 의하여 비편이 발견되어
완형을 갖추게 되었다.
울진봉평신라비가 발견된 이후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조사가 계속하여 이루어졌다. 특히 5월 5일에 떨어져 나간 비편이 발견된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는 정식으로 비가 출토된 위치를 확인하는 발굴 작업을 진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비좌(碑座)가 확인되지 않아 비가 원래 위치하였던 정확한 장소를 밝혀내지는 못하였다. 약간 떨어진 곳에서 이동한 사실만을 확인하였을 따름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는 1988년 8월에 비의 모형을 만들어 활용할 수 있도록 조처하였다.
정밀한 판독과 분석을 통하여 울진봉평신라비가 삼국시대 신라의 비로 525년 세워진 것으로서 당시 신라비 가운데 가장 오래된 비임이 드러났다. 그뿐만 아니라 이미 알려진 역사적 사실과는 상당 부분 다르거나 아니면 전혀 새로운 내용을 담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국보급의 문화재임이 틀림없다고 판단되어 지정 절차에 들어가기로 하였다. 그를 위해서는 먼저 정식 학술회의를 열어 비문의 내용을 좀 더 정확하게 파악할 필요가 제기되었다.
먼저 한국고대사연구회[현재의 한국고대사학회] 주관 아래 학술회의를 갖기로 하였다. 그 결과 1988년 7월 22일에서 23일 이틀간에 걸쳐 대구의 계명대학교에서 비문의 내용을 종합적으로 검토하는 첫 학술회의가 개최되었다. 학술회의는 대우재단과 유진기념관의 도움을 받아서 진행되었으며 수백 명의 연구자가 참여한 가운데 성황리에 열렸다. 학술회의의 결과는 한국고대사연구회가 발행하는 기관지인 『한국고대사연구』 2호를 특집호로 꾸며 1989년 5월 간행하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학술회의를 열면서 비의 명칭을 잠정적으로 울진봉평신라비라 부르기로 하였다. 그 뒤 학술회의를 거치면서 많은 논란이 뒤따랐지만 처음 명칭 그대로를 사용하기로 결론이 내려졌고 마침내 국보 242호로 지정되었다.
*** 건립경위 ***
524년(법흥왕 11) 울진 지역에서 신라에 대한 모종의 반란 사태가 발생하여 경주와 삼척의 대군으로 반란을 진압하고 다시는 이러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책임자에게 장 60대와 100대를 치고 얼룩소를 잡아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이러한 일이 다시 발생하면 천벌을 받을 것이라는 내용을 적어 석비를 세웠다.
(자료출처: 디지털울진문화대전에서)
*** 제2전시실 ***
*** 제3전시실 ***
*** 야외전시장 ***
*** 비석거리 ***
촬영일: 2013년 8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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