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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축산(天竺山) 불영사(佛影寺)

도랑도랑 2013. 8. 24. 05:04

 

 

천축산(天竺山) 불영사(佛影寺)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말사. 651년(진덕왕 5) 의상(義湘)이 창건하였다. 부근의 산세가

인도의 천축산과 비슷하므로 천축산이라 하고, 전면의 큰 못에 있는 아홉 마리 용을 주문으로 쫓아낸 후

그 자리에 절을 짓고, 서편에 부처의 형상을 한 바위가 있어 그 그림자가 항상 못에 비치므로 불영사(佛影寺)라

불렀다고 한다.

1397년(태조 6)에 화재로 타버린 것을 소운(小雲)이 중건하였는데, 그 후 다시 소실되어 1500년(연산군 6)

양성법사(養性法師)가 중건하였고, 임진왜란 때 병화를 입어 모두 소실되었으나 응진전(應眞殿)만은 피해를

면했다고 한다. 그 후 1609년(광해군 1) 진성법사(眞性法師)가 재건한 것을 비롯하여 여러 승려들의 손으로

중수가 거듭되었다. 현재 당우로는 대웅보전, 근락전, 응진전, 명부전, 조사전, 칠성각, 관음전, 영산전(靈山殿)

황화당(黃華堂), 설선당(說禪堂), 범종루, 응향각(凝香閣), 칠령각(七靈閣) 등이 있고, 창건 당시의 유적인

무영탑(無影塔)과 돌거북 2기가 있다.

 

 

 

 

의상이 경주로부터 해안을 따라 단하동(丹霞洞)에 들어가서 해운봉(海運峰)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니 서역의

천축산을 옮겨온 듯한 지세가 있었다. 또 맑은 냇물 위에서 다섯 부처님 영상이 떠오르는 모습을 보고 기이하게 여겨 내려가서 살펴보니 독룡(毒龍)이 살고 있는 큰 폭포가 있었다.

 

 

 

 

 

 

의상은 독룡에게 법(法)을 설하며 그곳에다 절을 지으려 하였으나, 독룡이 말을 듣지 않았으므로 신비로운 주문을 외워 독룡을 쫓은 뒤 용지(龍池)를 메워 절을 지었다. 동쪽에 청련전(靑蓮殿) 3칸과 무영탑(無影塔) 1좌를 세우고 천축산 불영사라 하였다. 676년(문무왕 16)에 의상이 다시 불영사를 향해서 가다가 선사촌(仙 村)에 이르렀는데, 한 노인이 "우리 부처님이 돌아오셨구나." 하면서 기뻐하였다.

 

 

 

 

그 뒤부터 마을 사람들은 불영사를 부처님이 돌아오신 곳이라 하여 불귀사(佛歸寺)라고 불렀다.

의상은 이 절에서 9년을 살았으며, 뒤에 원효도 이곳에 와서 의상과 함께 수행하였다고 한다.

청련전과 무영탑료는 환희료(歡喜寮)와 환생전(還生殿)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1408년(태종 8) 이문명(李文命)이 지은 "환생전기"에 의하면 옛날에 백극재(白克齋)가 울진현령으로 부임한 지

3개월 만에 급병을 얻어 횡사하니 그 부인이 비통함을 이기지 못하여 불영사로 와서 남편의 관을 탑전(塔前)에

옮겨 지극한 정성으로 기도를 올렸다. 3일 만에 남편이 되살아나 관을 뚫고 나오자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탑료(塔寮)를 환희료, 불전(佛殿)을 환생전이라 하고, '법화경' 7권을 금자(金字)로 사경하여 불은에 보답

하였다고 한다.

 

 

 

 

창건 이후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쳤으며, 1396년(태조 5)에 화재로 인하여 나한전(羅漢殿)만 남기고 모두

소실되었던 것을 이듬해에 소설(小雪)이 중건하였다. 그 뒤 1500년(연산군 6)에는 양성(養性)이 중건하였고 1568년(선조 1) 무렵에 성원(性元)이 목어, 법고, 범종, 바라 등을 조성하였고, 남쪽 절벽 밑에 남암(南庵)을

지었으며, 의상이 세웠던 청련전을 옛터에 중건한 뒤 동전(東殿)이라 하였다.

 

 

 

 

임진왜란 전에 영산전(靈山殿)과 서전(西殿)을 건립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영산전만이 남고 모두 전소되었다.

성원은 1603년에서 1609년(광해군 1) 사이에 선당(禪堂)을 건립하였고, 불전(佛殿)·승사(僧舍)를 중건하였다. 1701년(숙종 27)에는 진성(眞性)이 중수하였고, 1721년에는 천옥(天玉)이 중건하였다.

 

 

 

 

 

그 뒤 혜능(惠能)이 요사채를 신축하였으며, 재헌(在軒)과 유일(有逸)이 원통전(圓通殿)을 중수하고 청련암(靑蓮庵)을 이건하였다. 1899년과 1906년에는 설운(雪雲)이 절을 중수하고 선방(禪房)을 신축하였다.

 

 

 

응진전(應眞殿)은 1578년(선조 11)에 건립한 건물로 불영사의 건물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으며 통일신라 말의

선종 구산문 가운데 하나인 도굴산파(盜掘山派)의 개조 범일국사(梵日國師)의 초상화인 탱화를 봉안한 곳이다. 이 전각은 구조법도(構造法度)가 연구 자료로 되어 1973년 2월 문화재관리국 조사반장 정영호(鄭永鎬) 교수

일행에 의하여 85점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응진전(應眞殿)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 와가 다포집으로

측면 지붕 마구리의 박곡 처리, 삿갓 천장, 부연이 없는 광창 등 특이한 형식이다. 이곳에는 탱화 1폭이 봉안

되었는데 '광무십년 병오팔일…의상조사개분입채동시봉안우조사전(光武十年丙午八日…義湘祖師改粉入彩同時奉安于祖師殿)'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의상대사의 영정을 개분할 때 같이 개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보물 제730호인 불영사응진전(佛影寺應眞殿)을 비롯하여 극락전·대웅보전·명부전(冥府殿)·조사전(祖師殿)·칠성각·범종각·산신각·황화당(黃華堂)·설선당(說禪堂)·응향각(凝香閣)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35호인 불영사삼층석탑을 비롯하여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62호인 불영사부도(佛影寺浮屠), 그 밖에도 대웅전 축대 밑에 있는 석귀(石龜)와 배례석(拜禮石)·불영사사적비 등이 있다.

 

 

 

 

 

 

불영사 삼층석탑은 기단부·탑신부·상륜부가 모두 완존하고 있다. 탑은 2중 기단으로서 하층 기단 면석, 상층 기단 면석에 모두 탱주가 있고 두 우주를 각출하였으며 안상(眼象)은 없다. 옥신은 삼층이 모두 두 우주로 되어 있고

옥개는 4단 받침에 2단의 괴임이 있다. 추녀는 전각(轉角)에서 반곡(反曲)이 있고, 2층 탑신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상륜부에는 노반(露盤)·복발(覆鉢)·앙화(仰花)·보륜(寶輪)이 있는데 현재는 놓인 순서가 바뀌었다. 총 높이는 3.21m이다.

 


 

 

 

이 절의 동쪽에는 삼각봉(三角峰), 아래에는 좌망대(坐望臺)와 오룡대(五龍臺), 남쪽에는 향로봉(香爐峰)·청라봉(靑螺峰)·종암봉(鐘岩峰), 서쪽에는 부용성(芙蓉城)·학소대(鶴巢臺), 북쪽에는 금탑봉(金塔峰)·의상대(義湘臺)·원효굴(元曉窟)·용혈(龍穴)이 있는데 모두 빼어난 경관을 이루고 있다.

 

 

 

 

대웅전 내 삼존불의 주존불은 나발에 육계가 있다. 통견(通肩)을 하고 삼도의 구분이 있으며 군의대를 하였다.

주존불은 좌고 99㎝, 두고 33㎝, 견폭 54㎝, 흉폭 41.5㎝, 무릎 폭 69㎝, 무릎 높이 14㎝이다. 좌우협시불은

보화(寶花) 새김의 보관을 쓰고 있으며 삼도가 있고 현수가 귀를 감아 내리고 있으며 연경을 잡고 있다.

 

 

 

 

 

 

 

 

 

 

 

 

불영사의 석귀(石龜)는 대웅전 축대 밑에 두부만 노출되도록 중앙의 좌우에 배치하였다.

두부의 크기는 목까지 길이 65㎝, 경(徑)이 20㎝이다. 이와 같이 석귀가 대웅전을 받치고 있는 것은

풍수설과 거북에 대한 세간의 믿음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1899년(광무 3)에 설치한 범종루는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풍우로 훼손되어 중수하였고 종각은 범종각(梵鐘閣)에 괘종 병용(掛鐘 並用)하던 것을 다시 종각을 신축하여 대종(大鐘)을 달아 1978년 9월 19일에 타종식을 하였다.
범종루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목조 와옥 맞배집으로 양쪽으로 풍판(風板)을 달았다.

현재는 접객실로 사용되며 좌측에 사모 지붕의 새로운 범종루를 만들었다.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에 지붕의 양단을 길게 낸 것이 특징이다. 안에는 칠위(七位)의 신장대왕(神將大王) 즉, 일직사자(日直使者)·도시대왕(都市大王)·태산대왕(泰山大王)·송제대왕(宋帝大王)·초강대왕(楚江大王)

섭성대왕(燮成大王)·오도전륜대왕(五道轉倫大王) 등의 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신장대왕 어깨의 크기는 길이 2.09m, 폭 2.65m 정도이다.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 와가 주심포 양식의 겹처마이다. 문은 교창(交窓) 무늬로 되어 있는데

삼존목불좌상이 봉안되었고 탱화 3점이 봉안되어 있다. 삼존목불좌상의 주존불은 좌고(坐高) 1.14m,

두고(頭高) 34㎝, 견폭(肩幅) 33㎝, 무릎 높이 20㎝이다. 좌우협시불도 동일한데 좌고 1.08m, 보관고(寶冠高)

23㎝, 두고 18.6㎝, 견폭 46㎝, 흉폭(胸幅) 25㎝, 무릎 폭 75㎝, 무릎 높이 20㎝이다. 탱화는 한 점은

1739년에 경상좌도 경주 북령 보현산 거조사 오주암에서 조성한 것이고, 나머지는 최근의 것이다.

 

 

 

극락전 내 삼존불의 주존불은 나발(螺髮)에 육계는 없다. 목에는 삼도(三道)의 구분이 뚜렷하며 군의대(裙衣帶)를 하였으며 오른손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있다. 삼존불은 좌고 114.2㎝, 두고 34㎝, 견폭 52㎝,

흉폭 33㎝, 무릎 폭 82㎝, 무릎 높이 20㎝이다. 좌우협시보살(左右脇侍菩薩)은 좌고 108㎝, 보관고 23㎝,

두고 18.6㎝, 견폭 46㎝, 흉폭 25㎝, 무릎 폭 70㎝, 무릎 높이 17.8㎝이다. 대웅보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 와옥의 다포집이다. 안에는 5점의 탱화가 있는데 모두 조선 말기의 것이다.

 

첫 번째 것은 1860년(철종 11), 두 번째 것은 1906년(광무 10), 세 번째 것은 1735년(영조 11), 네 번째 것은

1880년(고종 17), 다섯 번째 것은 묵기(墨記)가 없다. 또 금구(禁口) 1구가 있는데 지름 66.5㎝이고 네 곳에

범자(梵字)를 새겼으며, 대웅전 석축 밑에 두부(頭部)만 노출된 귀부(龜趺)가 양쪽에 있다.

 

 

 

 

 

 

 

 

 

 

 

 

 

 

 

                                                                                                               촬영일: 2013년 8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