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산서원(玉山書院)
옥산서원(玉山書院)은 회재(晦齋) 이언적(李彥迪, 1491∼1553)의 덕행과 학문을 기리기 위해 1573년(선조 6)에 창건되었다. 서원은 1574년(선조 7)에 '옥산(玉山)'이라는 사액을 받았으며, 흥선대원군이 전국 47곳의 서원을 제외한 나머지 서원을 철폐할 때에 훼철되지 않은 서원 가운데 하나이다.
역락문은『논어(論語)』의「학이(學而)」편에 나오는 "벗이 멀리서 찾아오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하냐
(有朋 自遠方來 不亦樂乎)" '유붕자원방래불역락호' 에서 취한 것이라고 한다.
서향의 정문인 역락문(亦樂門)을 들어서면 무변루(無邊樓)라는 누각이 나타나고, 이어서 계단을 오르면 마당이 펼쳐진다. 정면에는 구인당(求仁堂)이란 당호의 강당이 있고, 좌우에는 원생들의 기숙사격인 민구재(敏求齋), 암수재(闇修齋)의 동·서재실이 있다. 강당을 옆으로 돌아서서 뒤로 가면 이언적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체인묘(體仁廟)라는 사당이 나타나는데, 사당의 주변에는 장판각(藏板閣)·전사청(典祀廳)·신도비(神道碑) 등이 있다.
옥산계곡 옥산서원 독락당 계정 그리고 정해사지 십삼층석탑 이곳 포항에서 그리 멀지않은 곳이기도 하다.
행정구역상으론 경주시에 속한 지역이기는 하지만 포항이 더 가까운 생활권이기도 하다. 그런 옥산서원을
먼 옛날 이야기 같은 기억속으로 더듬어 거슬러 올라가면 포항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혹은 직장생활 처음 시작
할 때 까지만해도 관광버스를 전세내어 야유회 때나 찾아가던 곳이기도 했다.
그 당시 서원 안쪽을 두루 살펴 보기는 했지만 세월이 흐르고 요즘 처럼 너 나 할 것 없이 자동차로 카메라
하나씩은 다 가지고 다니는 시절이다 보니 바깥으로 잠겨진 자물쇠를 보고는 마당 안으로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는 생각이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찾아 드는데 마침 손님 맞이라도 하는듯이 활짝 열려있는 역락문을
들어서고 보니 이곳 저곳 사진으로 담아 볼 구경거리도 많았다는 생각이 든다.
원생들의 기숙사격인 민구재(敏求齋)
원생들의 기숙사격인 암수재(闇修齋)
서향의 정문인 역락문(亦樂門)을 들어서면 무변루(無邊樓)라는 누각 아래로 계단을 오르면 마당이 펼쳐진다.
정면에는 구인당(求仁堂)이란 당호의 강당이 있고, 좌우에는 원생들의 기숙사격인 민구재(敏求齋)와
암수재(闇修齋)의 동·서재실이 있다.
강당 전면에 걸린 '옥산서원' 편액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글씨.
강당 대청 전면의 편액 '옥산서원'
창건 당시 사액받은 편액으로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1538∼1609)의 글씨라고 한다.
편액의 왼쪽을 보면, 옛날 편액 글씨를 베껴 써 만들어 걸었다는 의미의 ‘구액모게(舊額摹揭)’ 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이로 보아 건물이 불탈 때 편액은 다 타지 않았거나, 아니면 그 글씨 원본이 남아 있어 그것으로 다시 새겨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아계가 이 편액 글씨를 쓰게 된 것과 관련해 일화가 전한다.
선조가 옥산서원에 사액할 때 누구에게 글씨를 맡길 것인가를 두고 어전 회의를 했다.
당시 석봉이 글씨로 이름을 날릴 때여서 다들 그를 암묵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석봉의 나이가 젊어서, 선조 본인도 그의 글씨를 좋아했지만 예의상 대신들에게
글씨를 쓰고 싶은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런데 의외로 아계가 쓰겠다고 나섰다.
아계의 지위 등으로 보아 누가 뭐라고 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어서 그가 결국 편액 글씨를 쓰게 되었다고 한다.
한호(韓濩, 1543~1605)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서예가일 것이다.
한호라는 이름이 낯선 사람이라도 한석봉(韓石峰)이라고 하면 대부분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강당 전면에 걸린 '옥산서원' 편액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글씨이고, 강당 대청 전면에
있는 '옥산서원' 편액은 창건 당시 사액받은 편액으로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1538∼1609)의 글씨이며,
'무변루'와 '구인당'의 편액은 석봉(石峯) 한호(韓濩, 1543∼1605)의 글씨이다.
한호의 본관은 청주(淸州)고 자는 경홍(景洪), 호는 석봉이다.
한호는 1543년(중종 38) 개성에서 태어났다. 점치는 사람은 “옥토끼가 동쪽에서 태어났으니 서울의 종이 값이
오를 것”이라고 예언했고, 부모는 서성(書聖)으로 불리는 중국 최고의 명필 왕희지(王羲之)가 자신의 글씨를
주는 꿈을 두 번이나 꾸었다고 한다.
한호는 1567년(명종 22) 24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했다. 정확한 까닭은 알기 어렵지만 그러나 대과에는
급제하지 못했다. 그는 뛰어난 글씨로 사자관 (寫字官)에 발탁되어 오래 근무했다. 사자관은 승문원
(承文院, 정원 40명), 규장각(奎章閣, 정원 8명)에 소속되어 말 그대로 글씨를 쓰는(模寫) 관원이었다.
당연히 그들은 가장 중요한 문서인 국왕의 어서(御書)와 외교문서의 필사를 전담했다.
한호가 명필로 이름나게 된 중요한 계기는 두 가지였다고 한다. 하나는 대외의 인정이었고,
다른 하나는 국내의 성가(聲價- 세상에 드러난 좋은 평판)였다.
그는 당시의 전세계라고 할만한 모든 지역에서 명필로 평가받은 것이었다.
한호가 중국에서 명필로 알려지게 된 계기는 5차례의 중국 사행이었다. 그는 1572년(선조 5)에 정유길(鄭惟吉), 1582년(선조 15)에 이이(李珥), 1601년(선조 34)에 이정구(李廷龜)의 사행과 1581년(선조 14), 1593년(선조 26) 주청사(奏請使)가 파견될 때 사자관으로 동행했다. 그때 그의 글씨를 본 중국의 일급 지식인들은 감탄과
호평을 아끼지 않았다.
명대 후반의 저명한 학자인 왕세정(王世貞)은 그의 글씨를 “성난 사자가 돌을 헤치는 것 같고, 목마른 천리마가 물로 달려가는 것 같다”고 평가했고, 명의 사신 주지번(朱之蕃) 또한 “왕희지, 안진경(安眞卿)과 우열을 다툴 만
하다”고 격찬했다. 임진왜란에 참전한 명장(明將) 이여송(李如松)과 마귀(麻貴), 등계달(鄧季達)과 유구(琉球)의 사신 양찬(梁燦) 등도 그의 글씨를 요청해 받아갈 정도였다.
그의 출세에 가장 크고 결정적인 계기는 무엇보다도 국왕 선조(宣祖)의 호평이었다. 선조는 한호의 큰 글씨(大字)를 보고 “기이하고 장대하기가 측량할 수 없다”고 감탄했다. 국왕은 어선(御膳)과 어주(御酒)를 자주 하사했고,
사자관이던 그에게 문반 벼슬을 제수했다. 그런 배려로 한호는 정랑(正郞)과 가평(加平)군수 등을 역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옥산서원(玉山書院) 구인당(求仁堂)의 편액(扁額)
무변루는 정면 7칸 건물인데, 가운데 3칸은 대청이고 그 양측은 각각 정면 1칸, 측면 2칸의 온돌방이며,
그 밖으로 좌우의 각 1칸에는 퇴칸처럼 덧붙인 누마루가 조성되어 서원 쪽으로는 강당 앞마당이 처마 사이로
보이고, 서원 밖으로는 계곡과 산이 한눈에 들어와 건물과 자연 사이의 경계가 없는 듯하다.
무변루 대청은 외부 쪽으로는 벽체를 설치하고 판문을 달아 공간의 트임과 막힘을 제한하는 한편, 강당 쪽으로는 창호를 달지 않고 트이게 하여 내부 지향적인 공간 구성을 하였다. 무변루는 외삼문에서 보면 2층이지만, 강당 쪽에서는 위층만 보인다.
구인당 뒤에는 내삼문인 체인문(體仁門)이 있고, 그 뒤에 담으로 둘러싸인 공간에 사당인 체인묘(體仁廟)와
전사청이 있다. 체인묘의 '체인(體仁)'은 어질고 착한 일을 실천에 옮긴다는 말로, 성리학에서 제일 중요시
하는 것이다. 사당 담 밖 왼쪽으로는 경각(經閣)이, 오른쪽으로는 신도비각(神道碑閣)이 있고, 서원 영역
왼쪽으로는 고직사, 포사, 문집판각 등이 있다.
용도는 무엇일까?
이름은 무엇일까?
구인당(求仁堂)의 뒷모습.
민구재(敏求齋)의 뒷모습.
암수재(闇修齋)의 뒷모습.
촬영일: 2013년 9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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