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문화유적유물산책

영양 서석지(英陽 瑞石池)

도랑도랑 2013. 5. 15. 20:41

 

 

영양 서석지(英陽 瑞石池)
중요민속자료 제108호
소재지 : 경상북도 영양군 입암면 연당1동 394-1

 

이 서석지는 조선 광해군(光海君) 5년(1613)에 석문 정영방(石門 鄭榮邦) 선생이 경정(敬亭) 앞에 만든 조선시대 민가(民家)의

대표적인 연못[池塘]이다. 선생은 1577(선조10年)에 예천 용궁에서 출생하여 우복 정경세(愚伏 鄭經世) 선생이 우산(愚山)에서

제자들을 가르칠 때 수업하여 경학(經學)의 지결(旨訣)을 배웠다. 선생은 성리학과 시(詩)에 능하였고, 1605년(선조38年)

진사(進士)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1608년 이후 광해군 때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이곳에서 학문 연구로 일생을 마쳤다.

그 후 1627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세상이 점점 더 어지러워졌다. 1636년(仁祖14年) 병자호란이 끝나자 선생은 넷째아들인

임천 제(臨川 悌)를 데리고 자양산(紫陽山) 남쪽 기슭인 이곳(진보의 임천, 현재 입암면 연당 1동)에서 살았다 한다.

 

 

 

 

선생은 서쪽의 구릉 하에 흰 돌이 서있는 곳에 못을 파고 서석지라 이름을 짓고, 그 위에 정자를 세웠다. 좌우로 주일재(主一齋)와

운서헌(雲棲軒)을 두고 경정(敬亭)이라 일컫었다. 이 정자는 자손들이 여러 차례 중수하였으며 건물이 방박하고 사방 부연을 달고

사면에는 난간을 돌렸으며 좌편에 서실 두 칸을 별도로 개축 하였으니 주일제라 말한다. 못 가운데는 부용화(연화)가 있어 여름에는 정자위로 향기를 풍기며 꽃을 구경할 만하다. 그리고 정자 앞에 서 있는 은행나무는 경관을 더욱 좋게 하며 경정의 역사(현재 수령이 400살이 넘었다)를 말하여 준다. 마루 위에는 정기(亭記), 중수기(重修記) 경정운(敬亭韻) 등 당시의 대명절의로 이름난 명사들의

시가 걸려 있다. 이 마을에는 선생의 자손들이 세거하고 있으며 1979년 12월 28일 중요민속자료 108호로 지정되었다. 또한 이

서석지는 1982년 2월 20일 서울 산림청 임업시험장 강당에서『한국정원문화연구회』주체로 열린『서석지 학술연구발표회』에서 문화재 전문위원 민경현(閔庚玹)씨가 이 정원(庭苑)이 갖는 독특한 양식과 조경술(造景術)등을 분석 평가하여 국내외에 널리 소개

하였다.

 

 

 

 

 

 

 

 


 

 

 

 

 

 

 

 

 

 

 

 

 

 

 

 

 

 

 

 

 

 

 

 

 

 

 

 

 

연당리 석불좌상

종 목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11호

지 정 일 1979.01.25
소 재 지 경북 영양군  입암면 연당리 361

경상북도 영양군 입암면 연당리 마을 한가운데 임시로 지어놓은 건물 안에 모셔져 있는 석불좌상이다.

광배와 대좌를 모두 갖추고 있는 불상으로, 머리와 눈부분이 깨져 있고 광배가 3조각으로 절단되어 있기는 하지만

거의 완전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

 

얼굴은 직사각형 형태이고, 사각형의 신체와 반듯한 어깨, 좁아진 무릎 등에서 경직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왼손에 약그릇을 들고 있어 이 불상이 모든 중생의 질병을 고쳐준다는 약사여래를 표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평행으로 흐르는 물결식의 옷주름이 새겨져 있다.

 

3단의 높은 8각형 대좌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고, 몸 뒤의 광배에도 연꽃무늬와 구름무늬가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다.

대좌의 연꽃무늬, 광배의 구름무늬, 그리고 불신의 정돈된 형태와 물결식 옷주름선 등은 통일신라 후기의 조각수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불상의 뒷면에 새겨진 글로 보아 889년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제작 연대가 확실하다는 점에서 의의가 클 뿐만 아니라,

지방색이 현저한 통일신라 후기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귀중하게 여겨진다.

 

 

 

 

 

 

 

 

 

선바위와 남이포

경상북도 영양군 입암면 연당리 서석지로 들어가는 길 좌측에 남이포를 바라보고 서있는 거대한 바위 하나가 우뚝 솟아있다.

선바위는 경상북도 영양군지지(英陽郡地誌)에 자양산의 끝인 자금병과 함께 석문이라 하였으며 옛부터 입암(立岩), 신선바위(仙岩), 선바우라고도 하였다.고 하는데 이곳 선바위와 남이포에는 전해져 내려오는 설화가 있었다.


 

 

 

옛날 조선 중종때 지금의 연당1리[蓮塘一里 : 옛 석백리(石白里)의 속칭 돌백리] 석백지(石白地) 가에

아룡(阿龍)과 자룡(子龍)이라는 형제가 살았다.

 

이 아룡과 자룡 형제는 원래 석백지의 지룡(池龍)의 소생으로 지용(智勇)이 뛰어났으나 일찍부터 흉계를 품어 역모를 꾀하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원래 아룡과 자룡은 신용(神勇)이 있어 누구라도 감당할 자가 없어 저들이 성세를 떨친 지 오래도록

토벌하지 못하였다. 그 소식이 당시 관중에 들어가자 조정에서는 묘의(廟議) 끝에 무용(武勇)이 절륜(絶倫)한

남이 장군[南怡將軍 : 의산군(宜山軍) 남휘(南暉)의 자(子)로 태종의 외손, 관(官)이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이르되 28세에

원사(寃死)함. 추증 충장공(忠壯公)] 일등공신에게 토벌령(討伐令)을 내렸다.

 

남이 장군이 이곳까지 내려와서 아룡과 자룡을 토벌할새 이들을 지금의 선바위 앞 강변으로 유인하여 양군(兩軍)이 대결하여

싸우게 되었다. 이때 관군과 반란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지자 우선 양군 장군이 검술로 대결하게 되었다.

 

이에 양군 주시속에 남이 장군과 아룡·자룡이 출전하여 검술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승패가 없었으나 차차 이합 삼합으로

들어가자 양편의 검술은 묘경이어서 보는 사람들도 점차 정신을 빼앗기게 되었다. 교봉(交鋒)이 더욱 치열하여지자 양편 장군은

점차 몸을 날려 공중으로 떠올라 가면서 검기(劍技)를 다툴새 섬섬(閃閃)한 검광만이 하늘에 비쳐 번쩍일 뿐 점차 사람은

아득하여 보이지 않고 공중에는 장시간 칼소리만 쟁쟁하게 울려올 뿐이었다. 바라보는 양군의 군사들은 몸에 땀이 배었다.

차차 칼소리가 멎어지자 아득히 공중을 바라보니 아룡과 자룡의 목이 떨어져 내려오는 것이었다. 이를 지켜보던 관군측에서는

크게 함성이 일어나고 환성이 터졌다.

 

이에 개선한 남이 장군은 늠름히 공중에서 내려오는 길에 대안(對岸)의 석문석벽(石門石壁)위에 검을 휘둘러 칼끝으로 자기의

초상을 석벽에 새기고 내려와서 그 도중(徒衆)들에게 항복을 받았다고 한다. 그 후부터 양군이 대전하던 이 계포(溪蒲)를

후인들은 ‘남이포(南怡浦)'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 높은 석벽을 쳐다보면 각(刻)이 뚜렷이 보인다고 한다.

 

                                                                                                                              촬영일: 2013년 5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