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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팔경(關東八景) 월송정(越松亭)

도랑도랑 2013. 8. 19. 20:54

관동팔경(關東八景)

간성의 청간정(淸澗亭), 강릉의 경포대(鏡浦臺), 고성의 삼일포(三日浦), 삼척의 죽서루(竹西樓),

양양의 낙산사(洛山寺), 울진의 망양정(望洋亭), 통천의 총석정(叢石亭), 평해(平海)의 월송정(越松亭)이

그것이며, 월송정 대신 흡곡(歙谷)의 시중대(侍中臺)를 넣는 경우도 있다.

 

 

대관령의 동쪽에 있다고 하여 관동이라는 명칭이 붙여졌으며, 그 명승지들은 관동지방의 수많은 경승지

중에서 특히 예로부터 손꼽혀 온 경승지로, 종래 강원에 속했던 망양정과 월송정은 현재 경북에 편입되었고,

또 삼일포와 총석정은 북한지역에 들어 있다.

 

 

 

2011년 8월 중순 휴가겸 3박4일의 일정으로 7번국도를 따라 고성까지 다녀온적이 있었다.

그 당시 관동팔경의 명소를 메모해두지 않아 모두 돌아보지는 못했다. 특히 비교적 가깝다는 이유로

경북지역의 명소는 일정에서 모두 빠져버렸는지도 모른다. 지금 다시 생각해 보아도 간성의 청간정(淸澗亭)

부근을 지날때 왜 들어가 보질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지난 8월15일 지역방송국의 뉴스데스크를 보면서

 

'울진엔 요즘 백일홍이 만개해 관광객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는데요.

백일홍 꽃잎이 한낮의 햇살에 비쳐 더욱 고운 자태를 드러냅니다.

도로 양쪽으로 펼쳐진 빨간 백일홍 물결이 가던 길도 멈추게 합니다.' 라는

내용을 본 아내가 은근히 가보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7월 20일 이후 무척이나 바쁜 일정으로 꼬박 3주간의 휴일도 없이 일에 묻혀 차라리 더운 날씨라면

일하면서 여름을 보내자는 심정으로 지나 왔는데 슬며시 날씨는 덥지만 울진의 백일홍 가로수 길이나

달려보고 올까 했더니 밖으로 나가는걸 싫어하던 사람도 기다렸다는듯이 좋아하는 눈치였다.

기왕 가는길 난 나대로 들러볼 명소들을 살펴 보면서 지도 한 장과 관광코스등을 울진군청 홈페이지에서

자료를 모아 준비를 하고 일요일 아침 일찌감치 출발을 해 보았다.

 

 

 

 

관동팔경은 예로부터 칭송되어 온 명승지인 만큼 이곳을 노래한 시가와 이곳에 얽힌 전설들이 많은데, 특히 조선

선조(宣祖) 때에 정철(鄭澈)이 관동팔경과 금강산 일대의 산수미(山水美)를 읊은 《관동별곡》이 유명하고,

또 신라시대에 영랑(永郞) ·술랑(述郞) ·남석랑(南石郞) ·안상랑(安祥郞)이 삼일포와 월송정에서 놀았다는 전설도

널리 알려져 있다.

 

 

 

 

월송정(越松亭)은 1326년(충숙왕 13) 존무사(存撫使) 박숙(朴淑)이 처음으로 지었다. 충선왕 때 안축(安軸)의

기문에 “정자를 여기에 지으면 그 운치가 한송(寒松), 월송(越松)의 두 정자와 서로 갑을이 될 것이다”라고 한

기록이 있으며, 1349년(충정왕 1) 이곡(李穀)이 쓴 「동유기(東遊記)」에 의하면 평해군청에서 5리 되는 곳에

이르면 일만 주의 소나무 속의 정자를 월송이라 하고, 이 월송에 사선(四仙)이 놀고 지나갔다 하여 그 이름이

연유된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옛 군지의 기록에 신라 때 영랑(永郞), 술랑(述郞), 남석(南石), 안상(安祥) 등 네 화랑이 달밤에 솔밭에서

놀았다고 하여 월송정이라 하였다 하며, 월국(越國)에서 소나무 묘목을 가져다 심었다고 하여 월송(越松)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월송정은 조선 중기 연산군 때 관찰사 박원종(朴元宗)이 중건하였고,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낡아서 무너지자

1933년 이 고을 사람 황만영(黃萬英), 전자문(全子文) 등이 다시 중건하였으나 일본군이 강제로 철거하여 터만

남았다. 1969년 울진 출신의 재일교포로 구성된 금강회(金剛會)의 김정문(金正門),박선규(朴善奎),김익만(金益萬)을

비롯한 80여 명이 정자를 신축하였으나 옛 모습과 너무 달라 해체하고 1980년 지금의 정자로 복원하였다.

현판은 최규하(崔圭夏) 전 대통령이 썼다. 월송정은 2008년 마루 부분의 보수공사를 마쳤다.

 

                                                                                                      (자료출처: 디지털울진문화대전참고)

 

 

 

 

 

 

1980년 지금의 정자로 복원 하면서 현판은 최규하(崔圭夏) 전 대통령이 썼다고 한다.

월송정은 2008년 마루 부분의 보수공사를 마쳤다.

 

 

 

   

 

 

 

월송정(越松亭)의 한시(漢詩) 편액(扁額)

 

 

안축(安軸)의 시(詩)


事去人非水自東(사거인비수자동)    옛 사람 간 곳 없고 산천은 의구한데

千年遺蹟在松亭(천년유적재송정)    천 년 전 옛 자취 송정 오직 남았구나.

女羅情合膠難解(여라정합교난해)    겨우살이 다정한 듯 서로 엉켜 아니 풀고

弟竹心親粟可春(제죽심친속가춘)    형제대가 마음 맞아 좁쌀방아 찧는구나.

有底仙郞同煮鶴(유저선랑동자학)    화랑들은 신선처럼 학을 구워 즐겨 해도

莫令樵斧學屠龍(막령초부학도룡)    초부들의 도끼로야 용 잡을 뜻 생각 말라

二毛重到會遊地(이모중도회유지)    머리털 반백 되어 예 놀던 곳 다시오니

却羨蒼蒼昔日容(각선창창석일용)    넓은 바다 푸른 솔은 예 모습 지녔고녀.

 

고려 말의 문인. 자는 당지(當之), 호는 근재(謹齋), 본관은 순흥(順興). 

1282(충렬왕 8)~1348년(충목왕 4). 고려 후기 문신·문인.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당지(當之), 호는 근재(謹齋). 경기체가

「관동별곡(關東別曲)」과 「죽계별곡(竹溪別曲)」의 작가이다.

 

 

 

기우자(騎牛子 ) 이행(李行)의 시(詩)

 

滄溟白月半浮松(창명백월반부송)

叩角歸來興轉濃(고각귀래흥전농)

吟罷亭中仍醉倒(음파정중잉졸도)

丹丘仙侶夢相逢(단구선여몽상봉)


넓은 바다 위로 밝은 달은 솔숲에 걸려 있는데

소뿔을 끌어당기며(소를 타고) 돌아오니 흥이 더욱 깊구나.

시를 읊다가 취하여 정자 가운데에 누웠더니

단구(丹丘 ; 신선들이 산다는 가상적인 곳)의 신선들을 꿈속에서 만나네. 

 

 

이행(李行, 1352~1432)

조선 세종대의 문신으로 본관은 여주, 자는 주도(周道), 호는 기우자(騎牛子) 또는 백암거사(白巖居士)이다.
충주목사 이천백(李天白)의 아들로 1371년(공민왕 20)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수찬이 되었다.
1386년(우왕 12) 탐라(耽羅)가 자주 반란을 일으키므로 전의부정(典醫副正)으로 탐라에 가서
성주(城主) 고신걸(高臣傑)의 아들 봉례(鳳禮)를 볼모로 데리고 왔다.
1389년(창왕 1)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로 사전(私田)의 폐단을 논하는 상소를 올리고 지신사(知申事)가 되었다.
1390년에 윤이(尹彛)의 옥사가 일어나자 이에 연루되어 옥에 갇혔으나 곧 석방되었다.
그후 경연참찬관과 예문관대제학을 지냈고 1392년에는 이조판서로 정몽주(鄭夢周)를 살해한 조영규(趙英珪)를

탄핵하였다. 이후 고려가 망하자 예천동(禮泉洞)에 은거하였다.

1393년(태조 2) 고려조(高麗朝)의 사관(史官)이었을 때 이성계를 무서(誣書)한 죄가 있다고 하여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가산이 적몰되고 울진에 귀양 갔으나 이듬해 풀려났다.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1871년에 편찬한 『여주읍지』의 인물편에 등재되어 있다는 내용이다.

 

기우자(騎牛子)란 별호는 선생이 월송정을 매일 밤 소를 타고 소요자적(逍遙自適) 한데서 남들이 지어준

이름이다. 기우자 선생은 (1352~1432)고려말 문신으로 이조판서와 예문관대제학을 지내신분으로 본관은

여주 “李”씨 諱는 “行”“ 字는 ”周道“ 별호는 ”백암거사(白巖居士)“ 이다.본래의 별호는 ”一可道人“이라했는데

이는 ”한가지만 옳다고 내세우는 고집불통의 사람“이라고 李씨 왕조에서 붙인 이름이다.

 

세종임금은 제문에서

「덕행은 일대에 높았고 굉걸(宏傑)한 재질은 실로 경세의 큰 그릇이라」고 추모했다.

그가 평해 유배시절 월송정 바닷가를 늘 소를 타고 거닐면서 여러편의 시를 남겼는데

「평해 월송정」「우제」등 두편만 전한다.

 

 

 

백암거사찬(白巖居士 贊)

절제 김종서 장군이 강원감사로서 이곳을 순회하다 기우자(騎牛子 )선생의

이야기를 듣고 그를 찬양하는 시를 남겼는데 월송정에 게판되어 있다.

 

백암거사찬(白巖居士 贊)

해상의 푸른 소나무와 같이

소나무위에 걸린 밝은 달과 같이

선생의 기백(氣魄)과 절의(節義)는

천추만세에 이르도록 빛날것이다

 

 

 

정조대왕(正祖大王) 어제시(御製詩)

 

環亭松柏太蒼蒼 (환정송백태창창)  정자를 두른 솔과 잦나무는 너무도 푸르른데

皮甲嶙峋歲月長 (피갑린순세월장)  겹겹의 껍데기엔 오랜 세월이 쌓이었네.

浩蕩滄溟流不盡 (호탕창명류하진)  광대한 큰 바다는 끝없이 흐르기만 하는데

帆檣無數帶斜陽 (범장무수대사양)  수많은 배 돛대들은 석양을 띠었구려.

 

정자를 둘러싼 송백은 울울창창한데

갈라진 나무껍질 세월이 오래로다

넓고 넓은 푸른 바다는 쉼 없이 출렁이는데

돛단배는 석양에 무수하게 떠 있구나

 

 

 

고려말의 문신 회정(晦亭) 전자수(田子壽)의 월송정 시를

서예 대가 강암(剛菴) 송성용(宋成鏞)이 쓴 글씨라고 한다.

 

月松亭 / 회정 전자수

현회의여월(顯晦宜如月)     현(顯)하고 회(晦)함이여 저 달과 같을 지며

수지내약송(守持乃若松)     자기 몸가짐에는 저 솔과 같은지라

정겸이정학(亭兼二正學)     이 정자 두 가지 교훈을 겸비하였으니

변시도중용(便是道中庸)     이것이 곧 중용(中庸)의 말함이로다

 

회정(晦亭) 전자수(田子壽)
본관은 담양(潭陽), 자는 백인(伯仁), 호는 회정(晦亭)이다. 찬성사(贊成事) 경은(耕隱) 전조생(田祖生)의 장손이며,

전순(田順)의 장남이다. 고려 말 품계가 종이품 광정대부(匡靖大夫)에 올라 첨의평리(僉議評理) 겸

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을 지냈다. 사간(司諫)으로 강원도안렴사(江原道按廉使)가 되어 평해(平海:지금의 울진 지역)를

순시하던 중 뛰어난 산수에 반하여 벼슬을 버리고 양진재(養眞齋)에 은거하며 만년을 보냈다. 의령 태암서원(泰巖書院)과

울진 경문사(景文祠)에 봉안되어 있다.

 

강암(剛菴) 송성용(宋成鏞) / 1913∼1999. 현대의 서예가.

전라북도 김제(金堤) 출생. 호는 강암(剛菴). 유재(裕齋) 송기면(宋基冕)의 아들이다.
일찍이 한학(漢學)에 입문하여 문리(文理)를 터득하였으며, 서법(書法)과 그림에 취미를 가져 일가를 이루었다.

학문과 범절을 아버지로부터 이어받아 보발(保髮)을 고집하고 양복(洋服)을 입지 않았다.
그가 살았던 일제강점기 때에는 창씨개명과 신학문을 반대하는 생활로 일관하였다.

서법에 있어서 그는 다양한 서체를 구사하였으며, 그림은 문인화를 주로 그렸다.
그의 문하에 유능한 제자들이 많았는데, 주로 전라도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최근에는 강암일대전(剛菴一代展)을 개최하여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이산해(李山海)

1539(중종 34)∼1609(광해군 1). 조선 중기의 문신.
자 여수(汝受), 호 아계(鵝溪), 종남수옹(終南睡翁), 시호 문충(文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여수(汝受), 호는 아계(鵝溪)·종남수옹(終南睡翁). 장윤(長潤)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치(穉)이고, 아버지는 내자시정(內資寺正) 지번(之蕃)이며, 어머니는 남수(南脩)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작은아버지인 지함(之菡)에게 학문을 배웠다.
1558년(명종 13) 진사가 되고, 1561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에 등용되고,
이듬 해 홍문관정자가 되어 명종의 명을 받아 경복궁대액(景福宮大額)을 썼다.
이어 부수찬이 되고 1564년 병조좌랑·수찬, 이듬 해 정언을 거쳐 이조좌랑이 되었다.

 

 

 

해월 황여일(海月 黃汝一)


海客乘槎訪越松(해객승사방월송) 靑蛇袖裏暎芙蓉(청사수리영부용)

東臨碧海開銀鏡(동림벽해개은경) 北見靈驚擧玉峯(북견령경거옥봉)

古廓人稀曾弔鶴(고곽인희증조학) 平沙松老盡成龍(평사송로진성룡)

定知周滿難通駿(정지주만난통준) 誰遺羅郞獨住(수유라랑독주)笻

模擬淸都煩帝畵(모의청도번제화) 鑿開靈境試神鋒(착개령경시신봉)

寒帶雪鴉難宿(지한대설아난숙) 沙淨鋪霜蟻不封(사정포상의부봉)해객이 뗏목을 타고 월송정을 찾아오니

청룡등 가운데에 부용봉이 어렸구나

동으로 푸른 바다 은거울 펴놓은 듯

북으로 신령한 산 옥봉을 들었구나

옛 고을에 사람 드물어 확이 된 정영위(丁令威)가 울었고

모래톱에 늙은 솔은 모두 용이 된 고로 알겠다

둘레가 꽉 찼으니 주목왕(周穆王)의 말 준마로도 지나기 어렵구나

그 누가 신라의 화랑 술랑을 홀로 여기에 머물게 하였는고

하늘나라 옥황상제의 획책(劃策)을 본떠서

영경을 뚫어 열어 신봉(神鋒)을 시험하였는지

겨울나무 가지에 눈이 쌓여 까마귀도 자고 가기 어렵고

깨끗한 모래사장에 서리마져 펴놓았으니 개미도 집을 짓지 못하네

푸른 산색은 하늘에 닿아 구름 위로 뾰족 뾰족하고

서늘한 그늘은 땅을 깔아 녹음이 겹겹하다

바람이 불어와서 부는 퉁소 소리도 도우고

달빛이 비추어 아리따움을 더하니 눈 내린 모습일세

평읍(平揖)을 하고 마고선녀가 봉도(蓬島)에 내려오니

멀리서 화조(花鳥)가 손님을 맞아 번거롭구나

정에 함께 오르니 땀이 흐르고 바야흐로 안계(眼界)가 열리니

동해를 다 들여 마시어 가슴이 가득하네

칠성의 선유(仙遊)는 몽접(夢蝶)을 빙자했고

삼한의 중생을 보기엔 벌통 속의 벌떼인양 하여라

고요한 산수의 경치 선경 같은 속에서 천일을 보내니

인간 세상에서는 몇몇 해나 지났던고

봉가(鳳駕)를 타고 올 때는 산이 적적했고

표륜(颷輪)을 타고 간 후에는 물이 넘실넘실 흐르더라

옥경동자는 어디에서 단약(丹藥)을 짓는고

쇠솥 쓰던 당시(當時)에는 석농(石濃)에다 구웠다는데

경장(瓊漿) 빚어 한번 취해서 황홀한 기분이 되어

난새를 타고 돌아갔다 다시 또 와서 만나고 싶다

생전에 이곳을 남겨 두고 간 것을 후회하여

북해 창오(蒼梧)를 찾아다니는 부질없음이여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 월송리 362-2번지
월송정을 복원하며 세운 금강회의 공적 기념비이다.

 

 

 

 

 

                                                                                                               사진 촬영일: 2013년 8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