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문화유적유물산책

경주 탈해왕릉 (慶州 脫解王陵)과 경주 표암(慶州瓢巖)

도랑도랑 2013. 5. 11. 22:47

 

 

경주 탈해왕릉 (慶州 脫解王陵)
신라 탈해왕(재위 57∼80)의 무덤으로 소나무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신라탈해왕릉 → 경주 탈해왕릉)으로 명칭이 변경 되었다.(2011.07.28 고시)

 

 

 

『삼국사기』에 의하면, 왜국 동북 1,000리 지점에 다파나국의 왕비가 알을 낳았는데 불길하다 하여 보물과 함께 궤짝에 넣어 바다에 띄워 보냈다. 처음에는 금관국(김해)에 닿았으나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겨 아무도 거두지 않았고 다시 진한의 아진포에 닿았는데 노파가 거두어 키웠다. 궤짝이 떠오를 때 까치 한 마리가 따라다니며 울었다고 하여 까치 작(鵲)자에서 조(鳥)를 떼고 석(昔)으로 성을 삼고, 아이가 궤를 풀고 나왔다 해서 이름을 탈해(脫解)라 지었다. 탈해왕은 석(昔)씨의 시조로서 신라 최초 석씨 왕이 되었다.

 

 

 

 

 

 

높이 4.5m, 지름 14.3m의 둥글게 흙을 쌓아올린 원형 봉토무덤이다. 주변에 아무런 시설을 하지 않았으며,

겉으로 보아 내부는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으로 추측된다.

 

 

 

 

경주 표암(慶州瓢巖)
1985년 10월 15일 경상북도기념물 제54호로 지정되었다. 경주이씨(慶州李氏) 대종회가 소유하고 있다.

‘박바위’, ‘밝은 바위[光明巖]’라는 뜻을 가진 바위로, 탈해왕릉(脫解王陵) 서북쪽의 박바우산에 있다.

경주이씨 시조이자, 신라 6촌(六村) 가운데 근본이 되는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의 시조인 이알평(李謁平)이

하늘에서 내려온 곳이라고 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본래 일본 사람인 호공(瓠公)이 처음 동해에서 건너올 때 허리에 찬 표주박[瓠]을 이곳에 풀었는데,

그뒤 호공은 박혁거세를 도와 나라 건립에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고 한다. BC 69년에 6촌장이 여기에 모여 화백회의를 열고

신라 건국을 의결했다고도 전해진다.

 

 

표암제의 외삼문인 산앙문

 

 

경주이씨의 근원지이며, 신라건국의 산실이자 화백이라는 민주정치 제도가 시작된 성스러운 곳이라는 뜻을 새기기 위해

1806년(순조 6) 유허비(遺墟碑)가 세워졌다. 이어 1925년 표암재(瓢巖齋)가 건립되고, 전사청(典祀廳), 내외삼문(內外三門),

경모대비(景慕大碑) 등이 건립되었다. 해마다 3월 중정(中丁)에 향사(享祀)를 봉행한다.

 

 

 

헌덕왕릉을 돌아보고 오던길 늘 지나다니면서도 백률사란 이정표를 보아온 곳이었지만 멀지않은 곳이면 한번쯤 들어가 보고 싶어져

탈해왕릉 앞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탈해왕릉 옆으로는 등산로인듯 길이 훤히 뚫여 있었다. 이정표를 쳐다보니 1.5km 이미 오전부터

야생화 탐사길에 너무 많이 걸었다. 오후 해는 남아있어 들어간 탈해왕릉  그시간 백률사 까지 갔다가 돌아 오기엔 너무 먼 거리가 될것만 같았다. 좌측으론 작은 다리 하나가 걸쳐져 있었고 돌계단이 이어져 있길래 따라 올라가 보았다.

 

 

 

 

 

 

 

 

 

 

 

 

 

 

 

 

 

 

 

 

 

 

 

 

                                                                                     촬영일: 2013년 4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