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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헌덕왕릉 (慶州 憲德王陵)

도랑도랑 2013. 5. 11. 20:15

 

 

경주 헌덕왕릉 (慶州 憲德王陵)
경주 북천가에 있는 신라 제41대 헌덕왕(재위 809∼826)의 무덤이다.
※(신라헌덕왕릉 → 경주 헌덕왕릉)으로 명칭이 변경 되었다.(2011.07.28 고시)

 

 

 

 

 

헌덕왕의 본명은 김언승이며, 조카인 애장왕을 죽이고 왕이 되었다.

재위기간 동안에 농사를 권장하고 당나라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나, 김헌창의 난과 김범문의 난이 일어나는 등 국내정세가

혼란스러웠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826년에 왕이 죽자 천림사의 북쪽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천림사의 위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이 왕릉의 남쪽에 절터가 있어 이곳을 천림사 터로 본다.

이 능은 원형 봉토분으로 지름 26m, 높이 6m이다.

 

 


봉분 밑의 둘레를 따라 둘레돌을 배치하여 무덤을 보호하도록 하였다.

둘레돌은 먼저 바닥에 기둥 역할을 하는 돌을 한단 깔고, 그 위에 넙적한 돌(면석)을 세웠다.

면석사이에는 기둥역할을 하는 탱석을 끼워 고정시켰다. 탱석에는 무덤을 수호하는 상징적 의미로 방향에 따라

12지신상을 조각하였는데, 이 무덤에는 현재는 12지신상 중 돼지(해)·쥐(자)·소(축)·호랑이(인)·토끼(묘) 등

5개상만이 남아있다. 둘레돌 밖으로는 돌기둥을 세워 난간을 설치하고, 둘레돌과 난간 사이 바닥에는 돌을 깔았다.

지금의 모습은 1970년대에 정비된 것으로, 둘레돌의 일부와 돌난간석을 새로 만들었다.

 

 

 

 

 

 

 

 

 

 

 

 

 

 

 

지난 4월 28일 야생화 보고 오던날 보문호를 지나 강변 도로를 지나 오면서 여유로운 시간

길 옆에 바로보이는 헌덕왕릉 이정표 따라 들어가 보게 되었다.

 

왕릉앞에 세워져 있던 안내판의 내용부터 읽어보니 고려, 조선 시대의 기록에는 북천이 범람하여 능이 훼손되었다고

전한다고 했으며, 무덤의 하부에 병풍처럼 다듬은 돌로 보완을 했고, 보호석에는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새겼는데

지금은 북쪽에 있는 쥐(子)상을 비롯하여  소(丑), 범(寅), 토끼(卯), 돼지(亥)상  등 다섯개만 남아 있다는 대목이

흥미로워 하나 하나 사진으로 담아보기도 했다.

 

                                                                                                      사진 촬영일: 2013년 4월 28일

 

분황사와 헌덕왕릉의 물싸움이란 글이 흥미로워 옮겨본다.

 

북천은 경주시 황룡동 골짜기에서 발원하여 보문호를 거쳐 시 중심가를 가로질러 흐르다가 황성대교 아래에서 형산강으로 유입된다.

동경잡기에는 이 북천을 동천(東川)이라고 하며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북천(北川) 또는 알천(閼川)이라고도 하는데 부의 동쪽 5리에 있다. 추령(楸嶺)에서 나와 굴연(堀淵)으로 들어간다. 전설에 ‘냇물이 동북으로 흘러나와 곧장 읍의 거주지로 뚫고 들어오므로 고려 현종 때 전라 ․ 충청 ․ 경상 3도의 군정(軍丁)을 징발하여 돌로 제방을 쌓고 나무를 심어 숲을 만듦으로써 수해를 방지했다.’ 한다”

 

이 기록으로 미루어 옛날에는 황룡사지를 거쳐 월성 쪽으로 흘렀음을 짐작할 수 있다. 14대 유례이사금 때에는 홍수로 월성이 무너졌다는 기록도 있어 북천의 물길이 현재와는 많이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언젠가 부터는 둑을 쌓거나 홍수 방지용 숲을 조성하여 현재와 비슷한 물길이 되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알천 즉 북천을 사이에 두고 남에는 분황사가 북에는 헌덕왕릉이 있다.

헌덕왕릉 둘레돌의 일부와 돌난간석을 새로 보완한 것을 알 수 있다. 어느 때인가 홍수로 능이 크게 훼손된 것을 보완하였던 것이다.

 

지난 1959년 사라호 태풍 시에는 홍수로 보문(숲머리)에 있는 민가 여러 채가 분황사 남쪽으로 떠내려 온 적이 있다.

다행히 당시 분황사는 큰 피해를 입지 않았으나 분황사 주위 가옥 및 농토는 피해가 컸다.

 

알천의 홍수와 관련하여 강의 남북에 있는 동천 마을과 구황 마을 사람들 사이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매년 여름이면 강을 사이에 두고 양 마을 사람들은 홍수로 늘 불안에 떨어야 했다. 그래서 동천 사람들은 홍수의 피해를 막아달라고 헌덕왕릉에 가서 빌고, 구황 사람들은 분황사 부처님께 기도를 드렸다. 홍수 때마다 동천의 헌덕왕 혼령은 물길을 남으로 돌리려고 애를 쓰고, 분황사 부처님은 구황 사람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 물길을 북쪽으로 돌리려고 하였다. 물길이 북쪽으로 흐를 때는 헌덕왕릉의 석상과 비석이 땀을 흘리고, 남쪽으로 치우쳐 흐를 때에는 분황사 부처님이 땀을 흘렸다.

 

헌덕왕의 혼령과 분황사 부처님이 워낙 치열하게 다투니 알천 냇물이 한 때는 하늘로 치솟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 홍수를 막기 위해 동천 사람들은 제방을 쌓고 구황 사람들은 보문동 숲머리에 5리에 걸쳐 나무를 심었다. 숲머리라는 마을

이름도 숲의 시작 부분이라 하여 생긴 것이다. 그러나 자연의 힘을 거스릴 수는 없어 분황사 북편은 황무지로 변하고 허덕왕릉은

반 이상 허물어 졌을 뿐만 아니라 석사자며 문무인상도 모두 홍수로 유실되었다. 현재 분황사 모전석탑 모서리에 있는 석사자는

헌덕왕릉에 있던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북천 즉 알천의 제방을 개수하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긴 알천 수개기가 북천 제방 북단 가까이에 있다. 1980년 11월 경주시 동천동(東川洞) 북천(北川) 북안에서 경주사적관리사무소(慶州史蹟管理事務所)에 의하여 조사되었는데, 자연암석 3면에 해서(楷書)로

음각되어 있다. 본문 중의 정해년(丁亥年)은 조선 숙종(肅宗) 33년(1707)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모두 90자(字)로 다음과 같다.

 

 

 

알천 수개기의 내용

“서쪽으로 흐르는 알천 물결에 읍성 동편 제방이 무너졌다. 나무와 석축으로 높다랗던 둑은 고려 때에 쌓은 것이다.

금년 정해년(1707)에 다시 개수하여 지형 따라 잡은 물 갈래는 옛길대로 물을 터 주었다. (이에)여기 암면에 사실을 적어

길이 후세에 전하려 한다. 부윤 연안이공(인징)이 쓰고 전희천 · 권성경 · 김명웅 · 임기중이 함께 도왔다.

손여의 · 서진 · 김창도 · 정세정과 스님 위성이 공사의 책임을 맡았으나 실지로는 손여의가 주관하였고, 감독과 관리는

이진명 · 김시경 등이 하였다.” (이근직, 1998, 경주의 문화유산Ⅰ)

 

삼국사기에서 알천의 홍수와 관련된 기록이 10회에 이르고 남해차차웅 때 알천에 낙랑군이 주둔한 것을 비롯하여

군대를 사열했다는 기록이 4회에 이른다.

 

출처: 정헌의 문화재 기행 / http://blog.naver.com/aa7303/1401622877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