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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제30호 흥덕왕릉(慶州 興德王陵)

도랑도랑 2013. 4. 29. 23:22

사적 제30호 흥덕왕릉(慶州 興德王陵)

경상북도(慶尙北道) 경주시(慶州市) 안강읍(安康邑) 육통리(六通里) 산42번지에 위치하며 사적 제30호로 지정된
신라 제42대 흥덕왕(興德王, 재위 826~836)의 능이다. 흥덕왕은 이름이 경휘(景徽)이고 헌덕왕(憲德王)의 친동생
장보고(張保皐)를 청해진 대사(淸海鎭大使)로 삼아 해적의 침입을 막았다. 흥덕왕릉은 안강읍 북쪽에 있는
어래산의 남동쪽으로 뻗어내린 구릉의 말단 완만한 경사면에 자리잡고 있으며, 육통리 마을에 바로 접해 있는
뒷산에 있다. 전형적인 풍수지리의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는 능은 지금까지 신라의 왕릉으로 알려진 것들이 대부분
경주분지와 접한 남쪽의 산간에 위치하는 것에 비하여 북쪽으로 멀리 안강에 위치하여 다른 것들과 비교가 된다는 릉이다.

 

 

능은 봉분의 크기가 직경 22.2m, 높이 6.4m의 원형봉토분으로, 봉분의 하단에는 1.3m 높이로 둘레돌(護石)을 돌리고, 둘레돌의 면석(面石) 사이 탱석(撑石)에는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양각하였다. 둘레돌에서 1m 거리를 두고 능 둘레에는 1.9m 높이의 석난간(石欄干)을 돌렸는데, 석난간의 석주(石柱)는 2주를 제외하고는 거의 유실 내지 훼손된 것을 복원하였다. 능의 바로 앞에는 상석(床石)과 후대에 설치한 향로대(香爐臺)가 있고, 능을 둘러싼 네 모서리에는 돌사자가 배치되어 있다.

 

 

 

 

전방으로 얼마간 떨어져서 동·서 좌우에 문인석(文人石)과 무인석(武人石)이 각 1쌍씩 배치되어 있는데, 무인석은 서역인(西域人) 모습을 하고 있다. 전방 좌측에는 석비(石碑)가 있었으나 비신(碑身)과 이수(이首)는 없어지고 머리가 일부 결실된 귀부(龜部)만 남아 있었는데, 1977년 국립경주박물관과 사적관리사무소의 발굴조사시 상당수의 비편(碑片)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흥덕왕릉은 전체모습이 괘릉(掛陵)과 비교되는 것으로 신라왕릉 최전성기의 완성된 양식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신라의 왕릉은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에서 돌방무덤(石室墳)으로 변하였고, 돌방무덤은 둘레돌(護石)의 양식에 따라 냇돌(川石)이나 자연석을 이용한 돌담식, 치석(治石)한 블록형 또는 장대석으로 쌓은 것, 또는 여기에 갑석(甲石)과 지대석(地臺石)을 갖추어 기단화한 것, 거대한 판석으로 둘레돌을 만들 때 불탑(佛塔)과 같이 탱주와 면석을 구분한 것, 그리고 둘레돌에 십이지신상을 조각하고 봉분 기저에 석난간을 돌리며 능 앞에 문무석인상(文武石人像), 사자상(獅子像), 화표석(華表石), 능비(陵碑) 등을 배치한 것 순으로 바뀌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형식들 가운데 이 흥덕왕릉(836년 축조)은 마지막 형식에 해당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 권10에 의하면 “조정이 왕의 유언에 의하여 장화왕비의 능에 합장하였다(朝廷以遺言 合葬章和王妃之陵)”라고 했으며, 『삼국유사(三國遺事)』 왕력편에는 “능은 안강 북쪽 비화양에 있는데 왕비 창화부인과 합장했다(陵在安康北比火壤與妃昌花合葬)”라고 해서 왕릉의 현재 위치가 일치하고 있다. 따라서 확실한 위치가 알려진 신라의 왕릉 가운데 하나가 흥덕왕릉이어서 당시 둘레돌과 십이지신상 양식의 변천상을 보여 줄 수 있는 기준이 되고 있다.

 

 

 

 

 

 

 

 

 

 

 

 

 

 

 

 

 

 

 

 

 

 

 

 

 

 

 

 

 

 

 

 

흥덕왕릉을 들러본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지난해 였던걸로 기억된다 그 때에도 토요일에 출근을 했다가 퇴근 시간 무렵까지도 해는 엄청 길게 남아 있었고

왕릉 위로 여러 종류의 야생화들이 피어 있는것을 본 적이 있었다. 모두가 처음 보는 꽃 들은 아니었지만 특별히 보기 힘들어진

종류즁 한가지가 내 어릴적 기억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그 솜양지꽃이 보고 싶어졌던 것이었다.

우린 어릴적 봄 날의 들판으로 호미들고 나가서 파릇이 돋아나는 새싹이 보일듯 말듯 할 때 까지는 마른 묵은잎을 보며 찾아

뿌리를 캐서 흐르는 시냇물에 깨끗이 씻은다음 껍질을 벗겨 씹어 먹으면 달큰한 맛이 동네 아이들의 유일한 군것질 거리이기도

했던 것이었다. 최근에서야 그것이 솜양지꽃이란 정명을 알게 되었지만 우린 그것을 짠대라고도 불렀다.

그 짠대꽃이 이제 막 피기 시작할 무렵인 것이다.

 

 

 

 

 

 

 

 

                                                                                                                                             촬영일: 2013년 4월 27일 토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