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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배동 삼릉 (慶州 拜洞 三陵)에서 금오산(金鰲山)에 올라보니

도랑도랑 2013. 4. 4. 22:24

 

남북 8㎞, 동서 4㎞. 경북 경주의 진산, 남산(495m) 산 치고는 작고 야트막한 편.

덩치는 작아도 그 안에 담긴 시간의 깊이는 깊고 또 넓다.

확인된 절터만 150곳이고 불상은 129기, 탑은 99기에 달한다고 한다.

전체 문화유적은 694개소이며. 고(古)신라부터 통일신라 이후, 심지어 고려시대 유물까지 빼곡하다는 표현도 쓴다.

산 전체가 절집이자 지붕 없는 박물관인 셈이다.

그러니 국립공원으로 지정(1968년)된 건 당연하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2000년)된 것도 어색할 게 없다는평.

(2012년 7월 5일 어느 일간지 19면의 기사 내용의 일부를 요약)

 

 

 

 

경주평야의 주위에는 서쪽에 선도산(仙桃山), 동쪽에 낭산(狼山)과 명활산(明活山), 북쪽에 금강산(金剛山) 등

많은 산들이 성벽처럼 둘러서 있는데 그중에 크고 높은 산이 남산이다. 남산에는 높이 494m의 고위봉(高位峰)과

468m의 금오봉(金鰲峰) 두 봉우리가 솟아 있는데 이 두 봉우리에서 흘러내리는 40여 계곡과 산발들을 합쳐서

경주 남산이라 부른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 거서간(居西干)이 탄생한 나정(蘿井)과 신라의 종막을 내린 포석정(鮑石亭)도 이곳에 있다.

그외에 왕릉들도 이곳의 여러 군데에 있어 이 산을 신라 역사와 유적의 산이라 부른다.

더욱이 6세기초 신라에 불교가 공인된 후로는 부처의 산으로 신앙되어 많은 절과 탑이 세워지고 불상들이 조성되었다.

현재까지 발견된 절터는 112곳이며, 탑은 61기이고, 불상은 80체를 헤아린다.

절터의 수는 암자로 짐작되는 곳도 독립시켜 계산한 것이므로 정밀히 조사하면 달라지겠지만

40여 계곡 중 절터가 없는 계곡은 거의 없다.


61기를 헤아리는 석탑 중에는 상륜부(相輪部)를 제외하고 높이가 7m 가량 되는 큰 것,

5~6m 되는 것, 3~4m 정도의 작은 것들이 있는데 그중 중간 것이 제일 많다.

평지가람(平地伽藍)에서는 법당 앞에 탑을 세우는 것이 일반적인데 남산의 절에는 법당의 위치와 상관없이

대개 보기 좋은 바위 봉우리 위에 세워져 남산의 탑들은 바위산과 연결되어 구름에 걸린 듯 솟아 보인다.

남산 불상 중에는 입체로 된 것이 29체이고 바위면에 새긴 마애불상(磨崖佛像)이 51체이다.

큰 것은 10m 가량 되는 것도 있지만 보통 4~5m 되는 것이 많다. 또 작은 것은 1m 정도 되는 것도 있다.


부처골 감실여래좌상(龕室如來坐像)이나 배리삼존불(拜里三尊佛)이나 장창골삼존불[長倉谷三尊佛]처럼

6세기말~7세기초에 조성된 것도 있고, 삼국의 통일을 기원하여 조성한 탑골부처바위도 있으며,

통일된 나라의 영광을 위해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칠불암(七佛庵)불상군도 있다.

그리고 왕정골[王井谷]여래입상이나 삿갓골여래입상(파편)처럼 우리 민족예술의 황금시대인 8세기 중엽에 조성된 것도 있다.

또 보리사[菩提寺]여래좌상처럼 화려하고 섬세하던 8세기말 내지 9세기 초반의 것도 있고,

9세기 중엽의 것들도 있어 수백 년 이어온 신라 불교미술의 흐름을 이곳에서 모두 볼 수 있다.

(인터넷 검색 백과사전의 내용 일부 요약)

 

약수계곡마애입불상 (藥水溪谷磨崖立佛像)

 

2013년 3월 31일 일요일

벚꽃이 활짝핀 흥무로를 거쳐 경주 남산에 올라 보기로했다.

가장 쉽게 접근 할 수 있는듯한 삼릉에서 출발 2005년 5월 난생 처음  이코스를 상선암 지나 상사바위 앞 까지만 갔다가

돌아 내려온 이후 이번이 두 번째인지 세 번째인것 같고, 매스컴을 통하여 보고 느낀점들이 자꾸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

자세한 안내판과 이정표들이 잘 정비되어 있는듯 특히 곳곳에 자리잡은 지도가 이정표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고, 다음엔

어느 코스를 선택하고 어디까지 돌아보고 와야겠구나 하는 구상을 하게 만드는것 같았다.

 

 

 

 

 

 

 

들머리는 삼릉이다. 신라 8대 아달라왕,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이 잠든 봉분 셋이 연달아 솟아 있다.

안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또 하나의 릉이 보인다. 신라 제 55대 경애왕릉(景哀王陵)이다.

삼릉을 찾게 하는 건 주변의 솔숲이다. 이리 휘고 저리 굽은 소나무들이 빼곡해 사진작가들이 즐겨 찾는다.

 

배리삼릉은 경주 남산의 서쪽 기슭에 동서로 3개의 왕릉이 나란히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밑으로부터 신라 8대 아달라왕,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 등 박씨 3왕의 무덤이라 전하고 있다. 무덤은 모두 원형으로 흙을 쌓아올린 형태를 하고 있다.

신덕왕릉이라 전해오는 가운데의 무덤은 1953년과 1963년에 도굴 당하여, 내부를 조사한 결과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

임을 확인하였다. 무덤에는 돌방 벽면에 병풍을 돌려 세워 놓은 것처럼 동·서 양벽의 일부에 색이 칠해져 있는데, 이것은 본격적인 벽화는 아니지만 벽화가 그려지지 않은 경주의 신라 무덤에서는 처음 발견되는 것으로 주목되는 자료이다.

색은 붉은색, 황색, 백색, 군청색, 감청색으로 되어있고, 12폭으로 되어있다.

배리삼릉의 주인공이 신라의 박씨 3왕이라 전하고 있지만 확실한 기록은 없고 신라 초기의 아달라왕과 신덕왕, 경명왕 사이에는

무려 700여년의 차이가 있어 이들의 무덤이 한곳에 모여있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또한 신라 초기에는 이와 같은 대형무덤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었다. (문화재청 자료에서)

※(배리삼릉 → 경주 배동 삼릉)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경애왕릉(景哀王陵)

 

경애왕릉(景哀王陵)
사적 제222호. 경애왕의 성은 박씨(朴氏), 이름은 위응(魏膺). 아버지는 신라 제53대 신덕왕이며, 어머니는 의성왕후(義成王后)이다. 제54대왕 경명왕의 아우이다. 경애왕은 924년 왕위에 올라 927년 포석정에서 연회를 하다 견훤(甄萱)의 습격을 받고

붙잡혀 자살한 왕이다.

 

능은 경주 서남산 삼릉계곡 입구의 소나무 숲 안에 있으며, 형태는 외형이 일반민묘와 같은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별다른 특징은 없다. 지름 13.8m, 높이 4.2m로 일반민묘보다는 규모가 크나, 신라왕릉으로는 빈약한 편이며 발굴된 적은 없다.

『삼국사기』에는 경애왕을 남산 해목령(蟹目嶺)에 장사지냈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지금의 경애왕릉에서 남산쪽으로 2㎞ 정도 거리에 해목령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해목령의 서북쪽으로 200∼300m 거리에 있는 지금의 일성왕릉(逸聖王陵, 사적 제173호)을 경애왕릉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남산을 둘러보는 방법은 다양하다. 이정표도 두 가지 종류로 세워져 있다. 노란색 글씨는 문화재 탐방 코스, 흰색은 단순 산행

코스라고 한다. 가장 일반적인 삼릉~용장골 코스를 이야기 하는데 정해진 코스가 따로 말 할 필요가 없을것 같은 생각을 한다.

 

 

 

 

 

 

 

 

 

 

 

솔 숲을 지나 가장 먼저 만나는 불상은 석조여래좌상이다. 남산 일대 상당수의 불상들이 그러하듯, 이 불상도 목과 얼굴 부분이 없다. 조선시대 숭유억불정책의 희생양이었을 것이다 란 추측이 설득력 있을것 같다. 인근 계곡에 쳐박혀 있던 것을 1964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왔다는데 보면 볼수록 바윗돌에 새긴 문양이 신비롭기까지 하다.

 

 

 

 

 

 

삼릉계곡마애관음보살상(三陵溪谷磨崖觀音菩薩像)

 

경주 남산의 삼릉계곡에 있는 이 불상은 돌기둥 같은 암벽에 돋을새김한 것으로 연꽃무늬 대좌(臺座)위에 서 있는

관음보살상이다.  머리에는 보관(寶冠)을 쓰고 있으며, 만면에 미소를 띤 얼굴은 부처의 자비스러움이 잘 표현되어 있다.

손에는 보병(寶甁)을 들고 있어 보관과 함께 이 불상이 현세에서 자비로써 중생을 구제한다는 관음보살임을 알 수 있다.

불상 뒷면에는 기둥 모양의 바위가 광배(光背) 역할을 하고 있는데, 자연미에 인공미를 가한 느낌이다.

이 불상은 정확한 연대와 조각자가 알려져 있지 않으나, 통일신라시대인 8∼9세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 불상의 동편에 위치하고 있는 머리 없는 불상은 남쪽으로 약 100m 떨어진 지점의 소나무 숲속에서 출토되어

이쪽으로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삼릉계곡선각육존불(三陵溪谷線刻六尊佛)

 

자연 암벽의 동서 양벽에 각각 마애삼존상을 선으로 조각한 6존상으로, 그 조각수법이 정교하고 우수하여 우리나라 선각마애불 중에서는 으뜸가는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오른쪽 삼존상의 본존은 석가여래좌상이며, 그 좌우의 협시보살상은 온화한 표정

으로 연꽃을 밟고 본존을 향하여 서 있다. 왼쪽 삼존상의 본존 역시 석가여래로서 입상이며, 양쪽의 협시보살상은 연꽃무늬 대좌 위에 무릎을 꿇고 본존을 향해 공양하는 자세이다. 

이 2구의 마애삼존상은 만들어진 시대나 조각자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대체로 통일신라시대로 추정되며, 오른쪽 암벽의 정상에는 당시 이들 불상을 보존하기 위해 법당을 세웠던 흔적이 남아 있다.

 

 

 

 

 

 

경주 삼릉계석불좌상(慶州三陵溪石佛坐像)

 

경주 남산 삼릉계 석조여래좌상(慶州 南山 三陵溪 石造如來坐像)은 경주시 남산 삼릉계곡의 왼쪽 능선 위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석조 여래 좌상이다. 보물 제666호로 화강암을 조각한 것이다.

머리는 골짜기에 떨어져 있었고, 불신은 앞으로 광배는 뒤로 쓰러져 있던 것을 1923년에 보수하였다.

이때 이미 코 이하의 얼굴 부분은 손상을 입었는데, 그 뒤에 시멘트로 엉성하게 보충하여 얼굴이 매우 부자연스러웠다.

최근에 시멘트 보수를 새롭게 하여 자연스럽게 되었다.

얼굴은 원만하며, 두 귀는 짧게 표현되었다. 우단편견(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은 옷)의 옷주름 선은 간결하고 아름답다.

허리는 가늘고 앉은 자세는 안정감이 있다. 대좌(臺座)는 상·중·하대로 구성되었는데, 상대에는 화려한 연꽃무늬를

조각하였으며, 8각 중대석 각 면에 간략하게 눈 모양의 안상(眼象)을 조각하였다. 하대는 단순한 8각대석이다.

 

수인(手印)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있어 석가불로 추정되며, 연화좌 위에 결가부좌한 자세는 당당하고 안정된 느낌을 주는 동시에 부처로서의 권위와 위엄을 느끼게 한다. 둥근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이 돌출선으로 구분된 주형(舟形)의 거신광배(擧身光背)는 안쪽에 연화문과 당초문을 새겼고 주위에는 화염문(火焰文)을 둘렀다.

대좌는 통일신라시대에 크게 유행한 팔각의 연화대좌로 상·중·하 3단으로 구성되었는데, 상대(上臺)에는 화려한 무늬의 연화가 조각되었으며, 중대(中臺)에는 간략하게 안상(眼象)이 조각되었다. 그러나 하대(下臺)에는 상·중대와는 달리 별다른 장식이 없는 단순한 팔각대석으로 되어 있다.

 

 

 

 

선각보살입상(線刻菩薩立像)

 

 

 

상선암을 거쳐 거대한 자연 바위벽에 새긴 앉아 있는 모습 삼릉계곡마애석가여래좌상 (三陵溪谷磨崖石迦如來坐像) 가는길은

막아놓았고 새로 다니는 길로 돌아올라가 보니 또 다른 풍경들이 펼쳐지고 ......

 

 

 

 

 

 

 

 

 

 

 

 


멀리서 내려다 볼 수밖에 없었던 삼릉계곡마애석가여래좌상 (三陵溪谷磨崖石迦如來坐像)

 

 

 

 

 

 

상사암(相思巖) 석불입상

 

동경은 신라의 수도 경주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며, 동경잡기(東京雜記)에 상사바위에 관한 기록이 있다고 한다.

[상사바위는 금오산에 있다. 그 크기가 백여 발이나 되며 그 생긴 모양은 가팔라서 오르기가 어렵다. 상사병에 걸린 사람들은 이 바위를 위하고 빌면 병이 낫는다. 산아당(産兒堂)은 금오산에 있는데 아기를 출산하는 모습을 돌에 새겨 놓았다. 신라 때 아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빌던 곳이라 전하는데 가위와 칼자국이 남아있다.] 이것이 동경잡기 서술되어 있는 상사암(相思巖)이라고......

 

상사바위는 어느 할아버지와 피리라는 소녀와의 애틋한 사연이 담겨져 있어서 상사바위라고 전한다. 홀로 살던 할아버지를

모시고 살던 피리라는 소녀는 어느 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피리를 다시 볼 수 없게 되자 노인은 이게 사랑이구나

하고 느끼면서 목숨을 끊고 말았다. 그 후 피리는 밤마다 괴몽(怪夢)에 시달리는데 뱀이 목을 휘감고 혀를 내밀어 자신을 괴롭히는 꿈을 꾸게 되자 마을 사람들이 할아버지의 혼이 뱀이 되어 나타나 사랑을 청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뱀은 목숨을 끊어도 피리를 괴롭히는 거라고 느낀 뱀은 그 후 국사골로 들어가서 바위가 되어 자신을 바라보는 바위가 되고 이에 피리도 목숨을 끊어 할아버지 옆에서 있는 바위가 되었으므로 상사바위 또는 상사암이라고 부르고 있다.

 

 

 

 

 

 

 

 

처음 올라가 본 금오산 정상 이었다.

한참을 머물다가 지도를 들여다 보고 안내판을 들여다 보아도 가보고 싶던 용장골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느낌이었다.

훗날 따로 용장골을 올라보고 삼층석탑도 돌아봐야지 하면서 거리 표시없는 화살표 방향따라 내려오게된 곳이 약수계곡이었다.

 

                                                                                                                                       촬영일: 2013년 3월 3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