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성(富山城)
종 목: 사적 제25호
명 칭: 경주 부산성 (慶州 富山城)
분 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
수량/면적: 762,874㎡
지정(등록)일: 1963.01.21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건천읍 송선리 산195
시 대: 통일신라
소유자(소유단체): 국유
관리자(관리단체): 경주시
신라 문무왕 3년(663)에 쌓은 신라 산성으로 주사산성(朱砂山城)이라고도 한다.
주사산·오봉산·오로봉산·닭벼슬산이라고도 불리는 부산의 정상을 중심으로
세 줄기의 골짜기를 따라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이용하여 쌓은 석축성이다.
산성이 있는 곳은 대구에서 경주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로, 선덕여왕 때
백제군이 이 산을 넘어 옥문곡(일명 여근곡)까지 침입한 일이 있었다.
그 이후에 경주의 서쪽에서 침입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외곽산성으로
조선시대 전기까지 왜구의 침입에 대비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성밖은 4면이 경사가 심하고 험준하여 방어에 적합하다. 성안에는 넓고 평탄한
지형이 많으며 물이 풍부하여 신라의 중요한 군사기지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효소왕 때 화랑 득오(得烏)가 죽지랑(竹旨郞)과의 우정을 그리워하며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를
지은 곳으로도 유명한 곳으로, 현재는 남문터와 군의 창고터, 군사훈련을 시켰던 연병장터·우물터
못터, 그리고 비밀통로인 암문터 등이 남아 있다.
(문화재청 - 문화유산정보 - 문화재검색 - 우리지역문화재)
지난해 여름 우연히 오봉산을 알게 되면서 주사암을 둘러보고 지맥석위에도 발을디뎌 보았다.
처음 다녀온 이후 오봉산에 얽힌 설화를 읽고 찾지못해 빠뜨려 버렸던 부산성(富山城) 석성(石城)의 모습이 궁금하여 다시
찾았고 지맥석(持麥石) 위에서 건너다 보이던 고랭지 채소밭 그 어딘가엔 남문터와 군의 창고터, 군사훈련을 시켰던 연병장터·
우물터.못터, 그리고 비밀통로인 암문터 등이 남아 있다고 했으니까 한번 쯤 더 가보고 싶었던 호기심이 생겼던 것이다.
고랭지 채소밭에서 건너다 본 지맥석(마당바위)
2012년 11월 24일 유학사를 지나 여근곡 탐방로를 올라 주사암과 지맥석을 찾아보았다.
2012년 12월 31일 지도 한장을 펼쳐놓고 도계리 방향에서 꼬불꼬불 나타나 있는 산길을 따라 자동차로 올라 보려다
첫번째 오르막 길에서 쌓여있던 눈과 빙판길로 포기하고 되돌아 오면서 용명리사지 삼층석탑과 지나는 길옆 금척리 고분 탐방
2013년 3월 1일 눈쌓였던 빙판길 그길따라 간다고 간곳이 모길저수지 옆길 따라 오르고 보니 임도가 너무 꼬불꼬불하고
급 경사여서 중간지점에 안전한곳에 주차하고 걸어서 오르고 보니 지도를 펼쳐두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랐다.
처음 갔을때 마주쳤던 그 임도였던 것이었고 기왕 올라간 김에 다시 주사암과 지맥석 바위들을 돌아보았다.
그날 다시가서 보니 길 옆 소나무 한그루 서 있던곳이 주차장이고 입구엔 부산성 안내판이 있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처음 갔을때 보질 못했던 것은 임도가 나타난 지점에서 부산성이 어딘가 하는 생각으로 곧바로 산등성이로 올라가 주사암 입구로 내려갔기 때문이었다.
2013년 3월 9일 송선리 방향에서 세번째 자동차로 올라가게 되었던 날의 풍경은 또 다른 세상을 경험하는것 같았다.
이런 모습은 상상도 하질 못했는데 주사암 전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2013년 3월1일 되돌아 올 때 다음에 한번 더 와야지 하면서 길을 찾아 두려고 네비게이션에 송선리 라고 찾아 달랬더니
여근곡 주차장에서 약 7km거리 지나다 보니 건천IC 입구 지나 청도방향 약 2~300여 미터 우측 길 옆엔 지도에 나타나 있던
성암사, 북두암, 만교사로 들어가는 입구 세워진 돌에 절이름이 쓰여져 있었다.
두번째 갔던날엔 만교사 까지만 두러보고 들어가는 길 둑 위에 안내판과 표지석 하나가 있고
만교사 입구에도 표지석이 두개나 세워져 있었는데 부산성 이라 쓰여져 있었다.
도로 입구에서 만교사까지의 거리 약 2km, 이날은 곧 바로 임도로 올랐다.
올라갈 땐 보질 못했던 이정표 하나 화려하거나 멋진 안내판은 아니더라도 처음 찾는이에겐 유용한 표지판이기도 했다.
오르막길 부산성 방향
내리막길 송선리 방향
우측 계곡길 부산성 방향
표지판에 거리는 표시되어 있질 않다. 시간은 등산객 기준인것 같으며, 처음 입구에서 임도 끝까지의 거리를
7km로 알고 올라 갔으나 실제 자동차 계기판에서 나타내던 거리는 6.8km정도였다.
이정표에서 조금 올라간 지점 바위 위로 내려서서 올라온 길을 내려다 보니 전망이 좋았다.
혼자라도 심심하진 않았다. 난 수도하는 마음으로 들어 갔으니까 다른점이 있다면 자동차로 올라간다는것이었을뿐 ......
어느정도 올라 갔을까?
주사암 쪽에서 내려다 보았을땐 평평한 임도같아 보였는데 산은 산이었다.
울퉁불퉁 고르지 못한 산길을 오르다 내려다 보이던 흉물스런 콘크리이트 건물 잔해가 보여서 궁금했다.
말라죽은 나뭇가지에 걸려있는건 무엇일까 좀 더 가까이 다가서고 보니 교적비 였다. 그렇다면 이곳에도
학교가 있었다는것이 아닌가?
멀리서 내려다 보일때에는 공기좋은 산 속에 저 무슨 흉물스런 모습일까? 철거 하지 못하는 이유라도 있는것일까?
무슨 구조물일까? 궁금 하기도 했지만 뜻밖의 이 교적비를 보는 순간 개교년도를 보니 내 어릴적 모습의 고향의 모습이
아련히 떠 오르는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이곳을 다녔던 코흘리개 어린시절 학생들 오봉산 올랐다가 이런 모습 바라볼땐
어떤 생각들을 할까?
봄 날이란 꽃샘추위에서 부터 어느날엔 하늘새파란 화사한 봄 볕 내리쬐다가 어느 날엔 시커먼 구름으로 덮여버린 하늘아래
새초롬한 추위마져 느끼게도 하지만 천년세월 흐른 지금이나 천여년 세월 거슬러 올라간 그 때 그시절에도 오늘 이런 모습으로 봄은 오고 있었겠지 꼬불 꼬불 봄빛으로 물들어 가는 버드나무에도 하늘빛은 제대로 표현이 되질 않는다.
두번째 주사암에 올랐던날 꼬불 꼬불 임도 올라가던 그 길 어디쯤에 만교사로 내려가거나 지나가는 길이 있을것 같은
상상만으로 올랐으나 어디가 어디인지 얼른 분간하기 어려워서 지나가던 등산객 한분에게 물어 보았다.
그 분의 말씀이 바로 이날 올랐던 임도 저쪽 계곡 아래에 만교사란 절이 있는데 주사암 쪽에선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 때 평지길로 보이는듯 내려다 보이던 자연속에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던 건물이 바로 이 사진속의 건물 흰색 지붕위엔
폐타이어로 바람을 견더낼 방패물로 삼았고 오르고 내릴때 마당에는 여러마리의 개들이 쫓아 나왔던 그곳
아래쪽엔 사람이 살고 있는집인듯 산꼭대기에서 만났던 그분들이 여기에서 농사를 짓고 살림하는 집이란다.
밭 사잇길에 보이는 하얀간판 밤나무 한그루가 서있고 부산성의 안내판이었다.
시커먼 색깔의 토질이 보기에도 작물이 잘 자랄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저 멀리 갈대밭 사잇길에 세워둔 자동차 한대가 너무 작게만 느껴지는 사래긴 이밭은 누가 다 갈고
채소를 심고 거두어 들이며 운반과장 또한 만만치가 않을것 같은 생각을 하면서도 ......
제32대 효소왕 대에 죽만랑의 무리에 득오 급간이 있었고, 풍류황권[風流黃卷]에 이름을 올리고서 날마다 출근을 했는데,
열흘 동안[隔旬日] 보이지 않았다고한다. 죽만랑이 그 어미를 불러 물었다. “당신 아들이 어디에 있소?”
“당전 모량부 익선 아간이 내 아들을 부산성 창직으로 임명하였습니다.
죽만랑이 설병 한 홉과 술 한 항아리를 가지고, 노복을 거느리고 득오실을 찾아갔다.
낭도 137명도 예의를 갖추고 따라 갔다.
부산성에 이르러 문지기에게 “득오실이 어디에 있소?”라고 물었다. 그 사람이 대답했다.
“지금 익선의 밭에서 예에 따라 부역을 하고 있습니다.” 라는 대목이 있었는데 그렇다면 그 시절 득오 급간이 일을하던
채소밭도 여기 어디쯤 이였을까?
처음 오봉산 주사암에 들렀을때 멀지도 않게 건너다 보이던 산성 정상부에 넓게 펼쳐지는 이름하여 고랭지 채소밭이 여기였다.
농한기 한 철 세워져 쉬고 있는듯 트랙터 한대만이 덩그렇게 밭 가장자리에 세워져 있었고 바람은 세차게 불고 있었다.
멀리 건너다 보이는 채석장도 보이고 ...... 여기까지 올라 온건 채소없는 이 채소밭을 구경하러 온건 아니었다.
송선리 성암사 개울앞을 건너 오르는 임도를 따라 정상부까지 약 7km
지도에 나타나 있는 산성까지 올라 주차를 하고 빨간 점선으로 나타나 있는 등산로를 약간 벗어나
부산성 돌너덜을 걸어봤다. 한결같이 비슷한 구조로 이어져 있는 부산성 주사암 앞에서 보던 모습과 특이하게
다른점은 없었는데 거리를 대충 가늠해 보면서 지도에 표시되어 있는 남문지점 근처일것으로 추측만 할 뿐
겉으로 보아도 그냥 생겨져 나딩굴고 있는것 같지않은 돌 몇개가 눈길을 끌기도 했다.
어쩌면 구조물의 주춧돌로 쓰여졌던것은 아닐런지 ......
성 안에는 남문지, 군량미를 비축하였던 군창지, 군사훈련을 시켰던 연병장지·주사암지 등의 건물터와 못·암문지·우물터 등이 남아 있다. 검색 결과 만으로는 정확한 위치를 아는이는 없는듯 첫번째 마주친 흙 속에 묻힌 돌의 둥근 모습이 그냥 지나쳐 보기엔 전문가들의 감정이 필요 할 듯......
인위적으로 한곳에 모아져 버려진듯 이끼긴 흔적이 없는것으로 보아 밭을 갈면서 들어난 돌을 겉어낸 모습들은
아닐런지 아래 두개의 돌 모양에서 추측도 가능한 것이다.
위의 한개의 돌에서는 인위적으로 무늬를 만들어 홈을 긁어 내거나 파낸 모습 같기도 하고
아래 한개의 돌은 그 곳에서 볼 때에는 그져 깨어진 돌 같이 보이기도 했는데 지금 사진으로 펼쳐보니
건물의 기둥 이라도 세웠던 주춧돌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
내려올 때 길 둑아래로 보이던 연못이랄까? 인위적으로 만들어 빗물을 가두어 농사철에 쓰이기도 할 테지만
지형으로 볼 때 산 꼭대기에 저렇게 물을 가두어 둘만한 장소가 있다는건 예나 지금이나 지리적 조건은
같았을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아무곳에나 웅덩이를 파고 빗물을 가두어 둔다고 사시사철 물이 고여 있지는 않을것이다.
지형적인 유리한 조건에서만이 가능한 상황이 아닐런지?
무너져 내리긴 햬지만 앞서 본 모습과는 조금더 폭이 넓어 보이는듯 이곳은 아래로 계곡을 이루고 있을듯한
지역으로 비교적 평탄한 지형으로 다른 지역의 자연적인 바위절벽과는 달라 보였다. 그래서 견고하게 쌓기위하여
폭을 넓게 잡은 흔적은 아닐런지 ......
주암사의 전체적인 모습은 이곳에서 지맥석의 사실적인 모습은 맞은편 소나무 아래서 보는 풍경이
더 좋을듯해 보인 하루 세 차례의 오봉산 등산 보다는 탐방의 성격을 띤 궁금증 따라 걸어본 산행
기회가 주어지면 다시 찾고 싶은 아름다운 산이기도 했다.
촬영일: 2013년 3월 9일 토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