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성(富山城)
경상북도 경주시 건천읍 송선리에 있는 신라시대 석축산성.
건천에서 서쪽 약 4km의 거리에 있는 오봉산(五峯山)에 위치한 신라 시대의 석축 산성으로 일명 주사산성(朱砂山城)이라고도 한다.
경주의 서쪽에 해당되는 교통의 요로를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으며, 주사산(朱砂山)·오봉산(五峯山)·오로봉산(吳老峯山)
닭벼슬산이라고도 불리는 높이 729.5m의 부산((富山) : 부산(夫山))의 정상부를 중심으로 한 세 줄기의 골짜기를 감싸 마련된
포곡식 산성(包谷式山城)으로서, 할석(割石)을 이용하여 쌓은 석축성이다. 면적은 762,874㎡이다.
성 밖의 지형은 사면이 모두 경사가 심하고 험준하여 방어를 위한 천험(天險)의 요새지(要塞地)이며, 성내는 평탄한 지형이 많고
물이 풍부하여 거주에 적합하다. 성문은 4개가 터를 남기고 있으며, 남문터가 비교적 잘 남아 있다.건물터가 6개소, 우물터가 4개소, 못이 2개, 암문터가 1개에 치성도 2개가 있다.
산성이 위치하는 곳은 경주에서 대구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로서,신라 선덕여왕 때에 백제 군사가 이 산을 넘어 옥문곡((玉門谷) 일명 여근곡(女根谷))까지 침입한 일이 있은 뒤, 허술한 신라 도성(都城)의 방위를 강화하기 위하여 663년(문무왕(文武王) 3)에 경주 남산의 장창(長倉)을 축조하면서 동시에 쌓은 것이라 여겨지는데, 축성이 3년만에 이루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석축은 가공하지 않은 안산암(安山巖) 석재를 사용하여 안팎을 쌓아올리면서 내부에는 잡석으로 채우는 협축법(夾築法)으로쌓았다.
지금은 대부분 무너진 성벽 돌이 산허리에 널려 있으며, 성내에는 남문지(南門址), 군량미를 비축하였던 군창지(軍倉址), 군사훈련을 시켰던 연병장지(練兵場址)·주사암지(朱砂庵址) 등의 건물터와 못·암문지(暗門址)·우물터 등이 남아 있다.
주사암은 신라 의상(義湘)의 창건이라고 전하는데, 이 절터 바로 북쪽에 지맥석(持麥石)이라고 불리는 큰 반석이 있다.
이 반석은 1백여 명이 앉을 수 있는 크기이며, 신라의 명장 김유신(金庾信)이 술을 빚기 위하여 보리를 두고 술을 공급하여 군사들을 대접하던 곳이라 하여 지맥석이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또 부산성은 효소왕(孝昭王) 때의 향가인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와 관련된 곳으로 전하고 있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誌)에서는 이 성을 부산성(夫山城)이라 하고 둘레가 2,765보 3척이라하고 군창이 있었다고 하므로 조선 시대 초기에도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경영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자료 : 전국 문화재 총람(문화재청)
부산성에 얽힌설화 더자구야! 더자구야
선덕여왕(善德女王) 이후 太宗武烈王이 즉위하던 해에 백제군이 내침하여 또 한차례 富山城을 공격하였다.
신라군이 엄중히 城을 지키므로 공격을 할 수 없게 되자 백제군은 첩자를 성안으로 내보내 염탐한 후 공격키로 하였다.
저녁무렵에 70세 노파가 자기 아들이 성안에 근무하고 있으니 면회를 초병에게 요청했다.
그 노파는 "더 자구야, 더 자구야"하고 외치면서 슬피 울었다. 성안에 들어간 노파는 역시 같은 소리로 외치면서 성안을 돌아다녔다.
성안 신라군은 피곤하여 모두 졸고 있었으므로 이 노파는 "다 자구야(모두 잠들었다는 의미)"를 외치자
성밖에 대기하고 있던 백제군은 이를 신호로 삼아 성안에 잠입하여 신라군을 모두 참살하였다.
신라군은 첩자인 노파의 꾐에 속은 줄 알았지만 이미 때가 늦어 모두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하였다.
신라조정은 이러한 패전이 있고 난 후 증원군을 파견하여 성을 더욱 튼튼히 쌓고 백제군의 내습에 대비하였다.
촬영일: 2013년 3월 1일
'그룹명 > 풍경사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산성(富山城)이 궁금했다. (0) | 2013.03.11 |
---|---|
오봉산 용화만교사 (0) | 2013.03.03 |
다시찾은 오봉산 (0) | 2013.03.03 |
구룡포 삼정리 주상절리 (0) | 2013.02.17 |
망해산 고석사 (望海山 古石寺) (0) | 2013.02.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