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풍경사진

장기에가면 ......

도랑도랑 2013. 1. 23. 19:45

 

 

척화비(斥和碑)

조선 고종 대원군() 양인() 배척하기 위하여 서울 지방 각지 세운 .

 

척화비에는 주문(主文)으로 다음 문구가 적혀 있다.

洋夷侵犯非戰則 和主和賣國 (양이침범비전즉 화주화매국)

그 다음 작은 글자로 비의 옆면에 다음 문구가 적혀 있다.

戒吾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 (계오만년자손 병인작 신미립)이라 적혀있다.

이 뜻은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를 하는 것이니, 화해를 주장하면 나라를 파는 것이 된다.

우리의 만대자손에게 경고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다.”이다.

 

장기척화비(長기斥和碑)

척화비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승리로 이끈 흥선대원군이 서양 사람들을 배척하고 그들의 침략을 더욱 강력히 국민에게

경고하기 위해 서울 및 전국의 중요 도로변에 세우도록 한 비로, 이 비도 그 중의 하나이다. 비는 반듯한 사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운 모습이며, 비몸의 네 모서리와 윗변의 양끝을 단정히 다듬어 놓았다. 앞면에는 비문을 새겨 두었는데 내용에는

“서양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할 수 밖에 없고 화해를 주장하면 나라를 파는 것이 된다”는 강한 어투의

경고를 적고 있다. 고종 8년(1871) 신미양요 이후 같은 해에 일제히 세운 것으로, 고종 19년(1882)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대원군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납치되면서 대부분의 척화비들은 철거되고, 이처럼 몇 기의 비들만이 곳곳에 남아 옛 역사의

한 부분을 고스란히 전해주고 있다. 원래는 장기읍성 안에 있었으나, 1990년에 장기읍사무소 정원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장기면사무소 앞길의 이정표와 장기면사무소 앞 우측엔 장기현 관아 동헌 건물이었다는 근민당이다. 장기 읍성에서 1922년

이전하여 장기면사무소로 이용하다가 1986년 현재의 위치에  다시 복원하였으며 지금은 장기면사무소 별관으로 이용하고 있다.

 

 

 

 

 

 

 

근민당으로 들어서는 입구에는 최근에 세워진듯 장기읍성 둘레길의 상세한 안내지도 그림판도 세워져 있었다.

 

 

 

 

 

이정표만 보아도 다산 정약용 우암 송시열이란 역사속의 인물이 등장하는걸로만 봐도 천천히 역사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며

여유로움을 즐겨 볼만한 아늑한 둘레길의 안내판이 눈길을 끈다.

 

 

 

포항~구룡포 간 31번 국도에서 찬내다리(냉천교)를 건너 청림동에서 906번 지방도로(오천~양포)를 따라 가면 장기면에 이른다.

또한 냉천교 직전 이마트 앞 길에서 우회전하여 들어가도 되는데 장기면사무소 앞 길 인도 울타리 앞에는 이지역 각처에 흩어져

있던 비석을 한데 모아둔것인지 일렬로 세워져 있는것도 볼 수가 있는데 대다수가 고을현감이나 관찰사의 공적비인듯 했다.

 

 

 

 

 

 

 

 

 

일부분이 파손되어 없어진 비석 한개의 뒤면을 보니 도광7년 정해시월 일립이라 쓰여져 있다.

그러니까 도광7년이란 군주 국가에서, 임금이 즉위하는 해에 붙이던 연대적인 칭호인 연호(年號) 인것 같다.

연호(年號)는 한문을 사용하는 동양의 군주국가에서 쓰던 기년법을 말하며, 기년(紀年)이란 일정한 기원으로부터

계산한 햇수를 뜻한다. 도광(道光)은 청나라 선종 도광제의 연호로 1821년부터 1850년까지 30년간 쓰였고,

도광7년 정해년을 서력기원으로 보면 1827년이며, 청(淸) 선종 도광제(宣宗 道光帝) 7년이란 조선(朝鮮) 순조(純祖) 27년

정해년 시월에 세웠다는 뜻이되는것이다.

 

 

 

 

 

 

연호(年號)
원호(元號),다년호(大年號)라고도 하며 중국에서는 본래 건국기년(建國紀年)으로 일관하여 그 왕조의 연도를 기록하지 않고
군주의 재위에 따라서 해를 세었는데, 처음에는 특별한 명칭의 연호는 없었다. 따라서 군주를 상속하면 새 군주가 즉위한
이듬해를 그 원년(元年)으로 하여 기록하였다. 그러나 한(漢) 무제(武帝) 때인 기원전 114년 무렵에 동중서(董仲舒)의 건의로
연호 제도가 정비되어 한 무제의 즉위년을 기준으로 6년을 단위로 나누어 연호를 사용하였다.
이로써 건원(建元)을 최초의 연호로 하여, 연호에 의한 기년법이 확립되었다. 따라서 건원이 최초의 연호가 된다.
또 그때까지 지방의 제후들도 각자의 재위에 따라 연도를 기록했는데 이로부터 중국은 통일된 연호를 사용하게 되어
기년(紀年)도 통일되었으며, 중국에 신속(臣屬)한 외국들도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독자적 연호를 사용한 것은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391년부터 사용한 ‘영락(永樂)’이 문헌상 최초이다.
신라에서는 536년(법흥왕 23)에 건원(建元)을 최초의 연호로 사용하였는데, 이는 독자적인 것이 아니라 한나라 무제가

사용한 것이었다. 그 후 진흥왕 ·진평왕 ·선덕여왕 ·진덕여왕 때까지는 신라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으나

649년(진덕여왕 3) 당나라 태종이 신라에서 연호를 따로 사용함은 부당하다고 하여, 650년부터는 당나라의 연호

영휘(永徽)를 사용하였다. 발해는 대조영(大祚榮)이 건국한 699년에 진(震)이라는 국호와 함께 천통(天統)이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고, 국호를 발해(渤海)로 고친 뒤 2대 무왕(武王) 이후에는 대대로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태봉국(泰封國)을 세운 궁예(弓裔)는 처음부터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여 궁예 스스로 4차례 개원하였다.

고려를 세운 왕건(王建)은 등극하여 천수(天授)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고, 4대 광종(光宗)은 광덕(光德)

준풍(峻豊)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으나, 이후 말기까지는 중국의 연호를 썼다.

조선왕조는 처음부터 명(明)나라의 제후국을 자인하였기 때문에 독자적인 연호를 쓰지 않다가 청나라가

청,일전쟁에 패배하여 종주국 행세를 못하게 되자 음력으로 1895년 11월 17일을 양력으로 고쳐 개국 505년 1월 1일로

쓰면서 독자적으로 건양(建陽)을 연호로 사용하였다. 이듬해 8월에는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면서 동한(東漢:後漢)을

중흥시킨 광무제(光武帝)에 연유하여 연호를 광무라 하였는데, 1910년(융희 4) 국권피탈과 함께 연호도 사라졌다.

 

                                                                                                                                     촬영일: 2013년 1월 13일

'그룹명 > 풍경사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파도소리길 부채꼴 주상절리  (0) 2013.02.02
우암송시열과 은행나무  (0) 2013.01.23
자장암에 올라보니...  (0) 2013.01.20
장기읍성 (長鬐邑城)  (0) 2013.01.17
겨울풍경 산골 이야기  (0) 2013.0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