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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금척리 고분군 (慶州 金尺里 古墳群)

도랑도랑 2013. 1. 2. 21:37

 

 

경주에서 서악리를 지나 대구로 나가는 경주 서측 출구의 국도변 좌우에 분포해 있는 대형분들이 금척리 고분군으로

행정구역상으로는 경상북도 경주시 건천읍 금척리 111-2번지 일대에 위치한다.

이 고분군은 경주 중심부의 황남동, 노동동, 노서동, 황오동, 인왕동, 교동 일대에 넓게 분포하는 고분군을 제외하면

경주 주변 외곽에서는 고신라시대의 대형봉토분들이 가장 많이 밀집해 있는 고분군이다.

일제침략기의 조사에서는 모두 52기의 봉토분이 확인되었으나 현재는 32기 정도만 확인되고 있다.

고분들이 분포한 곳은 북서의 아화에서 경주 분지의 서쪽 입구에까지 연결되는 건천(乾川)에 의해 형성된 서북에서 동남으로

이어지는 작은 분지 형태의 평야 가운데 약간 남동으로 치우친 지점에 해당된다.

 

 

 

남아 있는 봉토분들은 대부분 원형의 단독분으로 보이나 몇 기의 표형분(瓢形墳)도 확인된다. 또 많은 고분의 봉토 윗부분에서

함몰된 형상을 찾을 수 있어 대부분이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봉토는 직경 25m 이상의 크기를 가진 것들도 있어 신라의 지방 고총들과 유사한 크기를 가졌다고 할 수 있다.

봉토분들 가운데 1952년에 3기(30호분∼32호분)의 고분이 발굴된 바 있고, 1981년에는 국립경주박물관에 의해

상수도 부설공사 중 확인된 고분군 보호구역의 남쪽 한계선 외측의 8기가 조사되었다.

속전에 의하면 “이 고분들 가운데 하나에는 박혁거세(朴赫居世)의 금자(金尺)가 묻혀 있어 이곳이 금척리라고 명명되었다” 하는

것으로 보아 고신라시대 초기부터 이곳에 고분군이 조영되기 시작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조사된 고분들은 돌무지덧널무덤이 주류를 이루며 그밖에 덧널무덤(木槨墓), 독널무덤(甕棺墓), 돌덧널무덤(石槨墓) 등도 혼재하였다.

그러나 봉토가 남아 있는 대형분은 모두 돌무지덧널무덤이었다. 출토된 유물로는 금제귀고리(金製耳飾), 곡옥장식목걸이(曲玉附頸飾),

은제허리띠(銀製銙帶) 등이 있는데, 이러한 조합상은 신라 지방 고총들에서 출토되는 양상과 유사하다. 출토된 유물들로 보아

고분군이 조성된 중심 연대는 5세기∼6세기중반으로 추정된다.

 

 

 

고분군의 남측에는 모량(牟梁)이라는 옛 지명이 남아 있어, 금척리 고분군을 신라의 6부 가운데 하나인 모량부 귀족들의 무덤들로

보는 견해도 있다. 모량부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24대 진흥왕의 왕비인 지소부인(知召夫人) 또는 식도부인

박씨(息道夫人 朴氏)의 출신지로 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신라의 중앙정계에서 커다란 역할을 하던 집단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과 고분의 크기, 묘제, 입지 등이 합치된다는 것이다. 비록 규모에 있어서는 경주 평지의 최대형 분들보다

작으나 대형인 점, 고분들이 위치한 곳이 평지이고 발굴조사된 고분들의 경우 경주 중심부의 평지에 조성된 것과 같은

돌무지덧널무덤인 점, 그리고 출토유물의 양식에 있어서도 별 차등성이 인정되지 않는 점 등이 그것이다.

또 근래에 조사된 부근의 사라리 유적(舍羅里 遺蹟)에서 기원 후 1세기 무렵의 대형 널무덤이 조사되었고, 여기에서는 많은

철기와 청동제품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이 지역이 신라 성장에 일익을 담당했던 집단의 소재지였음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고분군 일대 129,643㎡가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43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2012년 12월 3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