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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무열왕릉(太宗武烈王陵)

도랑도랑 2013. 1. 3. 06:39

 

 

 

 

 

 

 

무열왕릉(武烈王陵)은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신라 29대 태종무열왕의 능이다.

선도산 동쪽 구릉에 있는 5기의 큰 무덤 가운데 가장 아래쪽에 있으며, 사적 제20호로 지정되어 있다.

경내의 비각에는 국보 제25호로 지정된 태종무열왕릉비의 귀부와 이수만이 남아있는데,

이수에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 새겨져 있어 신라 왕릉 가운데 매장된 왕이 명확한 유일한 능이다.

발굴조사는 하지 않았으나, 형태는 굴식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으로 추정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다른 무덤에 비해 봉분장식이 소박한 편이다.

 

 

 

 

 

 

 

 

 

신라태종무열왕릉비(新羅太宗武烈王陵碑)

높이 2.1m. 국보 제25호.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릉의 비로서 현재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만 남아 있을 뿐 비신은 소실되었다.
 ≪대동금석서 大東金石書≫에 의하면 이 비는 무열왕이 승하한 661년에 건립되었으며, 비문(碑文)은 김인문(金仁問)이 썼다고 하나
정확한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비의 아래에는 귀부를 놓고 위에는 이수를 얹은 형식은 중국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이 비의 조각수법은

독창적이다. 귀부의 머리는 거북모양으로 목은 높이 쳐들고 발을 기운차게 뻗고 있어 전체는 앞으로 전진하고 있다.
과감한 기상을 보여주면서도 표정은 과격하지 않고 오히려 명랑하다.
비좌(碑座)는 연꽃으로 이루어져 있고 귀갑은 4중의 육각형 귀갑문이 조각적인 수법으로 새겨져 있다.

이수는 좌우 3마리씩 놓여 있는 용이 서로 상대방의 앞발을 꼬리로 꼬아 전체는 좌우대칭형을 이루고 있는데,
다리의 표현, 용의 비늘 하나 하나가 생동감 있게 조각되어 있다.
귀부와 이수를 구성하고 있는 각 부분은 각자 생기가 있으면서도 전체와 조화되어 있으며 완전한 짜임새를 보여준다.

귀부의 머리나 귀갑의 외형, 이수 등 그들의 윤곽은 완만한 곡선으로 단순화된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탄력성 있는 양감(量感)을 지니고 있어서 당시의 불상에서 볼 수 있는 충만한 조각성과 공통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통일신라 초기의 조각들이 보여주는 이상화된 사실주의 양식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신라 말기가 되면 귀부·비신·이수 셋으로 이루어지는 전체 형식은 변하지 않으나, 귀부와 이수, 각각의 조각양식은 격동적이고 율동적인

모습으로 변천한다. 말기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월광사원랑선사탑비(月光寺圓郎禪師塔碑, 보물 제360호)를 들 수 있다고 한다.

 

 

 

 

 

태종무열왕릉 앞 입구 주차장 안내판

위성사진으로 그려놓은 지도는 경주의 문화유적지를 한눈에 찾아 볼 수 있기도 했고 만화로 그려놓은 안내도 역시 재미있고 독특한

발상이었다. 여기에는 무열왕의 일대기를 그려놓은듯도 하다.

태종무열왕 김춘추는 진덕여왕이 죽은 후 김유신을 비롯한 군신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으며, 진골출신으로는 최초의 왕이되었다.

김유신에게는 '보희'와 '문희'라는 아름다운 여동생들이 있었다.

어느날 언니 보희가 서악에 올라가 오줌을 누는 꿈을 꾸었는데 얼마나 많이 누었던지 서라벌 시내가 몽땅 오줌에 잠겨 버렸다.

이야기를 들은 동생 문희는 비단치마를 주고 언니 보희에게 그 꿈을 사게되었는데 며칠 후 김유신은 집앞에서 김춘추와 공을 차며 놀다가

김춘추의 옷을 밟게되고 김춘추의 옷은 찢어져 버렸다. 김유신은 김춘추를 데리고 자기집으로 가서 여동생 보희에게 옷을 꿰매주도록

했으나 언니 보희는 어떻게 모르는 남자의 옷을 함부로 꿰맨단 말이냐고 거절을 한듯 김유신은 다시 여동생 문희에게 부탁을 했고

동생 문희는 기꺼이 응해주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김춘추와 문희는 자주 만나는 사이가 되었고, 어느날 선덕여왕이 남산으로 가는 길에

김유신의 집에서 연기가 나고 있는것을 보고, 저곳은 김유신의 집인데 왠 연기냐고 물었고 신하가 말하기를 김유신의 누이동생이 결혼도

하지않고 아이를 가져서 불미스러운 일이라 불에 태워 죽이려 한다고 했다. 선덕여왕의 명에 의해 김유신은 문희의 화형을 멈추게 되었고

김춘추와 문희는 결혼을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수학여행을 하게되는 학생들이나 일반인들에게도 다시 한 번더

신라의 역사 공부에 흥미와 도움을 주고 있는듯 하다.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신라의 골품제도를 설명해 두기도 했다.

 

신라의 골품제도

신라의 독특한 신분제도로 혈통이 높고 낮음에 따라 관직, 결혼, 집의크기, 옷색깔등의 여러가지 사회생활에 규제를 정해놓은 제도이다.

골품제는 골제와 두품제로 이루어 졌는데 골제에는 성골과 진골이 있었으며, 성골은 진덕여왕을 끝으로 소멸되었고 태종무열왕 부터는

진골이 왕이 되었다.

두품제에는 6두품, 5두품, 4두품이 있었으며 숫자가 클수록 신분이 높았다.

본래 1 ~ 3두품도 있었으나 삼국통일 이후에 없어졌다.

골품제도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신분에 따라 관등이나 관직의 승진에 제한을 둔 것이다.

진골만이 가장 높은 벼슬을 할 수 있었고 평민은 아무리 노력해도 관리가 될 수 없었다.

 

 

 

 

 

경주에서 서악리를 지나 대구로 나가는 경주 서측 출구의 국도변 태종무열왕릉이란 이정표도 있고 도로 바로옆에는 넓은 주차장도

있지만 평소엔 관심도없이 늘 지나쳐 다니기만 하다가 이 날 하늘도 깨끗하고 시간도 넉넉하여 한 번 들어가 보았다.

아주 오래전 버스타고 다니던 시절에 동료들과 한 번 다녀왔던 기억도 어렴풋 나지만 너무 오랜 시간이 흘러 기억조차 희미해진 때였다.

무열왕릉과 무열왕릉비를 돌아본 후 저 뒤쪽으로 보이는 봉분은 무엇일까 하면서 올라가 보니 이 역시 고분군이었다.

 

서악리고분군(西岳里古墳群)
신라에서 마립간기(麻立干期)가 끝나고 왕호를 왕으로 지칭하는 법흥왕(法興王, 재위 514~539년)대가 되면 왕릉은 경주의 평지에서

벗어나 경주분지의 좌우에 펼쳐진 산지의 말단부 구릉으로 이동한다. 이 때 묘제도 변하여 앞 시기의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에서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으로 바뀌게 된다. 이것을 잘 알려주는 것이 서악리고분군이다.

 

서악리고분군은 경주시 서악동의 무열왕릉을 중심으로 하는 능원(陵園)내의 산중턱과 인접한 북편의 선도산 산록에 분포하는 고분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여기에는 전진흥왕릉(傳眞興王陵), 전진지왕릉(傳眞智王陵), 전문성왕릉(傳文聖王陵), 전헌안왕릉(傳憲安王陵)과

전법흥왕릉(傳法興王陵), 태종무열왕릉(太宗武烈王陵) 등의 왕릉 6기가 소재하고 있다. 또 이 고분들의 북서에 있는 선도 산성 안

곳곳에서도 고분들이 조사되었고, 동편의 왕릉들을 감싸고 길게 뻗는 능선들과 남편의 대구-경주간 국도가 통과하는 소태고개의 좌우

능선들에도 많은 고분들이 분포하고 있다. 특히 소태고개의 동편에 남북으로 길게 뻗은 능선을 ‘장산’이라고 부르는데, 이곳의 남쪽

하단부에는 장산 토우총(獐山 土偶塚)이 위치해 있다.

 

서악동에 위치한 왕릉으로 전해지는 것 가운데 확실한 것은 제29대 태종무열왕릉 뿐이고, 나머지 5기의 능들은 북쪽의 선도산 동남자락에

있는 고분들 가운데 조선 영조 6년인 경술년(1730년) 이후 전칭되어 오던 것을 1960년 이후 정부에서 사적으로 지정하여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 무열왕릉을 제외하면 서악리에 분포하는 고분들 가운데 최대형분들인 무열왕릉의 뒤편에 남아 있는 것들을 무시하고

그 위에 분포하는 비교적 규모가 작은 것들을 지칭한 것이다. 이 고분군 가운데 규모가 크고 왕릉으로 추정할 수 있는 것은 앞에 설명한

무열왕릉 뒤에 능선의 상부를 따라 분포하는 무열왕릉을 포함한 5기의 대형고분들일 것이다. 이 고분들은 선도산에서 동향한 능선의

정상부를 따라 위에서부터 1·2·3·4호분, 무열왕릉 순으로 배열되어 있다. 이 고분들은 모두 남향의 돌방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태종무열왕릉 앞을 나오면 길 건너편 작은 고분 두기와 하얀 안내판이 보였다.

내친김에 가까이 가보니 앞에 보이는 김양 묘와 뒤쪽으로 보이는 김인문의 묘였다.

 

김양묘(金陽墓)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신라 하대의 공신 김양의 묘.

경상북도 기념물 제33호. 지정면적 7,861㎡. 김양은 태종 무열왕의 9세손으로 김주원(金周元)의 증손자이고, 아버지는 정여(貞茹)이다.

그는 828년(흥덕왕 3)에 고성군(固城郡) 태수를 지낸 후 중원소경(中原小京)의 장관과 무주도독(武州都督)을 역임하였다. 흥덕왕 사후

김균정(金均貞)을 도와 왕위쟁탈전에 참여하였으나 패하여 청해진의 장보고(張保皐)에 의탁해 있다가 839년에 청해진의 군사를 이끌고

경주로 쳐들어가 민애왕을 시해하고 신무왕을 즉위시켰다.

그 공으로 김양은 창부령(倉部令)에 임용되었고 이어서 시중(侍中) 겸 병부령(兵部令)에 임명되었으며 그의 딸을 문성왕에게 시집보냈다.

문성왕 19년(857)에 나이 50세로 죽자 그는 서발한(舒發翰)에 추증되고 김유신의 예에 따라 장례를 치르었으며 태종 무열왕릉에

배장(陪葬)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의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태종 무열왕릉 앞쪽 약 15m지점에 있는 둘레 약 60m 되는 원형봉토분을 김양의 묘로 비정하고 있다.

 

 

 

김인문묘(金仁問墓)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신라 문무왕의 아우 김인문의 무덤.

경상북도 기념물 제32호. 봉분은 원형분이며 묘앞의 왼쪽에 김인문묘비의 귀부(龜趺)가 남아 있다.

종래에는 태종무열왕릉 앞에 있는 두 개의 무덤을 두고 김인문묘와 김양(金陽)의 묘로 서로 혼동하여 그 주장이 달랐다.

그런데 ≪삼국사기≫에 기록된 것처럼 김양묘는 태종무열왕릉에 가까이 좀 작은 딸린무덤[陪葬] 형식으로 배치된 것이고,
김인문묘는 남쪽에 약간 봉분이 크고 왼쪽에 묘비의 귀부가 남아 있는 것으로 정설화되어가고 있다.
김인문묘비는 효소왕이 김인문을 태대각간(太大角干)으로 추증하고 695년(효소왕 4)에 예로써 장례를 할 때 건립된 것이다.

지금 서악동에는 태종무열왕릉을 비롯하여 김양묘와 김인문묘가 있으니, 당시 서원(西原)은 김씨왕실의 장례지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며, 김인문도 왕족으로서 유능하고 삼국통일에 공이 크기 때문에 이 곳에 후장(厚葬)한 것으로 보인다.

 

 

 

 

경주서악리귀부(慶州西岳里龜趺)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귀부.

높이 1.04m. 보물 제70호. 태종무열왕릉 남쪽 길 건너편에 있는 것으로, ≪삼국사기≫ 열전이나 서악서원(西岳書院)
영귀루(永歸樓) 북대(北臺)에서 발견된 각자비편(刻字碑片)의 상태로 미루어보아 김인문(金仁問)의 묘비로 추정된다.

네 발 대석을 힘있게 디디고 있는 귀부는 목을 앞으로 길게 빼었는데, 위아래 실상화문(實相華文)을 장식하였고
사실적으로 표현한 다섯 가닥의 목주름살이 자연스럽게 표출되어 있다.

눈 주위에는 구름문양을 장식하였고 입의 아래턱부분 양쪽에 수염과 비운문(飛雲文)을 장식하여 귀두(龜頭)를 돋보이게 하였다.
큼직한 육각으로 된 귀갑(龜甲)은 조각솜씨가 뛰어나며 귀갑 안에는 연륜을 나타낸듯 갑층(甲層)을 중첩되게 조출하여 사실적으로 느껴진다.

전체 귀갑의 외연(外緣)에는 비운문을 돌렸고 비운문대의 바깥쪽에 연주문대(連珠文帶)와 같은 한가닥의 띠를 돌린 것이 특색이다.
귀갑의 중앙에는 연화문좌의 장방형 비좌(碑座)가 마련되어 있는데, 좌우 양쪽에는 탑의 기단부에 흔히 보이는
동자주(童子柱 : 세로로 세우는 짧은 기둥)와 우주(隅柱 : 모서리기둥)를 조각하였다.

앞발과 뒷발이 모두 5가락식[五瓜式]으로 되어 있는 것이 태종무열왕비 귀부와는 다르지만 기교면에서는 쌍벽을 이루고 있다.
건립연대는 대략 삼국통일 초인 7세기 중반으로 추정된다.

 

 

 

 

 

 

 

                                                                                                                    촬영일 : 2012년 12월 3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