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 였는지 난 드라마는 잘 보지않는 편이었다.
우연한 기회 거실에 켜져있던 TV드라마에서 낮익은 안압지나 경주의 명소들이 스쳐 지나가는 장면을 보면서
지켜보게 되었는데 그것이 KBS 1TV 대하드라마 대왕의 꿈이었고 이후 주말이 되면 시간 맟추어 TV앞에서
기다리기도 하였는데 어느날 갑자기 재미붙여 보고있던 그 드라마가 보이지도 않았고 자연다큐멘터리가
방영되고 있었다. 영문도 모른채 그와 관련한 기사를 보게 되었던것.
한국방송연기자 노동조합의 촬영거부 투쟁, 주연 배우들의 부상으로 인한 배우교체, 그리고 출연료 미지급
사태에 따른 촬영거부 등으로 결국 4주 결방이라는 최악의 사태에 당면 하게 되었다는 기사 내용을 보게 되었는데
이에 앞서 한창 재미가 더 해 갈 무렵 어느 날 오후 한 번도 가 본적이 없는 선덕여왕릉을 처음 돌아보기도 했었다.
경주낭산(慶州狼山)
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동에 있는 산. 총 82만7845㎡.
사적 제163호. 보문동·구황동·배반동의 3개 동에 이어져 남북으로 장축을 이룬 야산이다.
신라시대에는 3사(三祠) 가운데 대사(大祠)를 받들던 중악(中嶽)으로, 서라벌의 진산(鎭山)이었다.
높이 115·102·100m에 달하는 3개의 봉우리를 따라 그 아래 능선을 중심으로 중요한 유적과 유물이 많이 있다.
그중 대표적 유적으로는 그 남쪽 끝에 있는 사천왕사지(四天王寺址)와 망덕사지(望德寺址)를 비롯하여 동북쪽에 자리잡은
신라왕실의 기복사찰이었던 황복사(皇福寺) 사지, 그리고 문무왕의 화장터로 추정된 능지탑(陵只塔)과 함께
남봉 아래 자리잡은 선덕여왕릉을 들 수 있다.
서쪽에는 신라의 궁궐로 이름 높은 반월성, 동궁으로 알려진 안압지가 있으며, 이와 매우 가까운 거리에
황룡사지와 분황사가 있는 등, 신라왕실과는 밀접한 연관을 지닌 산이다.
특히, 실성왕대(402∼416)에는 이 산을 신유림(神遊林)이라 하여 성스러운 산으로 추앙하였다.
즉, ≪삼국사기≫ 권3 실성이사금조(實聖尼師今條)에는 “낭산에서 구름이 떠올라 바라보매
마치 누각과 같고, 향기가 짙게 퍼지며 오랫동안 없어지지 아니하였다.
왕이 말하되, 이는 반드시 선령(仙靈)이 하늘에서 내려와 놂이니, 아마 이 땅이 복지(福地)일 것이라 하여,
이로부터 나무를 베지 못하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낭산의 중요 유적·유물을 북쪽에서부터 개관하면, 먼저 산의 동북단에 있는 황복사지를 주목할 수 있다.
이 절터 주변에서는 ‘皇福(寺)’ 또는 ‘王福’과 같은 명문의 기와조각이 발견되었으며, 삼층석탑 전방 금당지로 추정되는 지점에는
여러 개의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매몰되어 있다.
또한, 그 남쪽에는 2구의 석조 귀부가 파손된 채 남아 있으며, 주변에서는 명문을 지닌 비 조각들이 발견되었다.
비문의 내용은 알 수 없으나, 그 성격으로 보아 사적비 또는 탑비로 추정된다.
이곳의 석탑은 1942년 중수 때 발견된 2구의 순금불상과 사리구를 비롯하여, 금동함에 기록된 탑지(塔誌)의 내용에 의거해볼 때,
700년을 전후하는 시기에 왕실의 기복을 위하여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산의 서북쪽에는 시내를 바라보는 곳에 최치원(崔致遠)의 독서당이 남아 있으며, 그 아래에는 신라시대의 목탑지
또는 건물지가 있어 옛 자취를 살필 수 있다.
독서당 남쪽에는 중요한 절터가 있었으나 알 수 없고, 이곳으로부터 이동된 석조십일면관음보살입상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또 민족항일기에 옮겨진 석조관음입상을 비롯하여 석탑재들이 현장에 흩어져 있어,
당시 낭산이 지녔던 불교미술의 위치를 대변해 주고 있다.
특히, 현칭 중생사(衆生寺)의 마애지장보살상은 그 유례가 희귀한 피모보살상(被帽菩薩像)이며, 그 남쪽 약 250m 지점에
능지탑이 위치하는 등, 이곳 유적의 시사하는 바가 크다. 능지탑 동편 마을을 오늘날에도 강선리(降仙里)라 하는 것은
옛 사적을 따라 붙여진 전통적 명칭이며, 강선리 주변에도 탑재가 흩어져 있다.
남봉의 아래에는 선덕여왕릉이 현존하며 그 아래 사천왕사지가 있다.
사천왕사와 망덕사는 낭산의 남단에 있는 사찰로서 서로 밀접한 연관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 중에서도 사천왕사는
문무왕 당시 명랑(明郎)의 비법에 의하여 당나라 군사를 물리친 호국사찰로서 더욱 유명하다.
이와 같은 국방적 사찰이 이곳 낭산의 남단, 가장 중요한 신유림에 위치하였음은
낭산의 지리적 중요성을 인식하게 하는 단서가 된다.
사천왕사는 당시 조각의 명장(名匠)인 승려 양지(良志)의 작풍을 알게 하는 통일신라시대의 중요한 유적지임에도 불구하고,
민족항일기에 금당지와 강당지를 가로지른 의도적인 철도 개설로 인하여 파괴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금당지 전방에 배치된 목조쌍탑지는 통일기의 사원 건축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그 전방에 놓인 2구의 석조 귀부 가운데 하나가 문무대왕비였던 점 또한 사찰 건립의 배경을 짐작하게 한다.
이와 같이 낭산은 역사·인문·지리적으로 중요한 산일 뿐 아니라, 고대 유적과 유물이 많이 남아 있는 산으로서 주목되며,
또한 호국사상의 본거지가 되었던 곳으로서 중요한 역사적 현장으로 평가된다.
선덕여왕(善德女王, ? ~ 647년 음력 1월 8일, 재위: 632년 ~ 647년) 또는 선덕왕(善德王)은 신라의 제27대 여왕이며,
한국사에서 최초의 여왕으로 알려져 있다. 성은 김(金), 휘는 덕만(德曼)이다. 진평왕과 마야부인(摩耶夫人)의
장녀이며 태종무열왕의 큰이모이다.
선덕여왕은 《삼국사기》에는 진평왕의 장녀, 《삼국유사》에는 순서 없이 딸로, 필사본 《화랑세기》에는 차녀로 기록되어 있다. 진평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화백회의에서는 그녀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여 성조황고(聖祖皇姑)라는 호를 올렸다. 삼국유사 왕력(王曆) 편에 의하면, ‘성골남진고여왕립왕(金氏聖骨男盡故女王立王)’이라고 하여 즉, ‘성골남자가 다하여, 까닭에 여자가 왕이 되었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녀가 즉위하기 1년 전인 631년, 칠숙과 석품이 반란을 일으켜 위기에 몰렸으나 이 난은 곧 진압되었다.
이때 상황은 ‘흰 개가 궁궐 담장에 올라갔다’고 표현되어 있다.고 한다.
삼국유사 선덕여왕조에는 선덕여왕이 미리 깨달은 일 세가지(지기삼사(知幾三事))가 수록되어 있다.
당 태종의 모란 꽃
즉위년인 632년, 당 태종은 빨강, 자주, 하양색의 모란 그림과 그 씨앗을 선물로 보냈다.
왕은 이를 보고 "이 꽃은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씨앗을 심어보니 과연 그랬다.
훗날 신하들이 이 일을 물어보니 왕은 "꽃 그림에 나비가 없었다. 이는 남편이 없는 나를 희롱한 것이다."라고 답했다.
일연은 이 고사를 소개한 뒤, 당 태종이 신라에 세 여왕(선덕, 진덕, 진성)이 있을 것으로 짐작한 점도 함께 칭찬하고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이 일이 진평왕 말년에 벌어진 일로 묘사되어 있다.
여근곡의 백제군
왕은 즉위 4년인 635년, 영묘사(靈廟寺)를 세운 적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겨울날, 영묘사 옥문지(玉門池)에 개구리가 사나흘 동안 운 일이 있었다.
이에 왕은 각간 알천(閼川), 필탄(弼呑)에게 병사 2천을 주어 서라벌 서쪽 부산(富山) 아래 여근곡(女根谷)을 습격하게 하였다.
여근곡에는 백제 장수 우소(亏召)가 매복해 있었는데, 알천과 필탄은 이를 쳐서 모두 죽였다.
훗날 신하들이 이 일을 물어보니 왕은 "개구리가 심히 우는 모습은 병사의 모습이요, 옥문이란 여자의 음부를 가리킨다.
여자는 음이고, 그 빛은 백색인데, 이는 서쪽을 뜻한다. 또한 남근이 여근에 들어가면 죽는 법이니 그래서 쉽게
잡을 수 있었다."라고 답하였다. 삼국사기에서는 옥문지에서 개구리가 운 때가 즉위 5년인 636년 5월로 기록하고 있다.
왕의 승하와 도리천
어느날 왕이 신하들을 불러 "내가 죽으면 도리천(忉利天)에 장사지내도록 하라. 이는 낭산(狼山) 남쪽에 있다."고 하였다.
이후 왕이 죽은 뒤 신하들은 왕을 낭산 남쪽에 장사지냈다. 이후 문무왕 대에 이르러 선덕여왕의 무덤 아래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세웠다. 이는 불경에 '사천왕천(四天王天) 위에 도리천이 있다'는 내용이 실현된 것이었다.
기타 일화
삼국유사 탑상 편에 따르면, 자장법사가 왕에게 황룡사 9층 목탑 건설을 진언한 때는 643년이었다.(삼국사기에서는 645년) 이에
왕은 김용춘을 시켜 백제에서 기술자 2백 명을 맞아들여 탑을 지었다. 탑의 기둥을 세울 때, 백제 장인 아비지는 백제 멸망의 꿈을
꾸어 일을 멈추었다. 그때 노승 한 명, 장사 한 명이 나타나 기둥을 세우고 사라졌다. 이에 아비지는 마음을 고쳐먹고 탑을 완성했다.
삼국유사 신주 편에 따르면, 하루는 여왕이 병이 깊어 홍륜사의 법척법사를 불러 치료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이에 밀본법사를 불러 침실 밖에서 경을 읽게 하였다. 경을 다 읽고 밀본은 막대기를 들어 침실 안으로 던졌다. 이에 늙은 여우 한 마리와 법척이 찔려
뜰 아래로 쓰러졌다. 이에 왕의 병이 당장 나았다.
사진 촬영일: 2012년 10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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