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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망덕사지(慶州 望德寺址)와 당간지주 (幢竿支柱)

도랑도랑 2012. 11. 28. 23:07

 

높이 115m,102m,100m에 달하는 낭산(狼山)의 3개 봉우리를 따라 그 아래 능선을 중심으로

중요한 유적과 유물이 많이 있다고 했다. 그 중 대표적 유적으로 남쪽끝에 있는 사천왕사지(四天王寺址)와

망덕사지(望德寺址), 동북쪽에 자리잡은 신라왕실의 기복사찰이었던 황복사(皇福寺) 사지,

그리고 문무왕의 화장터로 추정된 능지탑(陵只塔)과 함께 남봉 아래 선덕여왕릉을 들 수 있다.

 

 

 

경주 망덕사지 당간지주(慶州 望德寺址 幢竿支柱)

보물제69호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964

당간은 옛날 절에서 불교의식이 있을 때 달던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았던 깃대인데, 당간을 고정 시키기 위해양옆에 세운

돌 기둥을 당간지주라고 한다. 이 당간지주는 망덕사터 서남쪽에 65Cm 간격으로 서로 마주보고 서 있으며형태를 보면 안쪽면은

위로 평면을 이루고, 나머지 세 면은 아랫쪽에서 위로 가면서 점차 가늘어진다. 기둥의 맨 위는 바깥쪽이 둥글고경사지게 처리

되었다. 바깥쪽 양 모서리는 중간쯤에서 부터 위로 모를 죽였으나 장식은 없다. 보통은 상, 중, 하 세 곳, 또는 상, 하 두 곳에

당간을 고정 시키던 구멍이 남아 있다. 그런데 이 당간지주는 맨 위쪽 끝에만 네모나게 홈을 파서 당간을 고정 시키도록 되어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에 의하면 이곳 망덕사는 신라 신문왕(紳文王)  5년(685)에 처음 건립 되었다. 이 당간지주도

절이 처음 건립될 때의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통일신라시대 초기의 양식이나 조각수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경주 망덕사지 당간지주 안내판 설명문에서)

 

 

 

 

 

 

 

 

 

 

 

 

 

망덕사지(望德寺址)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사찰인 망덕사의 절터.

 

사적 제7호. 면적 2만 4,300㎡. 〈삼국유사〉에 의하면 679년(문무왕 19) 당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해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지었다는 소문이 당(唐) 왕실에 전해져 사신이 파견되자 사신을 속이기 위한 방편으로 사천왕사의 건너편에 이 절을

지었다고 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684년(신문왕 4) 4월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그 뒤의 사찰 역사는 전하지 않지만 현재

절터에 목탑의 기단이 동서에 있고, 그 북쪽에 금당지(金堂址)가 있는 것으로 보아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쌍탑가람식

배치였음을 알 수 있다. 절터의 남서쪽 솔밭에 있는 당간지주 (幢竿支柱)는 보물 제69호로 지정되어 있다.

 

 

 

 

 

 

촬영일: 2012년 10월 14일

 

 

사천왕사지 당간지주

 

 

 

 

사천왕사지(四天王寺址)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낭산(狼山)에 있는 신라시대의 절인 사천왕사의 터.

 

사적 제8호. 679년(문무왕 19)에 창건된 사천왕사는 쌍탑식(雙塔式) 가람이며, 창건과 관련된 많은 설화를 통해

당시 신라인들의 우주관과 호국사찰이었던 사천왕사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이 사지(寺址)는 원래 신유림(神遊林)이라고

하는 칠처가람지허(七處伽藍之墟)의 하나로 신성시되었던 곳이다. 선덕여왕은 자신이 죽으면 도리천(忉利天)에 묻으라는

유언을 남기면서 이곳을 지목했는데, 여왕이 죽은 지 30년 뒤에 왕릉 아래에 사천왕사를 짓게 됨으로써 사람들은 다시

여왕의 예지력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이 설화는 낭산을 수미산처럼 여긴 신라인의 불국토사상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수미산 꼭대기에 도리천이 있고,

그 아래에 사방을 관장하는 천왕의 주처인 사천왕천(四天王天)이 있다는 불교적 우주관과 일치하는 것이다.

 

또다른 설화에 의하면 674년 당이 신라를 침공하려 하자 문무왕이 명랑법사(明郞法師)에게 당군을 막을 계책을 구했다.

이에 명랑법사는 낭산 남쪽 신유림에 사천왕사를 짓고 밀교의 비법인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을 쓰라고 일러주었다.

그러나 침략이 임박하여 절을 완성시킬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자 우선 채백(彩帛)으로 절을 짓고 풀을 묶어

오방신상(五方神像)을 만든 후 유가명승(瑜伽明僧) 12명으로 하여금 비법을 쓰게 했다. 그러자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풍랑이 일어 당군의 배는 모두 침몰되었다고 한다. 그후 5년 만에 절을 완성하여 사천왕사라고 이름하고

사천왕사성전(四天王寺成典)을 두어 관리하게 했다고 한다. 가람배치는 금당(金堂)을 중심으로 동서에 탑을 세운

쌍탑식가람이며, 금당 북쪽으로는 좌우에 경루(經樓)를 두었다. 두 탑지(塔址)에는 사방 3칸의 초석이 남아 있고,

그 남쪽에는 중문지(中門址), 경루 북쪽으로는 강당지가 있으며 둘레를 회랑(廻廊)이 둘러싸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의 고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당초무늬 와당(瓦當)과 사천왕이 새겨진 전(塼)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존하는 유물은 사지 동편에 있는 머리가 없어진 귀부(龜趺) 2기, 비신(碑身), 당간지주뿐이다.

                                                                                                                                    촬영일: 2012년 10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