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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浮石寺)

도랑도랑 2012. 5. 22. 21:36

부석사(浮石寺)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이다.

676년(문무왕 16) 2월에 의상(義湘)이 왕명으로 창건한 뒤 화엄종(華嚴宗)의 중심 사찰로 삼았다.

화엄종(華嚴宗)이란 중국 당(唐)나라 때에 성립된 불교의 한 종파이며 화엄경을 근본 경전으로 하여
천태종(天台宗)과 함께 중국 불교의 쌍벽을 이루었다.

2012년 5월 19일 부석사를 처음 다녀 오면서 많은것을 보고 알게 되었다.

 

 

보물 제225호 영주 부석사 당간지주 (榮州 浮石寺 幢竿支柱)

 
절에 행사가 있을때 절의 입구에는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며, 장대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이 당간지주는 부석사 입구에 1m 간격을 두고 마주 서 있다. 마주보는 안쪽 옆면과 바깥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고, 양쪽 모서리의 모를

둥글게 다듬었다. 기둥 윗부분은 원을 2겹으로 경사지게 조각하였고, 옆면 3줄의 세로줄이 새겨져 있다. 기둥머리에는 깃대를 단단하게

고정시키기 위한 네모 모양의 홈이 파여 있다. 기둥 사이에는 한 돌로 된 정사각형의 받침 위에 원형을 돌출시켜 깃대를 세우기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이 주변에는 연꽃을 장식하고, 윗면 중앙에는 구멍을 뚫어 당간의 밑면을 받치고 있다.

 

대체로 꾸밈을 두지 않아 소박한 느낌을 주는 지주이다. 또한 가늘고 길면서도 아래위에 다소 두께 차이가 나 있기 때문에 오히려

안정감을 주며, 간결하고 단아한 각 부분의 조각으로 보아 통일신라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출처:문화재청)

 

 

부석(浮石)

조선 숙종 때 이중환의 택리지 기록에 의하면 "아래 위 바위 사이에 약간의 틈이 있어 실을 넣어 당기면 걸림 없이 드나들어 뜬돌임을

알 수 있다." 라고 적혀 있다.이리하여 절 이름을 '부석사'라 불렀으며,그후 선묘신룡이 부석사를 지키기 위해 석룡으로 변신하여

무량수전 뜰 아래 묻혔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고 한다.

 

 

일주문과 천왕문

부석사를 다녀 오면 여러번 찾게 된다는 글을 어디에서 본 것 같아 그 이유를 알것만도 같다.

이름 난 큰 사찰들을 들어서게 될 때 일주문을 통과하고 천왕문을 들어서야 본전건물이 나타났다.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부석사엔 왜 천왕문이 없었을까 하는 착각 이었다.

일주문을 들어서고 제일 먼저 본 것이 당간지주였고 곧 바로 천왕문을 사진으로 담았지만 저 계단으로 다니는 사람은 없었고

오른쪽으로 돌아 들어가야만 했던 이유는 천왕문 안쪽길엔 작은 포크레인이 굉음을 울리며 몇명의 인부들이 큰 돌을 짜 맞추며

길을 고치는 공사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천왕문 통행은 통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공사 관계로 정면으로 들어가지 않고 돌아서 들어갔기 때문에 설법전 앞길로 범종각 부터 둘러보았기 때문에 범종루 누각에

"봉황산부석사(鳳凰山浮石寺)"라 쓰인 편액(扁額)이 걸려 있는것도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부석사(浮石寺) 범종(梵鐘)

 

 

 

 

부석사무량수전(浮石寺無量壽殿)
국보 제18호. 부석사의 주불전(主佛殿)으로 무량수불(無量壽佛)인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를 본존(本尊)으로 봉안하였다.

 

신라 문무왕 때 짓고 고려 현종(顯宗, 제8대 왕, 재위 1009∼1031) 때 고쳐 지었으나,

공민왕(恭愍王, 제31대 왕, 재위 1351~1374) 7年(1358)에 불에 타 버렸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고려 우왕(禑王, 제32대 왕, 재위 1374~1388) 2年(1376)에 다시 짓고 광해군(光海君, 조선 제15대 왕, 재위 1608~1623) 때

새로 단청한 것으로 1916年에 해체와 수리 공사를 하였으며, 규모는 앞면 5칸, 옆면 3칸으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으며, 주심포(柱心包) 양식으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한 구조를 간결한 형태로 기둥 위에만 짜 올렸다.


특히  세부 수법이 후세의 건물에서 볼 수 있는 장식적인 요소가 적어  주심포 양식의 기본 수법을 가장 잘 남기고 있는 대표적인 건물로

평가받고 있으며, 건물 안에는 다른 불전과 달리 불전의 옆면에 불상을 모시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고도 한다.

 

무량수전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안동 봉정사(鳳停寺) 극락전(極樂殿, 국보 제15호)과 더불어 오래된 건물로서

고대 사찰건축의 구조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건물로 평가되고 있다.

 

부석사(浮石寺) 무량수전(無量壽殿) 편액(扁額)

부석사 무량수전은 신라 문무왕 때 지어졌으며, 이후 고려 공민왕 때 불에 탄 이후 다시 지어졌다.

무량수전에 걸린 편액 "무량수전(無量壽殿)"은 고려 공민왕이 친히 쓴 어필(御筆)이라고 한다.

이 편액은 공민왕이 홍건적의 침략으로 말미암아 안동으로 피난해 있을 당시에 안동에서 제일 가까운 영주 부석사를 찾아

"홍건적의 침입을 물리치고 다시는 그러한 침입이 없도록 막아줄 것을 기원하는 한편 부석사의 무량수를 비는 뜻"에서

쓴 것으로 알려졌다고 한다.

 

 

 

 

부석사무량수전앞석등(浮石寺無量壽殿─石燈)
높이 2.97m. 국보 제17호. 신라시대의 전형적인 팔각석등으로 상하 비례의 교묘함이나 조각의 정교함에서

신라시대 석등 중에서도 손꼽히는 걸작이다.

 

4매로 짠 방형의 지복석(地覆石) 위에 1석으로 된 지대석(地臺石)이 놓였는데 지대석의 네 면에는 각각 2구씩의 안상(眼象)이

장식되었으며 상면에는 팔각의 하대석(下臺石) 받침 2단이 마련되었다.

 

하대석은 모서리를 향하여 한 잎씩 복판복련(複瓣覆蓮)이 조각되었고 꽃잎 끝은 말려서 귀꽃이 되었다.

특히, 복련 중심에는 높은 3단의 받침이 있어 연꽃 속에서 간주(竿柱)를 받쳐 올리는 듯이 표현되었다.

간주는 전형적인 팔각주(八角柱)로서 굵기나 높이가 아름다운 비례를 보이고 있다.

 

상대석(上臺石)은 통식을 따라 평박(平薄)하나 여기에 조각된 8엽의 앙련(仰蓮)은 상당한 입체성을 보여주고 있다.

화사석(火舍石 : 석등의 점등하는 부분)은 팔각으로 네 곳에 장방형 화창(火窓)을 내었고 화창 주위에는 작은 구멍을 돌려 뚫었으며

나머지 네 면에는 앙련 위에 보살입상 1구씩이 조각되었는데 조각수법이 매우 정교하다.

 

옥개석(屋蓋石)은 낙수면이 우뚝하고 추녀 밑에 약간의 반전(反轉)이 있고, 정상에는 복련이 조각되었다.

상륜부(相輪部)에는 보주(寶珠)가 남아 있다.

 

 

 

 

 

 

 

안양루는 무량수전 앞마당 끝에 놓인 누각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무량수전과 함께 이 곳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안양루는 1555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595년부터 1598년까지 석린루를 중창하고 사명대사가 중창기를 썼다고 한다.

안양루이자 안양문은 하나의 건물에 누각과 문이라는 2개의 기능을 부여한 것인데 '안양'은 극락이므로 안양문은 극락 세계에 이르는

입구를 상징한다. 극락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지나면 바로 극락인 무량수전이 위치한 구조로 되어있는 것이다.

안양루는 1916년 루 아래 돌계단이 놓이기 전까지는 루의 기능만 하다가 계단이 놓이면서 문의 기능을 겸하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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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루에는 세 개의 편액이 걸려있는데 안양루 바깥쪽 처마밑에 걸린 편액은 '부석사'이고

그 밑에는 '안양문'이라는 편액이, 안양문을 지나 올라서 무량수전을 등지고 돌아보면 '안양루'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부석사 浮石寺'편액은 1956년 이승만 전 대통령이 부석사 방문시 쓴 편액이고

'안양루 安養樓'는 1974년 영주 고장 출신인 석당 石堂  김종호 金宗鎬 선생(1901~1985)의 작품이라고 한다.

 

 

부석사삼층석탑(浮石寺三層石塔)
높이 5.26m. 보물 제249호. 2층기단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쌓은 전형적인 신라석탑으로서 무량수전(無量壽殿, 국보 제18호) 옆의 높은 대지 위에 세워져 있다.

 

지대석(地臺石)과 하층기단의 중석(中石)을 한데 붙여 8석으로 짜고 중석 각 면에는 2개의 우주(隅柱 : 모서리기둥)와 그 사이에 2개의 탱주(撑柱 : 받침기둥)를 모각(模刻)하였다. 하층기단 갑석(甲石)은 윗면이 경사졌으며 그 중앙에 상층기단 중석을 받기 위한 호형(弧形)과 각형(角形)의 받침을 조각하였다.

 

상층기단중석은 각 면 1매씩의 판석을 세워서 짜고 각 면에는 우주와 탱주 하나씩을 모각하였다. 상층기단 갑석은 2매의 장판석(長板石)을 남북으로 길게 덮고, 밑에는 부연(副椽 : 탑의 기단의 갑석 하부에 두른 쇠시리)을 만들고 윗면에는 각형 2단의 탑신받침이 있다.

탑신부의 옥신석(屋身石)과 옥개석(屋蓋石)은 각각 1석으로 되었고 각 층 옥신에는 우주가 있을 뿐 조각은 없으며 처마는 수평이며 옥개받침은 각 층 5단인 전형양식을 따르고 있다. 현재 상륜부(相輪部)는 노반(露盤 : 탑의 최상부 옥개석 위에 놓아 복발·앙화·상륜 등을 받치는 장식)과 복발(覆鉢 : 탑의 노반 위에 놓는 엎은 주발 모양의 장식)만이 남아 있다.

 

이 석탑은 신라중기의 양식을 보이고 있으나 하층기단의 너비가 지나치게 넓고 초층옥신석이 높이에 비하여 너비가 넓어 장중해 보인다. 이에 비하여 옥개의 폭이 좁은 점은 경주구황리삼층석탑(慶州九黃里三層石塔, 국보 제37호)과 비교된다.

 

1960년 해체, 수리 당시 3층옥신 중앙에서 얕은 방형 사리공(舍利孔)이 있었으나 사리구(舍利具)는 없었고 기단부에서 철제탑(鐵製塔)·불상편(佛像片)·구슬 등이 발견되었다. 이 때 일부 파손된 부분은 새로운 부재로 보충하였다고 한다.

 

부석사 지장전

관세음보살과 함께 중생구제의 큰 원력으로 많은 대중들의 귀의처가 되고 있는 지장보살을 모신 전각을 지장전,  명부전, 시왕전

이라고 한다.  지장보살은 특히 지옥중생의 구세주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 그 때문에 명부전에는 지장보살과 그 협시인 도명존자와

무독귀왕 외에도 염라대왕을 위시한 지옥의 10왕상을 봉안한다.

 

 

 

 

 

 

 

부석사 경내에는 신라유물인 무량수전앞 석등(국보 제17호), 석조여래좌상(보물 제220호), 삼층석탑(보물 제249호), 당간지주(보물 제255호) 등이 있고 고려시대 유물인 무량수전(국보 제18호), 조사당(국보 제19호), 소조여래좌상(국보제45호),조사당벽화(국보 제46호), 고려각판(보물 제735호), 원융국사비(도유형문화재 제127호),삼층석탑(도유형문화재 제130호) 등이 있다. 특히, 무량수전은 봉정사 극락전과 더불어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 건물이다.조사당 벽화는 목조 건물에 그려진 벽화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현재 유물전시관에 보관되어 있다.

 

주요문화재 : 무량수전(국보 제18호), 무량수전앞 석등(국보 제17호), 조사당(국보 제19호), 소조여래좌상(국보 제45호), 조사당벽화(국보46호), 석조여래좌상(보물 제220호),삼층석탑(보물 제249호), 당간지주(보물제255호), 고려각판(보물 제735호)

이렇게 중요한 문화재가 있는곳을 하나하나 감상 하면서 살펴보질 못하고 온 것이 아쉬움으로 남아 언젠가는 또 다시 찾을것 같다.

 

                                                                                                                                                         촬영일: 2012년 5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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